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3.15 부정 선거와 관련해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부통령 문제다. ‘이승만은 문제가 없었고 이기붕 쪽이 문제였다’는 설명은 맞지 않지만,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이라는 점이 이승만 정부로선 몹시 거슬리는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서중석 : 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12월 담화 때도 그랬고, 1960년 2월 3일 정부에서 (3월 15일 선거를 치른다고) 공고한 직후(2월 13일)에도 러닝메이트에 관한 담화를 했다. 러닝메이트 이기붕이 당선되지 않으면 ‘나는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그것에 응종(應從)치 않겠다’, 따르지 않겠다는 거였다. 아니,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의) 최다 득표자가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이 되도록 헌법과 선거법에 해놓지 않았나. 이건 헌법과 선거법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또 국민에 대한 협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 못지않게 직접적으로 누구에게 얘기하는 것이겠나. ‘자유당 그리고 정부, 너희들이 꼭 러닝메이트가 (당선)되도록 해야 한다’고 해석될 여지가 많은 거다. 사실 러닝메이트 제도는 너무나 당연한 거다. 미국을 생각해봐라. 대통령하고 부통령이 다르다, 이게 말이 되나? 부통령이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나 그 둘이 같은 걸로 움직인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1952년 발췌 개헌을 할 때 (정부통령) 직선제로 고치면서도, 이건 포함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발췌 개헌의 다른 건 반대하더라도) 이것은 누구나 찬성할 만한 사안인데도 그랬다. 프레시안 :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이 대통령은 ‘모든 국민이 나를 따르고 존경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 1952년 부통령 선거에서는 다른 이유도 있다. 자유당 부당수(이범석)를 이 대통령이 지지한 게 아니라 대다수 국민이 잘 알지도 못하던 함태영이 부통령에 당선되게 했다. (이승만은 족청계를 이끌며 조직과 세력을 갖춘 이범석을 경계했다. 발췌 개헌에 앞장섰던 이범석의 족청계는 8.5 정부통령 선거 후 자유당에서 제거됐다. <편집자>) 그것뿐만 아니라 (한민당의 후신이자) 야당이던 민국당 후보(조병옥)를 제외한 모든 부통령 후보가 이승만을 지지했다. 그러니 (이승만 기준으로 볼 때) 욕만 해대는 야당을 빼놓고는 온 국민이 지지한 꼴이 된 거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때라도 고쳤어야 하는 것이었다. 사사오입 개헌 때 야당이 다른 건 다 반대했겠지만 (러닝메이트 제도) 이건 반대할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냥 넘어갔다. 1956년 선거에서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모든 부통령 후보가 자기를 지지하길 바라는 마음에 그런 건지는 알 수가 없다. (1950년대 초부터 거론되던) 내각 책임제 개헌론을 1958년 말, 1959년에 자유당 쪽에서 다시 들고나왔다. 지방은 다 장악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 당시엔 지방 국회의원이 (야당세가 강한 대도시 국회의원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 내각 책임제가 되면 항상 정권을 잡을 거라고 봤다. 그런 엉뚱한 마음을 품고 내각 책임제를 추진한 거다. 그러면서 자유당은 이 대통령에게 ‘대통령의 권한은 거의 그대로 둔다’고 했다. 그분 성격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내각 책임제를 못하게 했다. 어쨌건 내각 책임제는 대통령제하고는 다르니, 대통령 권한을 줄이는 것이라고 본 거다. 개헌이 그렇게 손쉽게 되는 건 아니지만, 자유당에서 그렇게 원한 것이고 그것만 했으면 부정 선거 양상이 또 바뀔 수 있는 것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리고 (자유당은) 러닝메이트제를 한때는 추진했다. 그런데 처음엔 그게 선거법을 고치면 되는 걸로 알았는데, 헌법 사안이라고 판단이 된 것이다. 그때쯤 돼서는 ‘헌법 고치려고 애쓸 것 없다’, 이렇게 된 거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식, ‘우리가 그전에 했던 게 있지 않느냐’라며 이 (부정 선거) 방식을 택하면서 러닝메이트제가 끝내 안 된 거다. 그런데 이렇게 대통령이 (1960년 선거를 앞두고) 담화에서 잇따라 ‘러닝메이트 식으로 같은 당에서 부통령이 돼야지, 다른 당에서 되면 난 대통령 안 하겠다’는 식으로 한 건 참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야당 후보가 부통령 되면 대통령 안 하겠다는 이승만
프레시안 :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중석 : 왜 그랬느냐. 기본적으로는 권력 문제다. 이분은 권력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훨씬 집요했다. 그렇지만 그것 말고도 두 가지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이 ‘조병옥 후보가 죽어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됐고, 그러니 부통령만이 문제였기 때문에 주로 자유당이 부정 선거를 저지른 거다’,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이 대통령은 부정 선거를 저지를 이유가 없지 않았느냐, 이런 주장이다. 그런데 그렇기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우선, 박정희 대통령도 그랬다고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정적에게 굉장히 가혹한 분이었다. 한때 동지였으나 나중에 정적으로 변하는 김구가 1949년 6월 26일 암살되는데, 그것에 얼마나 많은 이승만 정권 관계자들이 관련돼 있느냐 하는 것이 여러 자료에 나오지 않나.
김구 암살 사건에는 여러 형태의 배후 세력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본다. 예컨대 김구가 암살되던 바로 그때 헌병이 출동했다. 헌병 부사령관 전봉덕이 사전에 알고 있지 않았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또 포병 사령관(장은산)이 포병 소위 안두희한테 직접 지시를 내렸다는 것도 세상이 다 아는 일 아닌가. 이런 걸 포함해서 배후가 굉장히 많았는데, 눈곱만큼도 배후에 대한 수사를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안두희는 재판 중에 두 계급이나 진급했다. 김구 암살과 관련해 상당히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인물로 또 김창룡이 있는데, 그런 김창룡이 한국전쟁이 나자마자 (안두희를) 꺼내간 걸로 돼 있지 않나. (관련 기사 : 김구 죽인 “안두희 의사” 시대 부활하나)
그러면 누가 (암살) 배후가 돼 버렸느냐? (김구가 이끌던) 한독당이 배후로 지목됐다. 조직부장 김학규를 비롯한 한독당 간부들이 잡혀갔다. 김구 암살 사건에 대해 ‘내부적인 문제 아니겠느냐’고 이 대통령이 시사하는 담화가 나오는데, 그렇게 돼 버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7월 2일 “백범의 살해는 (…) 당내 의견 차이의 직접적 결과”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이승만의 정적으로서 비운에 빠진 건 김구만이 아니다. 조봉암도 그렇다.
서중석 : 김구에 이어 조봉암이 1952년 선거부터 최대의 라이벌로 등장하는데, 조봉암은 죽임을 당하지 않나. (이승만 정권이 뒤집어씌운 간첩 혐의 등에 대해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내린 걸 전에 이야기했는데, 당시 누가 조봉암이 사형당할 만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겠나.
장면도 마찬가지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은 장면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까지 보는 학자 등도 있다. 자유당 제3인자로 불린 이재학도 그렇게 얘기한 게 나온다. 왜냐하면 (제헌) 헌법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 임기가 1952년까지이고 그해에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게 돼 있는데, 국회에서는 이 대통령이 당선되기가 어렵다는 게 지배적이었다. 그러면서 ‘미국이 장면을 지지한다'(는 말이 나왔다). 사실 미국은 어느 한 사람을 딱 지지하는 식은 아니다. 어쨌든 국회, 미국이 초대 주미 대사이자 제2대 국무총리인 장면을 지지한다는 설이 널리 퍼졌고, 이게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는 데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났을 때 유명한 ‘국제 공산당 사건’을 내무부에서 발표하지 않나. 오제도와 함께 그 무서운 사상 검사이자 국민보도연맹을 만드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선우종원 등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아 이 대통령을 암살하고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발표였다. 세상에, 누가 봐도 기절초풍할 내용이었다. 그러나 선우종원은 일본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한 1960년) 4월 26일 이후, 장면 정권 때에야 귀국한다. 하여튼 이렇게 무섭게 때렸다. 이때(부산 정치 파동 시기)에 장면은 한때 도피해 있었다는 얘기도 듣고 그랬다. (선우종원은 장면 국무총리의 비서실장이었다. 참고로, 선우종원의 아들이 1986년 ‘금강산댐과 북한의 수공 위협’ 논란 때 전두환 정권의 주장에 힘을 실은 선우중호 전 서울대 총장이다. <편집자>)
이승만은 부정 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 치명적인 오해
프레시안 : 그런 장면이 1956년 이기붕을 누르고 부통령이 됐다.
서중석 : 장면 회고록을 읽어보면, 이 대통령과 함께 그해 8월 15일에 취임해야 하는데 (취임식장에서) 자기 의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고 돼 있다. 또 (이승만 쪽에서) 대통령 취임사만 하고 부통령 취임사는 못하게 했다. 장면이 다 써서 가지고 갔는데, 기회를 안 준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식장에 모인 사람들한테 ‘이 사람이 누구다’, 이렇게 소개하는 게 있었다. 3부 요인도 소개하고 몇 명 안 되지만 외국 대사도 소개했는데, 이 대통령이 장면은 소개하지 않더란다. 장면이 ‘이럴 수가 있느냐'(며 분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선 자제력이 약했던 것 같다. 이건 있을 수가 없는 거다. 공식 행사인데, (밉더라도) 겉으로는 웃는 모습도 취하고 하면서 그런 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조차도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선 잘하지를 못 하는, 자제력이 그 정도까지 강하지는 못한 분이었다.
이러니까 장면은 식이 끝난 후 성명을 발표하는 걸로 취임사를 대신했다. 외신 기자 회견도 했다. 장면은 아주 온화한 사람인데 이런 성질이 있더라. 민주주의를 강하게 요구하고, ‘현 정부가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이번엔 자유당이 들썩들썩 들고일어났다. ‘장면 발언은 국가 안보를 해치는 거다’, 이러면서 ‘장면 부통령 경고 결의안’을 제출했다. 재미난 나라랄까, 참 슬픈 나라다. 장면이 얘기한 것들을 “국민에 대하여 공적으로 사과하는 동시에 금후 여사한(이와 같은) 반국가적 언동을 중지할 것을 경고함”, 이런 거다. 장면이 ‘민주주의가 위태롭다’고 한 것은 반국가적 언동이니 그걸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이건 야당이 퇴장한 가운데 가결됐다. 세상에나.
그러고 나서 1956년 9월 28일 민주당의 두 번째 전당 대회가 열렸다. 장면은 민주당 최고위원이어서 여기에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총알이 날아왔다. 이게 유명한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이다. 다행히도 심장은 못 맞추고 손가락만 맞췄다. 그래서 이분이 살아난 거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배후에 사찰계 경찰이 있다’는 게 나오고 나중에 이게 김종원 치안국장, 이익흥 내무부 장관까지 비화됐다. (하수인 처벌로 끝나는 듯했으나) 4월혁명 이후 이 사건 재판이 다시 시작된다. 2심 판결을 보면 이익흥하고 자유당 고위 간부였던 임흥순은 무기 징역을 받고 김종원은 15년형을 받는다. 깊이 개입한 걸 인정한 것이다. 물론 (단죄는) 5.16쿠데타 이후 흐지부지됐다. (배후로 지목된 김종원, 이익흥 등 6명은 5.16쿠데타 후 모두 석방됐다. <편집자>)
1957년 9월엔 응오 딘 디엠 대통령이 월남(남베트남)에서 왔다. 일본하고도 사이가 나빴던 이승만 정부에 월남은 미국, 자유중국(대만)과 함께 최고의 맹방이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주최하는 공식 환영 만찬에 부통령을 초대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이 아주 껄끄럽게 생각하던 김병로 대법원장도 부르지 않았다. 또 응오 딘 디엠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였고, 장면은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정치인 아니었나. 장면도 보고 싶었지만 응오 딘 디엠도 보고 싶다고 안 했겠나. 그런데 끝내 만날 수 없었다.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이 대통령이) 미워하는 사람에겐 이랬다. 하여튼 자유당으로서도 절대 장면이 (1960년) 부통령에 당선돼선 안 되는 것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도 장면이 당선돼서는 절대 안 된다는 아주 강인한 집착이랄까,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장면은 부통령 때 ‘창살 없는 감옥에 살았다’고 자서전에 썼다. 오죽했겠나. 부통령 관저라는 데 꽉 잡혀 있었다.
소와 말까지 동원한 부끄러운 민의 시위 프레시안 : 정적에 대한 가혹한 태도 이외의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서중석 : 이것(정적에 대한 태도 문제)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다. 역대 정부통령 선거 중에서 제일 활기차고 정말 누가 될지 알기 어려웠던 것이 3개 있다.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겨뤘던 1971년 대선,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가 겨루고 정몽준 의원이 왔다 갔다 했던 2002년 대선, 그리고 1956년 선거다.
1954년 선거까지만 해도 이승만 정권은 전시 체제 분위기를 상당히 띄웠다. 그런데 1956년에는 (정전협정을 맺은 지) 3년이나 지나서 전시 체제적인 면을 (예전처럼) 띄우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선거엔 아주 특이한 몇 가지 면이 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그중 하나는 이 대통령이 사전 선거 운동을 엄청난 규모로 했다(는 것이다). 1952년 정부통령 선거 때도 (이른바) ‘민의(民意)’를 동원해 사전 선거 운동을 했지만, (1956년에는) 그 규모가 엄청났다. 1956년 자유당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했다. 그런데, 아 사사오입 개헌까지 한 양반이 ‘나는 대통령 후보 안 하겠다’고 나왔다. 그러면 국민들은 (‘제발 출마해 달라’고) 열화와 같이, 그야말로 벌떼처럼 일어나야 하는 것이었다. 각지에서 민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도 하지 않나. 무려 500만에 가까운 사람이 민의 시위에 동원됐다고 나온다. 경찰 발표다.
이 대통령은 마음이 여린 분이었던 것 같다. ‘비바람 맞으며 시위하느라 고생하지 말고 이제는 서면으로, 그러니까 청원서를 제출하면 된다’고 했다. 이번엔 청원서를 350만 명 정도가 낸 것으로 돼 있다. 부여의 한 경찰은 이 청원서를 받아 돌아가다가 (새벽에) 물에 빠져 죽고 그랬다. 어쨌든 850만 명이나 사전 선거 운동이라고도 볼 수 있는 민의 시위에 동원된 것 아니겠나. 그럼 (겉으로만 보면) 압도적 다수가 이 대통령을 지지하고 나선 셈이고, 이런 식이면 사실 선거를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또 이승만 정권은 선거 중간에 은행 대출을 동결시켰다. (야당) 선거 자금으로 못 나가게 하려고 이런 짓을 한 건데, 정말 창피한 일이다. 여당은 돈이 잔뜩 있었고 차를 타고 다니면서 선거 운동을 한다고 했지만, 진보당은 지게꾼 선거 운동을 한다고 했고 민주당은 걸어 다니면서 선거 운동을 한다는 식이었다. 그런데도 못 믿어서 은행 대출도 동결하고 그랬다.
프레시안 : 민의 시위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이 ‘우의마의(牛意馬意)’ 시위다. 사람만이 아니라 소와 말 같은 짐승까지 대통령의 재출마를 바란다는 뜻으로, 1956년 3월 12일 우마차조합에서 우마차 800대를 동원해 벌인 시위다. 소와 말이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온 탓에 거리에 동물 분뇨 냄새가 진동했다고 기록돼 있다. 어이없는 풍경이다.
서중석 : 그렇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야당 분위기가 아주 떴다. 1956년 5월 3일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한강 백사장 유세는 우리나라 선거 사상 유명한 것 아닌가. 20만~30만 명이라고 하는데, 정말 많은 시민이 모여들었다. 지금은 20만 명, 30만 명이 별것 아닐지 몰라도 그 당시엔 아주 큰 것이었다.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옛날 한강은 백사장이 정말 넓었다. 지금 한강은 옛날 한강하고 아주 다르다. 거기에 그 많은 시민이 모여든 것이다.
민주당이 이 여세를 몰아 호남선 열차를 탔다. 그런데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가다가 5월 5일 새벽, 이리역(오늘날 익산역) 직전에 있는 함열에서 이 양반이 심장마비로 작고했다. 그때 사람들이 참 많이 울었다. 어쨌거나 야당 후보 한 명이 없어진 거다. 그런데 조봉암 후보도 만만치 않게 인기가 좋았다.
문제는 선거 결과다. 이승만 후보는 504만 표, 조봉암 후보는 216만 표를 얻었다. 야당 단일 후보를 하자고 그전에 했고 자기 후보가 죽었으니, 민주당은 조봉암을 찍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효표가 될 수밖에 없던 추모표를 권장했다. 있을 수가 없는 건데, 그만큼 조봉암이 미웠던 거다. 그렇다고 낯간지럽게 이승만 찍자고 하기도 그렇지 않나. 추모표라는 건 신익희 공란에 찍으라는 건데, 그건 무효가 되는 거다. 이게 185만 표다. 조봉암 표에다 이 추모표를 합치면 이승만 표에 육박한다.
“5.15선거를 알지 못하고는 3.15선거를 이해할 수 없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으로선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서중석 : 이 대통령도 이 선거가 어떻게 치러졌다는 걸 안다. 5월 11일경이 되면 조봉암 후보는 (선거 운동을 하지 못하고) 피신하지 않나. 분위기가 워낙 혼탁하고 험악하니까. 그런 속에서 선거 운동과 투표 쪽만 부정이 있었던 게 아니라 아주 심한 개표 부정이 벌어졌다. 특히 이 선거부터 (개표 부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걸로 알려져 있다. 이 선거, 1958년 선거, 1960년 선거는 개표 부정이 투표 부정이나 선거 운동 부정 못지않게 심했던 대표적인 선거다.
(3.15 부정 선거를 진두지휘한) 최인규가 (5.16쿠데타 후)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옥중 자서전을 쓰는데 거기에 ‘내가 왜 부정 선거를 치른지 아나? 조봉암 사태 같은 것을 막으려고 한 거다. 1956년 선거는 누가 될지 알 수 없었던 선거다’, 이런 식으로 써 놨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는 홍진기, 이 양반 전기에도 ‘백중세였다’는 식으로 쓰여 있다. (최인규는 “(1956년) 5.15선거를 충분히 알지 못하고는 (1960년) 3.15선거를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 또한 엄청난 조작과 방해를 했음에도 조봉암이 216만 표를 얻은 것은 반공 국가의 체면을 추락시킨 것이며, 투표 결과 조봉암이 압도적으로 우세할 경우 조봉암 당선을 선포하도록 묵인할 수 있었겠느냐고 강변했다. <편집자>)
1956년 신익희가 급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조봉암은 이 선거 끝나고 나서 쓴 글에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 이런 제목을 붙였다. 이 대통령이 살아계신데 이런 제목까지 단 건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승만 후보는 이 선거가 어떤 식으로 치러졌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짐작은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에 놀랐다. 특히 서울에서는 (이승만으로선) 말이 안 되는 투표 결과가 나타났다. 죽은 신익희가 28만 표였는데, ‘국부’이자 ‘민족의 태양’이라던 산 이승만이 20만 표밖에 안 나왔다. 조봉암도 11만 표나 나왔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내쫓았다는 고사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것을 이 대통령이 받아들일 수 있었겠나? 이 대통령은 굉장히 자존심이 강한 분이었다. 6대 독자이기 때문에 자존심이 강하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건 무지무지하게 강한 분이었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고 ‘온 국민이 자기를 지지한다'(고 믿고 싶어 한 사람 아니었나).
민망한 개인숭배, 뒤돌아선 민심…제 무덤 판 이승만 정권
프레시안 : 개인숭배를 조장하던 분위기였기에 1956년 선거 결과가 더 치명적으로 다가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1955년경부터 추앙 운동이라고 할까, 이승만 숭배 운동이라고 할까 하는 것이 벌어졌다. 예컨대 1956년 파고다공원(오늘날 탑골공원)하고 남산에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당시 신문을 보면, 남산에 세운 건 동양 최대 규모라고 써 놨다. 그리고 뚝섬에다 그의 호를 따서 우남송덕관을 짓고 반신상을 세웠다. 남산에는 우남정(오늘날 팔각정)을, 남한산성에는 오래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송수탑(頌壽塔)을 세우고, 파주 용미리에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탑을 세웠다. 또 그 당시 (서울에) 짓던 회관을 우남회관이라고 불렀다. 이게 나중에 서울시 시민회관이 되는 건데, 지금은 세종문화회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남학관도 만들어졌고 우남도서관도 신축 중이었다. 심지어 1955년부터 서울시 명칭을 바꾸자고 하지 않나. 자유당 쪽에서 우남시라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1956년 8월 지방 자치 선거에서 서울시의 47명 중 40명이 민주당에서 돼버렸다. 서울시를 휩쓸었다. 자유당은 1명밖에 못 됐다. 그 막강하다는 여당이 그랬다. 그 정도로 이승만, 이기붕, 자유당은 인기도 없고 평판도 나빴다. 그런데도 ‘민족의 태양’, ‘위대한 반공 지도자’, ‘국부’, 이렇게 (칭송하는) 글이 그 당시에 많이 나오지 않나. 그런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선거가 이런 식으로 치러진 거다. 그랬을 때 이 대통령 심정이 어땠겠나.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이 선거 결과에 대해선 이 대통령이 바로 반응을 보인다. 선거 끝난 지 엿새 만인 1956년 5월 21일 내무부 장관에 이익흥을,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에 김종원을 임명했다. 그전에도 친일파가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이익흥은 일제 때 박천경찰서장을 지낸 사람이다. 또 신성모와 함께 ‘아부 장관’의 대명사로 꼽힌다.
김종원은 또 어떤 사람인가. (1948년) 여순사건 때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 깊이 관여한 걸로 돼 있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얘기를 이상하게도 그때 듣고 그러지 않았나. 또 (1951년)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이었다. 국회 조사단이 파견되자, 김종원은 ‘가짜 공비 사건’을 연출하지 않나. 나중에 그게 들통 나서 재판을 받아 구속되고 유죄를 받는데, 이 대통령이 강력히 요구해 이 사람은 석방된다. 그뿐 아니라 김종원은 4대 요지(전북, 경남, 경북, 경남)의 경찰국장을 지내고, 남원에 있던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사령관이라는 요직에 임명됐다. 거기에다 (대통령이) 치안국장에까지 임명한 것이다. 이건 ‘앞으로 어떻게 해라’, 이렇게 얘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김종원은 이미 1954년 선거에서 활약상이 드러난 사람이다.
프레시안 : 야당을 몰아세우는 일도 곧바로 벌어진다.
서중석 : 1956년 5월 26일 (이 대통령은) 국내 기자단에 “이번 선거 결과로 보아 친일하는 사람과 용공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렇게 밝혔다. 처음에 난 이게 기자들이 ‘이번 선거를 어떻게 봅니까’라고 즉석에서 물었을 때 (대통령이) 화가 난 나머지 이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거다. 도대체가 신익희를 지지한 사람을 친일하는 사람이라고 몰아세우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일본과 정상적으로 국교를 맺어야 한다’, 이건 신익희뿐만 아니라 조봉암도 주장했고 당시 많은 사람이 주장한 거다. 또 조봉암 쪽에 투표한 사람을 ‘용공주의자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한 건 국민을 위협하는 것, 편 가르기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거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게 기자들이 서면 질의한 것이더라. 다시 읽어보니, 서면으로 미리 제출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나와 있다. 세상에, 미리 제출한 질문에 대한 답변마저 이렇게 했다는 것에서 이분 감정이 얼마만큼 상했는가 하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를 살필 때 (이승만으로선) ‘온 국민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그 이후 선거에선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니었는가, 이렇게 볼 수밖에 없지 않나.
<프레시안> 2014-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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