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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1] 한국전쟁 / 친일파 / 학살 / 해방·분단 [4월혁명, 첫 번째 마당] ‘혁명가’ 박정희는 숭배, 독재자 쫓아낸 건 찬밥? [4월혁명, 두 번째 마당] “대통령은 부정 선거 몰랐다? 신문도 안 봤나” [4월혁명, 세 번째 마당] “대통령은 부정 선거 할 이유 없었다? 모르는 소리” |
프레시안 : 4월혁명에 대해 뉴라이트 계열에서는 ‘이승만의 정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했다기보다는 비판적으로 실현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이승만 정부를 부정하고 해체했다기보다는 비판적 발전을 모색하는 ‘건국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서중석 : 이승만의 정치 이념이 자유민주주의다? 전혀 그렇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이고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정치 활동을 많이 했다는 걸 그간 자세히 설명했다. 이승만 하면 바로 독재가 생각나지 않나. 그야말로 독재, 파시즘적 억압 통치를 한 사람이지 무슨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하려 했다는 건가. 도무지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서울대 문리대에서 나온) 4.19 선언문에서도 “백색 전제“라고 이승만 정권의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았나. 그런 데서도 자유민주주와는 대립되는 정치 활동을 한 사람이라는 걸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승만 추종자들이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자‘라고 강조하면서 4월혁명과 이승만의 소위 자유민주주의라는 걸 화해시키려 한다고 할까, 연결하려 한다고 할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2011년 제51회 4.19 기념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뜻밖의 사건이었다. 이전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제50회를 맞아서도 없던 일이 51주년에 일어났다.
이때 이승만 양자 이인수 씨하고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 사업회‘(기념 사업회)에서 4.19 유족에게 사과하겠다고 나서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왜 이런 행위가 있었느냐. 한편으로 어줍지 않게 이승만의 소위 자유민주주의라는 것하고 4월혁명을 비슷한 것으로 몰아가려는 의도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동상, 그것도 다른 데가 아니라 이순신 동상,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움으로써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떠받들게 하겠다는 문제와 연결돼 그런 사태가 일어난 걸로 보도되고 그랬다.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운다는 게 너무나도 어이없는 일이라 그때도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 이전에도 얘기가 없던 것이지만 그 이후에도 별로 얘기가 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 동상에 대해 언급은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점을 짚을 필요가 있나.
서중석 : (이승만 정권 당시) 이승만 동상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탑골공원, 하나는 남산에 세웠는데, 남산에 있던 것은 아시아에서 제일 큰 동상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게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한 1960년) 4월 26일 그때 어떻게 됐느냐. 그날 아침 9시 45분경 ‘이때 탑골공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의 목에다 철사 줄을 걸어서 이 동상을 쓰러뜨렸다‘고 보도됐다. 그러면서 ‘이승만 독재, 폭정, 부정 선거의 상징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걸 볼 수가 있다. 탑골공원에 있던 군중은 철사 줄에 매인 동상을 질질 끌고 종로 2가에서 세종로 쪽으로 갔다고 보도됐다. 남산에 있던 동상은 너무 커가지고, 부수는 데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 신문에 그렇게 나온다. 이승만 추종자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도, 이 동상은 오랫동안 방치됐다.
그러다 4월혁명 51주년을 맞아 광화문 동상 건립 문제를 기념 사업회에서 주장하고, 이인수 씨하고 기념 사업회가 4월 묘역 참배까지 하겠다(고 나왔다). 4.19민주혁명회, 4.19혁명유공자회, 4.19혁명희생자유족회 이 3개 단체가 4.19를 대표하는 단체인데, 이들 4월혁명 관계 단체에서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내세워 4.19 묘역을 방문하고 참배하는 행위는 단연코 거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영구 집권을 꾀하다가 학생과 국민의 힘으로 추방된 대통령의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겠다는 그들의 간악한 흑심을 엿보게 하는 추태를 즉시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기념 사업회에서 자기들이 동상을 세우고 이승만 박사를 기리는 데 제일 방해 세력이 될지도 모르는 4월혁명 세 단체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묘역을 참배하겠다고 한 것으로 보이는데, (4월혁명 단체들이) 그것에 단호히 철퇴를 가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들 단체에서 “그들이 사과해야 할 대상은 유족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다“, 이렇게 명확하게 잘라 얘기한 것도 참 잘한 일이다. 4월혁명 단체답다. 그때 이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면서 ‘건국절‘ 논란이 생각나더라. 독립 운동 단체에서 2008년 ‘건국절‘을 막지 않았나. 진보 세력, 진보 언론에서는 역할을 별로 하지 못했다. 이 제51회 4.19 기념일과 관련해 <조선일보>가 크게 보도했는데, <조선일보> 보도와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을 얘기해야 한다.
▲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1956년 남산에 세워졌던 이승만 동상은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속보이는 궤변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하나는 사설에서 ‘건국의 이승만‘과 ‘4.19의 이승만‘이 하나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인수 씨를 인터뷰해 “이 대통령과 4·19혁명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정신에 있어서 같은 것“이라는 주장을 내보내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이념‘과 4월혁명 이념은 같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더라.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건가 해서 열심히 읽어봤는데도, 구체적으로 이 대통령의 건국 이념이 뭐다, 이런 건 나오지를 않더라.
이 대통령이 정부 수립 초기에는 정말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느냐? 이 점은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이승만 정권 초기인 1948년, 1949년을 보면 이미 극단적인 반공 통치로 가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언론 자유도 상당히 어렵게 돼가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구체적으로 많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친일파 청산 문제, 이것도 이승만 대통령 집권 초기에 일어난 일 아닌가. 친일파 청산도 못 하게 만들어 국가 기강, 민족정기도 흐트러지게 하고 사회 가치관도 혼란에 빠트리고 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강권 정치, 친일 경찰을 내세운 정치로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제주 4.3사건, 여순사건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가 있었는데, 이것(학살 문제)도 이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지 않나. 정말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 수립 초기에 폭넓은 정치를 하려고 했느냐, 민주주의를 실현하려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조선일보>에서도 그런 것을 썼으면 좋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더라.
프레시안 : 이야기할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서중석 : 이 신문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인수 씨가 이런 얘기를 한다. “그전에는 이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온 세월이었지만.” 난 이 말이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4월 26일 이전엔 이 대통령을 ‘국부‘, ‘민족의 태양‘으로 숭배하고 떠받들었지만, 4월 26일 이 대통령이 물러간 이후에 보면 이승만 정권과 이 대통령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일 수가 없는 수많은 사실이 공개되고 이승만을 아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5.16쿠데타 정권이 반동 정권이란 애기를 듣기도 하지만, 그런 5.16쿠데타 정권조차 이 대통령과 이승만 정권을 아주 부정적으로 봤다. 그건 1980년대에도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인수 씨가 얘기한 것처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선 사실 (1987년) 6월항쟁 이전에는 독재 정권 하에서조차 대개 부정적으로만 봐왔다.
그랬는데 해방 50주년이던 1995년에 모 신문들이 적극적으로 이승만 살리기라고도 불리는, (그러니까) 이승만을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고 나아가 ‘건국 대통령‘으로 떠받들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펴면서 역사 전쟁이랄까 역사 논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4.19의 개혁 의지와 5.16의 혁명 동기가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4.19세대로 불리는 이들 중 상당수가 5.16쿠데타 직후 적잖은 기대감을 드러냈다는 주장이다. 박정희 정권 시기가 4월혁명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4.19 이념에 물적 토대를 놓는 과정“이라는 주장과 맞닿는 흐름이다.
서중석 :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에서 4월 26일 시위까지 이어지는 4월혁명은 그 이후 30여 년 계속된 학생 운동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학생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그렇게 중요한 4월혁명이지만 그 이후의 학생 운동과는 차이 나는 점도 많다. 그 이후의 학생 운동이 의식적이고 조직적으로 일어나는 측면이 상당히 있다고 본다면, 4.19는 갑자기, 돌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4.19 주동자 또는 4.19 때 이름이 많이 알려진 사람들 중에는 여러 경우가 있다고 봐야 한다. 민주주의 의식이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 의식이 미약한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혁명적 시위 분위기를 따라간 사람도 있었다. 당시 <고대신문>, <대학신문> 같은 것을 보면 박정희와 유사한 파시즘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또 4.19 시위에 떠밀려 주동자가 된 학도호국단 간부도 있었다. 할 수 없이 주동자가 됐고, 그때는 하지 않으려 했겠지만 나중엔 ‘내가 열심히 했다‘, 이렇게 나서는 식이다. 최초의 규모가 큰 대학생 시위의 경우 실제로는 시위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나중에 시위를 대표하는 사람처럼 이름이 오르내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여러 상황을 잘 살펴보면서 4.19세대의 변절을 얘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1960년대 박정희 정권에 참여한 4.19세대는 한두 명 또는 몇 명에 불과하다. 눈에 띄게 드러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문제는 유신 체제나 전두환 신군부 체제에 4.19를 대표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수 참여하는 걸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4월혁명을 밑바탕부터 부정한 행위다. 대단히 잘못된 행위라고, 4월혁명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은 사람들이 모인 단체 중 하나인 사월혁명회 같은 데에서 혹독히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3.15 부정 선거에도 이승만을 지지한 미국
프레시안 : 미국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에서 미국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는 많은 사람의 관심사다. 그만큼 이야기가 엇갈리는 일이 많은 문제이기도 하다. 4월혁명 과정에서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나.
서중석 : ‘이승만 하야에 미국이 깊숙이 관련돼 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건 미국 때문이다‘, 이런 주장이 지금까지 참 많았다. 그만큼 미국의 역할을 중시하는 주장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해 부정확하게 알고 있는 게 너무 많다.
먼저 3.15 부정 선거가 저질러지기 전에 이승만 정권이 엄청난 부정 선거를 기획해 실천에 들어가고 있다는 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알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이 부정 선거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든가 하는 건 없었다. 예컨대 (1960년) 3월 3일 민주당이 (부정 선거의 구체적) 내막을 폭로했을 때 (미국이) 이승만 정권에 ‘그렇게까지 해서야 되겠는가. 좀 적당히 해라‘라든가 하는 말을 해줌직한데, 1959년 12월부터 1960년 3월 15일까지 선거와 관련해 미국이 발언하는 게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참 드문 예라고 오히려 볼 수 있다.
3월 15일 부정 선거가 저질러지고 마산에서 큰 시위가 일어나 8명이나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때 이례적으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빨리 성명을 내는 건 볼 수가 있다. AFP에 따르면 “한국 선거 기간 중 발생한 모든 폭력 행위를 개탄하고 그와 같은 폭력 행위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이렇게 얘기했다.
프레시안 : 애매모호한 말이다.
서중석 : 문제는 이게 3.15 부정 선거를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마산의거를 폭력 행위로 개탄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모든 폭력 행위“라고 했는데 이건 경찰이나 깡패 즉 이승만·이기붕 후보 쪽의 폭력도 얘기한다고 보지만, 대표적인 큰 사건은 3.15 시위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더 개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와 같은 폭력 행위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참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을 한 것 아니냐. 그렇게 보이는 성명을 냈다. 양쪽을 다 비판한 것 같긴 한데, 그게 잘한 일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나.
크리스찬 허터 미국 국무장관도 즉각 반응을 보였다. 뭐라고 했냐 하면 “이번 선거 소요는 가장 불행한 사건“, 이렇게 밝혔다. 여기서 말하는 선거 소요가 뭘까? 이것 역시 마산 3.15 시위를 주로 가리키는 게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이다. 설마 그랬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만, 명확하게 ‘3.15 부정 선거가 지나쳐서 마산의거가 일어난 것 아니냐‘는 뜻으로 얘기했어야 할 일인데 그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는 반응을 보이는 걸 볼 수가 있다.
프레시안 : 야당에서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반응이다.
서중석 : 사실 1958년 12월 24일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지방자치법 개정안, 이 두 개의 개정안을 (자유당에서 우격다짐으로) 통과시켜 6개월 동안 국회가 공전하는 2.4파동이 일어날 때도 야당이나 언론에서는 미국이 한마디 할 줄 알았다. 워낙 민주주의를 심하게 파괴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주한 미국 대사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뭔가 이래서 되겠느냐는 반응은 보였지만, 야당이나 일반 국민이 생각한 것처럼 이승만 정부를 눈에 띄게 비판하는 식의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대체로, 3.15 부정 선거가 저질러졌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확고히 지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 문제에서도 알 수 있다. 3.15 부정 선거가 저질러지고 마산의거가 있은 직후, (그러니까)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이 발표된 후였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문이 ‘현재 한국 정세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 미국 정부에서 표명했다.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우리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방한은) 그 이전에 합의를 본 것이긴 하지만, (미국의 이런 태도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된 것까지 다 인정해주면서 이승만 정권을 지지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이승만 하야와 미국, 그리고 중립 지킨 군대
프레시안 : 미국은 그 후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서중석 : 문제는 4월 19일 엄청난 시위가 일어나고 이날만 123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4월혁명 당시 세상을 떠난 사람은 186명이다. 이 중 약 3분의 2인 123명이 4월 19일에 목숨을 잃었다. <편집자>) 이것에 대해선 미국도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이젠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사태가 아주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서 4월 19일 밤, 월터 매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가 경무대를 찾아가 이 대통령을 만나는 걸 볼 수가 있다. 홍진기 내무부 장관, 김정열 국방부 장관이 배석했다. 그때 이 대통령은 미국 대사에게 ‘장면과 민주당이 이 봉기의 선동자‘라면서 격렬히 비난하고 ‘이들 체제 전복 세력에게 이용당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4.19 시위에 대해 얘기한다. ‘이들‘은 장면과 민주당을 말하는 것이었다. 매카나기 대사가 ‘선거 부정에 대해 그렇게 나온 것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얘기하니까 (이 대통령이) ‘난 선거 부정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리고 내가 믿는 장관들이 설마 나한테 거짓말을 하거나 숨겼겠는가‘,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국민들이 죽어가는데도 ‘모른다‘로 일관하는 최고 권력자, 참 인상적이다.
서중석 : 이날 미국 대사관 성명서를 보면 ‘폭력을 자제하고 법질서를 회복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폭력이란 건 우선 시위를 주로 가리키는 것이고 그다음에 시위대에게 총을 쏜다든가 심하게 진압한다든가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다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법질서 회복‘에는 그런 시위 같은 걸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여튼 이승만 정권에 대한 압력이 될 수 있는 말이 이 성명서의 그다음 부분에 들어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뭐냐 하면, ‘시위 군중의 정당화될 수 있는 울분들을 해소하는 데 노력을 해달라‘고 했다. 시위 군중의 정당화될 수 있는 울분은 부정 선거를 가리키는 것일 터이고, 여기에 대해 정부가 국민들에게 어떻게 하겠다는 대책을 얘기해줘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강한 압력은 아니지만 압력을 미국이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날 밤부터 4월 26일까지 미국 대사관에서는 밤늦도록 불빛이 보이는, 다시 말해 열심히 ‘작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각지를 뛰어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다니는 모습도 나타난다. 그런데 그 후에도 여러 가지 사태가 일어나는데 미국이 4월 25일까지 이런 변화하는 상황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있느냐? ‘부정 선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런 정도 얘기는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 뚜렷한 애기를 하지는 않았다.
여러 주장에서 ‘미국이 이승만 하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얘기하는 근거는 ‘4월 25일 밤에서 26일 아침 사이에 미국이 이승만 하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25일 밤에 미국이 그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건, 아직까지는 해제된 자료에 나오지 않고 있다.
프레시안 : 4월 26일, 미국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그날 미국은 훨씬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미국 대사관 기록에 오전 9시 10분으로 나오는데, 자기들이 제일 믿고 가깝다고 생각한 김정열 장관한테 (매카나기 대사가) 전화를 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을 즉시 만나, 정부통령 재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 대통령 자신의 미래의 정치적 역할을 고려하도록 해줄 것을 촉구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얘기한 걸로 돼 있다. 재선거 실시, 이건 아주 중요하다. 이제는 3.15 선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확실히 한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에 나오는 ‘미래의 정치적 역할을 고려하도록‘, 이 대목이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까지는 아직 고려하지 않은 걸로 볼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미래에 역할을 하라고는 한 것이니까. 여기서 미래의 정치적 역할은, 그동안 민주당이 계속 주장했고 자유당에서도 여러 차례, 특히 1958년과 1959년에 강하게 거론했던 내각 책임제로 개헌해서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만 있어라, 이런 뜻이 아니겠는가. 난 그렇게 해석한다. ‘미래의 정치적 역할‘이란 말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하라고 했다고까지 해석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주한 미군 사령관이자 유엔군 사령관인 카터 매그루더와 함께 경무대를 방문하겠다고 하는데, 경무대에서 ‘지금 올 때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했다.
프레시안 : 이승만 대통령 하야는 언제 결정된 것인가.
서중석 :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결정한 시간이 언제냐 하는 것이다. 이게 어떤 데에서도 명확하게 자료상으로 안 나온다. 이날 아침이라는 것, 오전 10시 이전이란 것은 틀림이 없는데 시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수많은 설이 나올 수밖에 없게끔 돼 있다. 내가 여러 자료를 갖고 볼 때, 오전 9시 전후에 이 대통령이 사임 쪽으로 몰리고 있지 않았느냐 (싶다). 측근들과 자기 부인한테서 ‘사임해야 한다‘는 강한 얘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미국 대사가 전화를 했다는 것도 틀림없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 때문이다‘, 이렇게 볼 수는 없고 여러 영향 중 하나로서 얘기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하여튼 경무대에 (바로) 들어가지 못한 매카나기는 오전 9시 45분에 성명서를 발표한다. ‘이제는 미봉책을 쓸 때가 아니다‘, 이것이다. 앞의 것보다 더 강한 것이다. 이때쯤 되면 하야를 촉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미국의 메시지가) 꼭 하야만 의미한다고는 볼 수가 없지만 하야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프레시안 : 긴박한 순간이었다.
서중석 : 김정열 장관이 매카나기 대사, 매그루더 사령관한테 오전 10시 15분에 ‘이 대통령이 자진 사퇴하는 것이다‘, 이걸 통보했다고 돼 있다. 그러면서 10시 20분에는 서울 지구 계엄사령관 조재미 준장과 또 다른 쪽에서 ’10시 20분경 이 대통령은 하야했다‘라는 걸 시위 대중에게 알렸다. 거의 같은 시간이다. 그러니까 이승만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미국 영향을 받고 우리가 (사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10시 15분에 사퇴하겠다는 것이 결정돼 통보한 걸로 볼 수가 있다. 그러고 나서 10시 30분경 (매카나기 대사가) 경무대에 들어가게 된다. 그땐 계엄사에서 하야 발표를 이미 했을 때다. (이승만 정권은 ‘피의 화요일‘인 4월 19일 오후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경찰과 달리 군은 시위를 막는 데 소극적이었다. 4월 26일 오전 10시 무렵, 10만 명이 넘는 시민이 모여 이승만 퇴진을 요구했다. <편집자>)
미국이 이승만 하야에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느냐 하는 것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물러나게 된 데, 다시 말해 자신이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해 있고 측근조차 물러나라고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 군이다.
▲ 1960년 4월 19일, 대열을 정비해 스크럼을 짜고 경무대(오늘날 청와대)로 전진하는 시위대. ⓒ연합뉴스
4월혁명 때에도, 10.26 후에도 미국은 군을 선호했다
프레시안 : 4월혁명 당시 군은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군은 중립을 지켰다. (이승만은 군이) 자신을 방위해줄 줄 알았는데 군은 이승만의 권력을 지켜주지 않았다. 그런데 군이 중립을 지킨 건 미국의 영향이 아니냐, 또 이런 해석이 많다. 이것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군이 중립을 지킨 건 미국 영향만은 아니다. 여러 영향이 작용한 것이었다. 미국의 영향을 그중에서 예컨대 30퍼센트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50퍼센트로 봐야 하는지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된다. 그렇게 딱 잘라서 평가할 수는 없다.
송요찬 계엄사령관, 조재미 서울 지구 계엄사령관을 비롯한 여러 군 관계자가 중립을 지킨 것은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강한 압력, 전반적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고 있음을 눈치챈 상황 인식, 이런 것이 기본적으로 많이 작용했다고 본다. 그렇지만 미국 영향이 있었던 것은 맞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하야에 미국이 일정하게 또는 상당 부분 영향을 줬다고는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영향력이거나 결정적인 영향력이라고 볼 수는 없다.
프레시안 : 하야 결정 후에도 미국은 주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인다.
서중석 :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겠다고 한 후 매카나기 대사가 허정, 김정열한테 한 이야기가 중요하다. 당시 허정은 과도 정부를 이끌 수반이 될 수 있는 외무부 장관이었다. 이들에게 뭐라고 얘기하는가 하니, ‘계엄사령부 등 군에 정권을 이양할 것‘을 제안한다. 이건 많이 밝혀져 있지 않은 사실인데, 김정열 회고록에 나온다. 놀라운 일이다. 미국은 자기들이 모든 힘을 기울여 강력하게 키웠다고 본 군을 굉장히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이후 군이 정권을 잡는 것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4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매카나기는 반공 보루로서 한국의 위상을 강조했다. “저는 각하께서 이번 사태로 안전하고 안정된 작전 기지로서 한국을 유지해야 하는 미국 측의 이해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으며 미국이 이를 지킬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이런 것은 (1979년) 10.26 때도 분명히 보인다. 10.26 때도 미국의 여러 자료를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 세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사실은 한국이 지금 민주주의를 할 상황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제거된 것에 대해서는 환영의 뜻을 보이는 것 같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통치가 이뤄져 반공의 최전선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거나 혼란이 초래되는 사태가 와서는 안 된다‘, 이 점은 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12.12쿠데타에 미국이 어떻게 개입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 전두환 신군부를 미국이 강력히 지지한 건 여러 자료가 확실히 입증하고 있다. (1980년) 5.18 때 미국이 적극적으로 광주 항쟁 세력을 진압하는 것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확고했다.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들어섰을 때 전두환을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번째로 맞이하는 외국의 중요 손님으로 초대한 것도 그 일환으로 보인다. ‘신군부를 우리가 강력하게 지지한다. 군인들만 믿을 수 있다‘, 이런 것하고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게 4월혁명 때도 나타나는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서른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프레시안> 2014-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