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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죽여라’…학생 시신 속 쪽지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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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프레시안 : 4월혁명의 원인을 3.15 부정 선거에서만 찾으려는 경향이 일각에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 선거를 몰랐다는 강변과 맞닿은 흐름으로 보인다. 이는 4월혁명의 의의를 축소하는 것에 더해, 중요한 여러 현상(예컨대 도시 하층민이 적극 참여한 것 등)을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도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3.15 부정 선거와 ‘피의 화요일’ 4.19 시위, ‘승리의 화요일’ 4.26 시위 같은 각종 시위에는 이승만 정권의 전반적인 성격이 집약돼 있다. 단순한 부정 선거에 대한 항의라고 볼 수 없는 면이 그 시기에 너무나도 강하게 드러난다.

2.28 시위 하나만 보더라도 학생들을 일요일에 강제 등교시키고 어떤 학생들은 토끼몰이에 보내버리는 것을 단순한 부정 선거 문제라고 볼 수가 없지 않나. 무서운 강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독재 사상, 폭정이라고 볼 수 있는 식의 사고가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다. 어떻게 이런 일을 눈뜨고 지시할 수 있느냐, 이 말이다. 그건 이승만 정권이 어떤 정권인지를 말해준다.

2.28 시위에서 3.15 시위 사이에 여러 고등학교에서 시위가 일어난다. 제일 많이 나오는 구호가 뭐냐 하면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 우리 학교를 감시하지 말라’, 이런 요구다. 특히 사찰계 경찰을 동원해서 국민과 학생을 감시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이 시기에 제일 많이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4월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마산 시민들의 항쟁이다.

서중석 : 4월 11~13일 사이에 마산에서 두 번째 항쟁, 제2차 마산의거가 일어났다. (3월 15일에 일어난) 제1차 항쟁도, 제2차 항쟁도 굉장히 중요하다. 부정 선거가 일어났는데도 (많은) 국민이 침묵했다. 선거 종사자들도 침묵했다.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했다. 사실 교원노조가 빨리 만들어진 것도 (그간 정권의 간섭에 시달리고 부정 선거에 거듭 동원됐던) 이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승만 하야 발표 이틀 후인 4월 28일 바로 교원노조 발기인회가 소집된다. 어쨌건 부정 선거에 대해 (많은) 국민이 항의를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마산 시위가 3월 15일에 벌어졌다는 건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시위가) 있긴 있었다. 광주에선 약간 크게 있었고 서울, 춘천, 진주에서 조그마하게 있었는데, 그렇게 눈에 띌 만한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더더군다나 제1차 (마산) 시위에서 8명이나 죽었다. 도대체가 폭력 강권 정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사태가 났겠나.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러 나오면서 어떻게 실탄을 장전하고 나오느냐, 이 말이다. 참 무서운 일이지 않나. 시민을 향해 총탄을 막 쏴서 8명이나 죽고 수십 명이 다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게 나중에 논란이 된다. (발포가 주요 문제로 떠오르면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물러났다. 이기붕은 “총은 쏘라(‘쓰라’로 들었다는 이도 있다)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편집자>)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1960년 김주열과 1987년 박종철…어머니는 강했다

프레시안 : 제2차 마산의거는 4.19와 직결된다.

서중석 : 그렇다. 그 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제2차 마산의거는 (3.15 시위 때 경찰 발포로 사망한)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오전 10시 조금 넘어서 떠오르고 그 시신이 도립(마산)병원에 안치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그러면서 한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시신 모습이 전국적으로 신문에 나오는데, 얼마나 몸서리쳐지는 모습인가. 김주열은 마산상고 예비 학생이었다. 4월 1일 마산상고에 들어가게 돼 있었는데 시위에 나섰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마산에서 3일간 계속 시위가 일어난 것도 (1980년) 광주항쟁, (1979년) 부마항쟁 같은 걸 제외하면 아주 드문 일이다. 연달아 계속 일어나는 일이 별로 없는데, 마산에서는 3일간 일어났다. ‘김주열 시신이 저렇게 끔찍하게 나타났다.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양심이 있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참을 수 있느냐’, 이런 분노가 전국을 맴돈 것이다. 그러면서 서울을 들끓게 해 4.19가 난 것이다.

사실 제2차 마산의거가 없었으면 4.19는 조금 늦게 일어났거나 어쩌면 상당히 늦게 일어났을 수도 있다.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던 이승만·이기붕 정권은 어차피 망하게 돼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2차 마산의거가 없었으면) 시간을 더 끌었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더 크게 겪었을 거다. 제2차 마산의거 덕분에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것은 4.19로 바로 이어지는 도화선으로서도 의미가 크다.

프레시안 : 제2차 의거 당시 마산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시신이 안치된 도립병원으로 학생들도 막 뛰어오고 그랬지만 나이 먹은 사람들도 많이 달려왔다. 놀라운 건 여성이 굉장히 많이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들이 ‘주열이를 살려내라’, ‘내 아들도 이렇게 안 될 거라고 누가 보장하느냐’고 울부짖고 소리치고 하면서 다시 시위가 시작된 거다. 그런데 첫날 시위에서 이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이 정말 놀랄 만한 구호가 나왔다. “이승만 정권 물러나라”, “이기붕을 죽여라”, “학살 경관 처단하라”, 이것이다.

4월 11일에 어머니들, 여자들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는 사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시위는 지금까지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얼마만큼 어머니들이 분노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1987년) 6월항쟁 때 박종철 군 시신을 보면서 어머니들이 그렇게 분노한 것과 똑같은 거다. ‘내 자식도 저렇게 당할 수 있지 않느냐’라는 면이 있었던 거다.

그 플래카드를 보면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고 쓰여 있다. 4월 18일 고려대생 시위는 말할 것도 없고 19일 시위에서도 ‘이승만 물러가라’고 직접 요구하는 건 일부에서만 나온다. 주된 구호가 아니었다. 이게 주요 구호로 등장하는 건 4월 25일 교수단 시위 후반부에 가서다. 그런데 4월 11일에 ‘국부’, ‘민족의 태양’으로 떠받들어야 했던 이승만에 대해 이렇게 정면으로 나온 거다. AP통신이 이걸 전 세계에 타전했다. ‘한국에서 지금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식으로. 그다음 날부터 시위는 크게 벌어지지만 이런 구호는 (한동안) 안 나온다. ‘부정 선거 다시 하라’ 등의 다른 구호가 많이 나온다. 그만큼 첫날 시위는 굉장히 강렬했다.

▲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 ⓒ연합뉴스

▲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 ⓒ연합뉴스

부정 선거에 대한 단순한 항의? 이승만 정권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

 

프레시안 : 4월 11일에 정권 퇴진 구호가 나왔다는 점은 여러모로 눈여겨볼 만하다.

서중석 : 왜 이런 구호가 나왔느냐, 이걸 생각해야 한다. 얼마만큼 마산 시민들이 분노했는가, 이게 단적으로 드러나 있는 거다. 그렇게 된 데는 3.15 부정 선거도 역할을 했지만, 그 부정 선거에 대해 시위를 했더니 정권이 어떤 식으로 나왔느냐(도 크게 작용했다). 중앙에서는 이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이 난동, 폭동이라고 얘기했고, 현지에서는 경찰이 도처에서 청년이나 학생들을 잡아갔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검문검색을 하고 사람들을 연행해서 굉장히 심한 고문을 했다. 데모 주동자를 만들어내려는 것이었다. 또 당시 몇 개 파출소가 불타지 않았나. 방화범으로 몰아세우려 한 것이었다. (북마산파출소 방화 사건은 경찰이 시민을 고문해 조작한 사건임이 드러났다. <편집자>)

(정말 무서운 건) 그것 정도가 아니라 ‘공산당 지하 조직이 좌익 폭동을 일으켰다’ 하는 걸로 의거를 몰고 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찰의 총에 맞아 숨져) 도립병원에 안치된 세 젊은이의 시체 호주머니에다가 ‘인민공화국 만세’, ‘이승만 죽여라’ 이런 쪽지까지 집어넣었다. 나중에 도립병원 원장이 ‘그런 일 없었다’고 부정하긴 하지만, 세상에 이승만 정권이 어떤 정권이었느냐 하는 걸 이 과정이 단적으로 말해준다. (경찰은 10대 학생의 시신에 문제의 쪽지를 집어넣고, 시위를 빨갱이 폭동으로 몰아가려 했다. 이에 따라 당시 도립병원장에게 시신에 그런 쪽지가 있었다는 내용의 검안서를 작성할 것을 요구했다. 병원장은 검안서를 그렇게 작성하는 것을 거부했다. <편집자>)

이러니까 마산 시민들이 그야말로 격앙될 대로 격앙됐다. 그 이전에 몇몇 시신을 못 찾고, 김주열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내 아들 찾아내라’고 마산 시내를 소리 지르고 다니고 그랬다. 바로 이런 점이 마산 시민들을 그렇게 격앙시켜 ‘물러나라’, ‘죽여라’, ‘처단해라’ 같은 강한 구호가 첫날 나오게 만든 것이다. 제2차 마산 항쟁은 단순히 3.15 부정 선거에 대한 항의가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 전체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 점이 아주 중요하다.

프레시안 : 친일 청산 문제가 왜 중요한지도 마산 항쟁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났다.

서중석 : 이런 일을 저지른 자들이 대개 친일파였다. 이 점도 중요하다. 당시 마산경찰서 사찰계장이 강상봉이었는데 이 사람이 현장 지휘를 한 셈이고, 사찰계 형사 주임이던 노장현이라는 사람이 아까 이야기한 쪽지를 집어넣게 한 걸로 나중에 드러났다. 김주열 시체를 바다에 유기한 사람은 경비 주임 박종표였는데, 일본군 헌병 출신이다. 일제 때 그런 짓을 한 사람들이니까 이승만 정권 때 또 비슷한 일을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얘기가 되는 거다. (강상봉과 노장현은 1950년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인물로 유족들에게 지목됐다. 친일, 학살, 반민주 행위가 한국 현대사에서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 중 하나다. <편집자>)

제2차 마산 항쟁이 일어나자 중앙 정부에서 어떻게 나왔느냐. 이것도 이승만 정권의 성격을, 어떤 식으로 대처하려고 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빨갱이몰이에 나선 정권, 4.19 없었다면? 생각하기도 무섭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4월 12일 국회 답변에서 내무부 장관 홍진기는 ‘마산은 과거의 역사를 볼 때 공산 계열이 많이 준동할 수 있는 곳으로 공산당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든다’고 말했다. 신언한 법무부 차관은 한술 더 떴다. 홍진기가 법무부 장관을 하다가 (내무부 장관이) 됐기 때문에 법무부 장관은 궐석이었다. 신 차관은 ‘시위의 양상이나 규모를 볼 때 공산당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런 짓을 할 수 없다는 걸 느끼고 있다’면서 ‘당국이 일본 조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에서 마산 학생들을 격려하는 무전을 입수했고 어떤 사람은 당시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국회에서 서슴없이 했다. 두 사람은 국무회의를 마치고 나서 ‘마산 사태는 적색 마수가 배후 조종한 혐의도 있어서 수사 중’, 이런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13일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이걸 읽어보면 글자 한 자 한 자를 그렇게 공들여 썼을 수가 없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레드 콤플렉스를 아주 교묘하게 자극했다. 요즘 사람들처럼 직설적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인데 난동은 결국 공산당에 대해서 좋은 기회를 주게 할 뿐이니 모든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극히 조심해야 될 것이며’,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4월 15일 특별 담화문은 더 심하다. 여기엔 공산당이란 단어가 아홉 번이나 나온다. 훨씬 심하게 몰아붙인다. 마산의거를 ‘철모르고 덤빈 폭동’으로 비하하고 ‘해내외에서 들어오는 소식은’, 참 이 양반, 전혀 이런 일이 아닌 건데 이렇게 표현했더라. ‘마산에서 일어난 폭동은 공산당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는 것’, 도대체 이런 해내외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공산당의 선전에 이런 일을 한다면 가증스러운 일이다. 몰지각한 사람들이 선동하여 난동을 하다가 필경 이러한 불상사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것을 우리가 그냥 둘 수는 없는 것이다’, 참 무서운 말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담화문에서 막 하고는 ‘난동을 일으켜서 결국 공산당에 좋은 기회를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딱 못을 박아버리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글의 앞부분을 보면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여수에서 조그만 아이들이 수류탄을 제 부모들에게까지 던졌다’고 하는 (사실과 전혀 다른) 말도 나온다. 참 이 양반, 굉장히 교묘하게 마산의거를 여순사건과 연관해서 생각하게끔 한 것이다.

프레시안 : 민주주의와 정의를 요구한 국민들에 대한 노골적인 협박이다.

서중석 : 이 대통령이 13일 담화에서 ‘지금 조사 중’이라고 한 것도 간단한 게 아니다. 그날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이건 한국전쟁 때 (이른바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특무대, 검찰, 경찰로 구성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생긴 이후 처음 생긴 것이다. (합동수사위원회 구성원은) 대검찰청 오제도 검사, 조인구 치안국장, 하갑청 육군 특무부대장이었다. (사상 검사로 유명한) 오제도 검사, 무서운 사람이다. 조인구 치안국장은 조봉암 진보당 사건 때 담당 검사였던 사람이다. 엄청난 빨갱이 사건을 조작하려고 이걸 만든 것 아니겠나. 마산 사건이 어떻다는 걸 누가 모르겠나. 그런데 이걸 빨갱이 사건으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19가 났기에 망정이지, 4.19가 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겠나. 6월 12일 <경향신문>에도 이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끄트머리에 이렇게 썼다. “혁명이 며칠만 뒤늦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오싹해지는 일이다.” 마산 사람들, 정말 큰일 날 뻔하지 않았나. 이런 걸 보면 이승만 정권이 어떤 식으로 대응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서울대 문리대에서 나온 4.19 선언문에 잘 집약돼 있다. 이렇게 쓰여 있지 않나. “적색 전제”와 함께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제주의의 표독한 전횡”을 비판했다. 이게 중요하다. 이승만 정권은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를 하고 있다고 못을 박았다. 이건 반공 전제와 같은 것이다. 파시즘적인 통치를 이 당시에 그렇게 불렀다. 그러면서 관료, 경찰을 “가부장적 전제 권력의 하수인”라고 못을 박았다. 김주열의 시신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裸像)”이라고 불렀다. 그냥 시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며 우리도 싸우겠다고 얘기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4월혁명은 제2의 해방

프레시안 :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문제도 4월혁명의 밑바탕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중석 : 4월혁명 50주년을 맞아 <4월혁명 사료 총책>이 나왔는데, 편집위원장으로서 그것을 만드는 데 관여했다. 거기에 중요한 사료가 있다. 연세대 4월혁명 연구반에서 1960년에 만든 목격자 수습 조사서다. 4.19를 목격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여러 가지를 물어본 건데, 4.19와 제일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40문항 정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번 4.19 사태를 가져온 동기는 뭣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이다. 거기 보면 “독재 정치(독단적인 일당의), 자유당 정부의 실정, 일당 독재, 정치적 부패, 경제적 불평등”, 이런 것들도 들어가 있다, 부정 선거는 이보다 꼭 많은 게 아니더라. 부정 선거, 마산 사건에 자극받아 4.19를 일으켰다고 보는 것보다 오히려 이게 더 많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3.15 부정 선거와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 전체의 상을 보여주는 것이자 그것에 대한 전반적인 단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바로 이런 상태에서 두 차례에 걸친 마산의거, 그리고 4.19, 4.26이 일어난 것이다.

진영숙이라는 한성여중 2학년 학생이 있었다. 몇 살이었을지 짐작되지 않나? 이 학생이 4월 19일 가난한 홀어머니한테 써놓고 나간 쪽지가 있다. 거기에 이런 마음이 실려 있다고 나는 해석한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이렇게 돼 있다. “민족의 해방”, 무서운 말이다. 그래서 내가 4월혁명을 제2의 해방이라고 부르지 않나. 무수한 사람들이 이런 마음으로 2.28부터 나선 거다. 4월 19일, 이 학생은 유탄에 맞아 죽었다.

며칠 후인 4월 23일 모 신문에다가 수송국민학교 4학년 강명희 학생이 시를 하나 놓고 갔다. 수송국민학교는 4.19 한복판에 있던 학교여서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 오빠와 언니들이 / 왜 피를 흘렸는지”. 이런 심정, 이런 정의감으로 이렇게 어린 학생들까지 이런 글을 쓰고 그랬다.

 

▲ 1960년 4월 19일, 시민을 향해 발포하는 경찰. ⓒ연합뉴스

▲ 1960년 4월 19일, 시민을 향해 발포하는 경찰. ⓒ연합뉴스

 

부정 선거범보다 부정 축재자가 더 욕먹었다

프레시안 : 4월혁명에서 도시 하층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희생자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들이다. 그럼에도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서중석 : 4월 19일에 불우한 아동, 청년 학생들이 많이 가담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4월 25일과 26일도 비슷했는데, 4월혁명 때 이 사람들이 중등 학생들과 함께 제일 많이 죽었다. 대학생보다 훨씬 많이 죽었다. 이건 광주에서도 마찬가지다.

1958년부터 우리나라가 또 불황에 들어갔다. 미국 원조가 그때부터 많이 줄면서다. (그로 인해) 상황이 나쁘기도 했지만, 1950년대가 전반적으로 참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불우한 소년 소녀가 참 많았다. 그 가운데 구두닦이, 껌팔이, 신문팔이 소년들이 무척 많았다. 당구장에 가면 맨 실업자투성이였다. 한 집 건너 다방, 한 집 건너 당구장이 있었고 다방 앞에는 반드시 구두닦이들이 있었다. 내가 (1960년대 후반) 서울에 와서 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

하여튼 4월 19일 낮 12시 전후,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태평로 국회 의사당 앞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대개 거기만 가곤 했다. 그런데 이들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자 동국대생, 서울대 사범대생, 일부 고등학생들이 ‘우리는 저쪽으로 가자’ 하면서 광화문 쪽(지금의 청와대 즉 경무대 쪽. <편집자>)으로 틀기 시작했다. 이게 4.19에서 결정적인 전환이다. 여기서 전환이 일어난 거다. (1948년 제헌 국회가 첫 회의를 연 곳은 중앙청이었다. 한국전쟁 후 국회는 태평로에 있던 옛 부민관 건물을 의사당으로 사용했다. 1975년 국회 의사당은 여의도로 옮겨간다. 태평로 국회 의사당 건물은 오늘날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쓰이고 있다. 한편 조선총독부 건물이던 중앙청은 해방 후 미군정청, 중앙청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95년 철거됐다. <편집자>)

이들이 광화문 쪽으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하고 중앙청 쪽 담을 돌 때 이 사람들(불우한 아동, 청년 학생들)이 막 쏟아져 나온 거다. 돌팔매질을 한 건 이 사람들이 먼저라고 난 본다. 4월 19일에 이 사람들이 돌팔매질을 제일 많이 했을 거다. 그러면서 많이 죽었다. 이 사람들이 돌팔매질 같은 걸 막 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면서 데모대가 효자동에 있는 제2저지선을 뚫고 제3저지선으로 갈 때, 오후 1시 40분 무렵 경찰이 콩 볶듯이 총을 쏘기 시작한다. 이게 ‘피의 화요일’로 변하는 순간이다.

프레시안 : 도시 하층민이 적극 나선 것은 높은 실업률, 부정 축재 등으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 문제와 이어져 있다.

서중석 : 불우한 소년 소녀들뿐만 아니라 실업자 청년들도 (시위대에) 참 많았다. 이 사람들이 4.19에 적극 참여한 건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이 제일 큰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특권층, 부정 축재자들에 대한 불만이 굉장히 크다는 게 나중에 드러난다.

민석홍 서울대 교수가 4월혁명이 혁명인 이유 중 두 번째로 든 게 있다. ‘이건 특권적인 재벌이나 기업가층 몰락의 바탕을 마련했다.’ 무서운 말이다. 지금 들어보면 불온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우리한테 서양사를 가르쳤던 분이다. 민석홍 선생이 1960년 6월 <사상계>에 그렇게 썼다.

장면 정부 국무원 사무처에서 (1960년 말) 제1회 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3.15 부정 선거범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건 33.1퍼센트 나왔는데 ‘부정 축재자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건 37.3퍼센트가 나왔다. 4.2퍼센트포인트가 더 나온 것이다. 총을 쏘고 부정 선거를 저지른 사람들보다도 특권층인 부정 축재자에 대한 불만이 그만큼 컸던 거다. 말하자면 돈을 많이 번 자들이 정상적으로 돈을 번 게 아니라는 광범위하고 강력한 국민 의식, 서민층의 불만이 쌓여 있었고 이게 4.19 때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부정 축재자 처벌을 들고나와서 허정 과도 정권이나 장면 정부를 무척 애먹인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2014-04-16>

기사원문: ‘대통령 죽여라’…학생 시신 속 쪽지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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