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민주혁명 54주년을 맞는다.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4월혁명은 반동과 역류를 거듭하며 수모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4·19를 짓밟은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 부르고 그 주동자들이 영웅으로 치켜세워지는 반민주 반공화 반이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독재자가 거침없이 신격화되고 도처에 동상이 세워진다.
헌법전문의 ‘임시정부 법통’과 ‘4월혁명정신 계승’은 종잇장의 인쇄물에 불과하고, 현실은 쿠데타 아류세력의 장중에서 움직인다.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가 원시형이라면 박정희의 6·8 부정선거는 근대형이고 이명박의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부정선거는 탈근대, 초근대형이었다. 이승만의 부정에 저항하고 박정희의 부정을 규탄했던 국민이 이명박의 부정에 침묵하는 세태가 되었다. 그리고 입만 열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다”는 허튼소리에 자만한다. 집단망각증세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렸는데도 민주주의국가를 자부하는 것은 무지일까 망각일까.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
그래서 제안한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준비하자. 10년 장병에 7년 묵은 쑥이 특효라면 이제라도 쑥을 묵히는 일이 중요하다. 이승만 이래 민주주의를 짓밟은 반민주 인명사전을 만들자.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데 앞장선 권력자, 정상배, 언론의 탈을 쓰고 독재를 비호하는 사이비 언론인, 곡필 지식인, 권력의 충견이 된 ‘검·판사’, 경찰, 교육자, 종교인 등의 죄상을 찾아서 역사의 필주(筆誅)를 가하자.
해방 후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하고, 4월혁명 후 이승만 독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10·26 후 박정희 쿠데타와 유신을 청소하지 못하고, 6월항쟁 후 전두환 군부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결과가 친일세력과 반민주세력의 온존·창궐·득세를 가져왔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4·19 민주혁명에 성공하고도 민주혁명의 가치와 체제를 지키지 못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는 국치와 유례없는 독재를 겪고도 심판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써 악의 뿌리가 번성하고, 다시 이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들의 권력과 재력이 유지됨으로써 정치적·법적 심판의 기회를 얻지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깨어 있는 국민의 힘으로 ‘역사심판’이라도 해야 한다. 이것은 과거청산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미래를 위한 작업이다. 민주주의를 짓밟고도 심판받지 않고 권력과 부만 가지면 이것이 재생산되는 악순환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우선 이승만 때부터 각계 반민주 행위자들의 죄상을 낱낱이 기록하여 그 당사자는 물론 후손들에게도 부끄러움을 갖도록 하자. 국민교육상 이보다 더 훌륭한 교재는 없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노무현 정부 때 국가기관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과 민족문제연구소 중심으로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된 바 있다. 이런 경험으로 반민주 인명사전을 만들어 역사의 필주와 함께 재발 방지책을 마련했으면 한다.
민주체제를 흔들고 인권을 유린하는 집단은 국법체계상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돼야 마땅하지만, 법집행권자가 당사자들이라면, 정의로운 양심들이 역사에 기댈 수밖에 없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신 선열들,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희생당한 민주열사들, 이로 인해 가난과 질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후손과 가족을 지켜본다. 해방과 민주화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이 주역이 되고 세습을 하는 것을 지켜본다.
반민주인명사전을 통해 정(正)과 사(邪), 진(眞)과 위(僞), 선과 악을 가리고 정의와 진실이 살아있음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해마다 접동새 목메게 우는 4월혁명의 날을 의례적인 기념식이나 하면서 그냥 넘길 수는 없겠다. 그때 희생된 200여 민주열사들과 4000여명의 부상자들이 억울하지 않겠는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한겨레신문 <2014-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