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420>
국사편찬위원회는 알고 있었다. ‘애국가는 윤치호에 의해 1907년에 작사됐음이 유력하다’고 1972년 일찌감치 공언했다.
그해 4월10일 문교부는 “국민교육에 필요하다”며 대외비 공문 ‘애국가 연혁 조사보고’를 국사편찬위에 요구했다. 그러자 국편위 기획관리부 자료관리실은 작사자와 연대 그리고 ‘가사의 변동상황과 관계인’을 조사, 문교부에 회신했다.
1974년 6월7일에는 문화공보부가 질의했다. 국편위 기획관리부 서무과는 ‘애국가에 대한 연혁’을 문공부에 회신했다. 애국가 작사자 논란, 1907년 이전 존재한 다양한 종류의 애국가와 가사, 애국가 작사의 시대적 배경 등을 담은 문건이다.
국편위가 문교부와 문공부에 보낸 이들 답변에는 공통된 내용이 있다.
먼저, 작사자다. “현재 애국가의 작사자로 논의되고 있는 인물은 윤치호·안창호·최병헌·김인식·민영환 등 5인이고 또한 단독작사설과 합작설(최병헌·윤치호) 및 개작설(민영환·김인식·안창호)이 있음. 이 중 윤치호설이 유력하나 현재로서는 미상임(72년), ‘윤치호설이 유력하나 현재로서는 단언하기 어려움(74년)”
다음, 작사 시기다. “융희 원년(1907)에 작사했다고 하나 그 이전에도 애국가라는 제목으로 다른 내용의 가사를 화창한 사례가 있음.”
1896년 5월9일자 독립신문에 발표된 ‘학부주사 이필균 애국가’와 ‘묘동 이용우 애국가’ 등 10편과 다른 자료에 수록된 애국가 7편을 포함, 총 17편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 ‘한영서원 발행 프린트’와 ‘백종섭씨 소장 창가책’에서 인용한 애국가가 특히 주목된다. 한영서원은 윤치호가 1907년 개성에 설립한 실업학교다. 윤치호는 그 무렵 현재와 같은 애국가를 작사했다.
국편위는 “서구열강 및 일본제국주의의 침투에 대한 민족적인 시각에 따른 애국심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작사되어 널리 화창되었음”이라며 배경까지 보고했다.
또 ‘애국가의 가사(변동된 것까지) 원문’ 항목에는 ‘백종섭씨 소장 창가책’의 애국가 4편을 담았다. ①‘동반구 아주에 우리대한은···’으로 시작하는 애국가 ②‘우리황상 폐하··’로 시작하는 애국가 ③‘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현 애국가 ④‘성자신손 천만년은··’으로 시작하는 ‘무궁화노래’(애국가)다. ①을 제외한 세 편 모두 1908년 발행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의 제1, 10, 14장이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국편위는 ‘기타 참고사항’으로 “1955년 5월13일자 본 위원회 주관 하에 애국가작사조사위원회에서 조사 작성한 애국가 작사자 조사자료를 보고한 바 있음”이라고 부연했다.
이들 공문을 찾아낸 애국가 연구의 권위자 김연갑 상임이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는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 이후 국사편찬위원회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면서 “두 공문은 1955년 조사보고서의 내용을 견지하고 있으나 작사 시점을 1907년으로 상정한 것, ‘윤치호설이 유력하나’라고 쓴 것은 첫 조사 17, 19년 후 업데이트된 부분”이라고 짚었다. 특히 “1972년 ‘미상’이 2년 뒤 ‘단언하기 어려움’이라고 바뀐 것은 사실상 윤치호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풀이했다.
김연갑 상임이사는 “국편위는 가사의 변화를 살피면서 ‘우리황상 폐하’로 시작하는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현 애국가, ‘성자신손 천만년은’으로 시작하는 ‘무궁화노래’(애국가)를 수록했는데 이 모두는 윤치호 역술 ‘찬미가’에 있는 것들이다. 1955년 조사 이후 ‘찬미가’를 주목한 데 따른 결과라고 본다. 1955년 조사보고서는 ‘찬미가’를 언급했지만 내용은 수록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영서원 발행 프린트’의 존재도 각별하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검속한 ‘애국창가 사건’ 관련문건으로 추정된다.
다만, 독립신문 발표 애국가 10편을 열거한 것이 초점을 흐렸다. 이들 10편에는 작사자가 명기돼 있으므로 현 애국가와는 무관하다. 1955년 조사자료를 답습한 탓에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하고 말았다.
한편 지난달 김연갑 상임이사는 “1955년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가 작사자가 누구인지, 표결 처리한 것 자체가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재심의를 해야한다”고 청와대에 청원했다. “제한적인 자료를 심사했지만, 이후 국내외에서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됐으므로 이를 수용해야 한다. 아울러 그때는 작사 주장자들의 제자와 가족 등의 간섭이 지나쳤으나 이제는 그런 문제가 없고, 친일인명사전까지 나온 마당에 친일문제는 더 이상 사회혼란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국편위는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김연갑 상임이사에게 답신했다. 59년째 쉬쉬거리고 있는 국편위, 이번에는 사실을 확인해줄 것인가.
※뉴시스<2014-04-07>
기사원문: ☞ [신동립 잡기노트] 윤치호 작사애국가…정부, 모르는척4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