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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찬 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 ||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친일’ 문제에 대한 ‘변명’과 ‘옹호’의 담론이 상당한 힘을 갖고 있다. 일제 지배 하에서 학교나 교회,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 식민지 하에서는 모든 이가 크건 작건 일제에 협력하였다는 주장, 일제 지배기구 안에 들어가서 한국인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였다는 주장 등 여러 담론이 아직도 건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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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에 대한 이와 같은 변명과 옹호의 담론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해방 직후에는 친일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과 매도의 담론이 강력하였다. 당시에는 변명과 옹호 담론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좌절된 이후, 변명과 옹호 담론은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제헌국회는 헌법을 만든 뒤 가장 먼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었고, 이에 따라 반민특위가 1949년 초 구성되었다. 그만큼 친일청산 문제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당시 반민특위에 체포된 이들도 처음에는 일제에 협력했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말을 하면서 반성의 빛을 보이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였다면서 “과거를 악몽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49년 6월 이승만정부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고 반민특위의 인적 구성을 완전히 바꾸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반민특위에서 조사를 받던 이들은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변명과 합리화를 시도하고 나섰다. 한 친일 관료는 자신은 총독부의 지시를 받아 행정에 참여했지만, 민족을 위하여 일하려고 노력했으며, 심지어 총독부 정책에 반대하며 저항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어떤 관료는 자신들은 당장 국권을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서서히 실력을 기르면서 민족을 지도하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총독부로부터 일급 친일파로 인정되어 중추원 참의로 임명된 어떤 이는 자신이 이를 거절하면 배일혐의자로 볼까봐 어쩔 수 없이 이를 수락했다고 주장했다. 종교인, 특히 목사로서 일제말기에 신사참배나 황민화정책에 적극 협력한 이들은 자신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면 교회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신사참배는 본의가 아니었으며, 일제 정책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어떤 목사는 일제 경찰의 밀정 혐의까지 받았는데, 그는 이를 극력 부인하였다.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근무한 한 언론인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매일신보에 근무하였다고 변명하였다. 매일신보 간부로서 지원병을 독려하기 위한 강연을 하고 다닌 이는 “화랑도 정신으로 대동아전쟁을 완수하자”는 의미로 강연을 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946년 반민특위 좌절로 상황 반전 후 지금까지 친일에 대한 변명 가운데에서 백미라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이광수의 고백서였다.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온 뒤 1949년 2월에 쓴 이 고백서를 통해 이렇게 변명했다. “1941년 12월 8일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나는 조선민족이 대위기에 있음을 느끼고, 일부 인사라도 일본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여줌이 민족의 목전에 임박한 위기를 모면할 길이라 생각하고, 기왕 버린 몸이니 이 경우에 희생되기를 스스로 결심하였다.” 반민특위의 피의자들은 특히 1949년 6월 이후 바깥 상황이 바뀌는 것을 알고 자기변명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들의 죄상을 고발하였던 증인들도 말을 바꾸기 시작하였으며, 그들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옹호하는 청원서를 내기 시작했다. 사실상 이러한 상황을 유도한 반민특위의 새로운 검찰부는 그해 가을부터 “개전의 정이 현저하다”는 이유로 그들 대부분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반민특위에서의 친일파 처벌은 이렇게 무산되었다. 그 이후, 친일에 대한 변명과 옹호의 담론은 현실 속에서 상당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담론은 오늘날에도 재생산되면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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