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서중석 : ‘이승만은 어떤 미국인보다도 미국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미국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치 경륜을 펴나갔다’, 이렇게 설명하는 학자도 있다. 미국인보다도 더 미국의 입장에서 세계를 봤다(는 것이다). ‘자유 세계와 공산 세계라는 양대 진영론에서 이승만처럼 강하게 반공 노선을 제시한 사람이 없었고 그건 미국의 반공 세력과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논리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과 마찰을 빚은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정치를 한다고 하더라도, 미국과 이승만은 이해관계가 다를 때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미국이 어디냐는 것도 문제지만, 미국 정부라고 하자. (미국의 주요 기관 혹은 정치 세력이 대외 정책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는 일은 심심찮게 일어났다. 국가 이익을 실현한다는 큰 틀에서는 같다고 하더라도 어떤 것을 국가 이익의 최우선으로 삼을지,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달성할지 등을 두고 의견을 달리한 것이다. <편집자>) 미국 정부와 이승만 대통령 사이에는 크게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예컨대 원조 문제를 봐도, 미국의 원조 의도 또는 미국이 주려는 원조 물자하고 이승만이 달라는 것하고 얼마든지 차이가 날 수 있었다. 이런 것에서 의견이 많이 대립할 수 있었다. 또 1950년대 한국 경제 정책엔 미국이 깊숙이 개입할 수가 있었다. 한미(합동)경제위원회 같은 것을 통해서도 그랬고 원조 물자를 통해서도 그랬다. 한국 경제를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그것에 대해 이승만 정부 입장이 다를 수 있지 않나. 그런 것 때문에도 마찰이 생길 수 있었다. 프레시안 : 군사 원조를 둘러싸고 힘겨루기를 하기도 했다. 서중석 : 그렇다. 무엇보다 군사 문제와 관련해 이승만 대통령이 훨씬 막강한 원조를 해줄 것을 계속 요구하면서 미국 정부와 씨름하는 걸 볼 수 있다. 그건 어느 정부든 다 마찬가지겠지만 이승만 대통령 때도 그런 일이 많았다. (그런데) 예컨대 1949년 군사 원조를 해달라고 할 때 미국에서는 ‘(북진 통일을 주장하는 등의 행태를 볼 때) 뭔가 사달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냐’ 해가지고 오히려 군사 원조를 많이 약화시킨 것으로 자료에 나온다. 그래서 전쟁이 정작 일어났을 때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강조하는 학자도 있다. 어쨌거나 그런 데서 마찰은 생기는 것이다. 가장 큰 마찰은 이승만 대통령이 권력을 (지나치게) 강화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 데서 비롯됐다). 미국으로선 자기들과 가까운 여러 나라에 ‘한국이 저렇게까지 가선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도 있지 않았나. 그런 미국 입장을 좀 생각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문제를 둘러싸고 아주 심각한 마찰이 벌어진 것이다. 박정희 정권, 특히 유신 정권 때 (미국과) 심각한 마찰이 많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이승만 정권과 미국 간의) 제일 심각한 마찰은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을 둘러싸고 일어난다. 유엔군 사령부 쪽에선 이승만을 지지했지만, 미국 대사관 쪽에선 이승만의 반민주 정치, 독재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면서 아주 강한 마찰도 한때 있었다. 프레시안 :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에버레디 계획(1953년 정전협정 체결 직전 이승만이 단독 북진을 표명하자 미군 측에서 ‘이승만 축출 후 유엔군 군정 선포’를 검토한 계획) 같은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승만과 박정희는 미국에 당당한 대통령이었다’는 주장도 한다. 서중석 : 에버레디 계획은 그런 마찰의 일환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미국이 에버레디 계획을 실행할, 그러니까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을 제거하는 것을 구체화할 의도까지 있었느냐? 그런 의도까지는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미국은 이승만이 극단으로 갈 경우 그걸 견제해야 하지 않았나.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카드도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준비용으로 볼 수 있는 면이 있었다. 에버레디 계획은 이승만이 당당한 대통령이어서 생긴 게 아니다. 이승만이 너무 권력에 집착하고 부산 정치 파동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만신창이로 만드는 것을 미국이 견제하려는 속에서 그런 대결,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이건 박정희 때도 마찬가지다. 제일 큰 갈등은 유신 체제 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생기지 않나? 그런 것을 가지고 ‘미국에 당당한 대통령이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건 너무 안 맞는 말이다.
이승만이 ‘당당한 대통령’이어서 미국이 제거? 그렇지 않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의 반일 민족주의가 미국의 동북아 안보 정책에 어긋났다는 점이 이승만 하야의 한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과 일본이 밀착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미국의 인식이 4월혁명의 요인 중 하나라는 주장이다. 서중석 :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국내에서 여러 사람이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것도 역시 너무 과장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난 이승만 대통령이 그 당시 굉장히 강렬했던 교육열에 부응해, 어려운 때였는데도 교육에 투자한 건 잘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1952년 평화선(이승만 대통령이 연안 수역을 보호하기 위해 선포한 해양 주권선. ‘이승만 라인’으로도 불렸다. <편집자>)을 선포한 건 아주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반일 운동을 편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게 너무 많다. 이 시기 반일 운동은 이승만 대통령과 이승만 정권의 권력의 성격, 특성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이승만 정권에서 친일파가 요직을 차지하지 않았나. 자유당 간부들 중에도 많았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을 친일파 정권이라고 하는데, 어째서 이승만 대통령은 반일 정책을 쓴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부분이 많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 부분을 논리적으로 그리고 명확한 자료를 가지고 설명해야 하는데, (대개) 그렇지 않다. 내가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다닐 때 제식 훈련을 받고 행진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 반공, 방일(防日), 북진, 통일 이런 걸 무지무지하게 많이 외치고 다녔다. 당시 학생이었던 사람은 초·중·고 때 다 그러고 다녔다. 담벼락에도 반공과 함께 방일, 그러니까 일본을 막자는 게 참 많이 붙어 있었다. 이런 반일 운동은 반공 운동과 함께 1950년대 말까지 계속된다. 그러면 이것이 순수한 반일 운동이냐. 다시 말해 한일 회담에서 일본이 잘못한 것에 대해 ‘일본이 이럴 수가 있느냐’라고 하면서 들고일어난 것이냐. 그렇게 해석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예컨대 처음에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과 회담을 열 때 일본에 상당히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과거는 잊자는 식으로. 그런데 일본은 (1951년) 예비 회담 때도 좀 그랬지만 (특히 1952년) 첫 번째 본회담 때부터 과거 우리에게 억압 통치를 한 것을 반성하는 기미를 조금도 안 보였다. 더군다나 1953년에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망언의 첫 번째로 꼽히는 유명한 구보타 망언까지 나왔다. (구보타 간이치로는 1953년 10월에 열린 제3차 한일 회담에서 일본 측 수석 대표였다. <편집자>) “한국 민족의 식민지 노예 상태를 말한 카이로선언(1943년)은 연합국의 전시 히스테리의 표현이다”, “36년간의 한국 통치는 일본이 한국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다”, 이렇게 표현한 건 정말 한국인들한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렇게 일본 측에서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여럿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컨대 그다음 해 3.1절 기념사 같은 데에서 강렬히 일본을 비난하는, 특히 일본 제국주의 지배와 한일 회담에 임하는 일본의 태도를 비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지 않나. 3.1절이라는 건 그런 이야기를 하기 가장 좋은 날이기도 하고. 그런데 1954년 3.1절 기념사를 읽어보면 신기할 정도다. 일본을 비판하는 얘기는 몇 마디밖에 안 나온다. 그러고는 대부분 반공 얘기만 한다. 3.1절에 지나치게 반공 이야기를 할 게 또 뭐가 있나. 일본을 비판해야 할 때였고,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렇지가 않더라. 이 양반이 1941년 이전에 정말 반일 감정이 있었는가를 가지고 논란도 있는데, 이런 것들을 읽어보면 ‘정말 이분이 반일 감정이 있는 분인가’, 이런 생각까지 들더라. 반공 운동과 함께 방일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건 1954년 늦게부터다. 이때부터 일어나는 반일 운동은 반공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다. 이 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반공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이승만의 반일 운동 프레시안 : 이 문제는 일본 내부 상황과도 관련돼 있다. 서중석 : 1954년 일본에서 요시다 시게루(재임 1946∼1947, 1948∼1954,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의 외할아버지)에 이어 하토야마 이치로(재임 1954∼1956)가 정권을 잡게 된다. 얼마 전 집권했던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재임 2009∼2010)의 할아버지다. 이 하토야마 이치로가 집권할 때 정경 분리를 들고나온다. 이건 좀 설명할 필요가 있다. 뭐냐 하면 일본은 전쟁에 의해 경제가 발전하고 국력이 강해지고 부국강병이 이뤄졌다고 많이들 말하지 않나. 청일전쟁을 통해 제1차 산업혁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방직 공업 같은 게 크게 발전하면서 국력이 커졌고,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중공업과 군수 공업 같은 게 크게 발전하면서 세계 강국으로 등장했다고 말한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은 불로 소득이라고 하지 않나. 싸움에 나서지도 않았으면서 독일 쪽에 선전 포고를 해서 (독일 조차지이던) 중국 청도(칭다오) 등을 장악하고 중국에서 큰 이권을 차지하면서 득을 많이 봤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은 일본을 폐허로 만들었다. 중일전쟁을 포함한 15년 전쟁이라는 긴 전쟁에서 결국 패하지 않았나. 이런 일본이 폐허에서 다시 일어난 것은 한국전쟁 덕분이다. 한국전쟁을 통해 일본은 전전 경제 수준을 회복하고 경기가 되살아난다. 이른바 ‘한국 특수’라는 것이다. 이건 일본 사람도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일본이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이 된 데에는 (한국 특수에 이어) ‘월남 특수’가 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프레시안 : 한국전쟁은 여러모로 일본에 꽃놀이패였다. 서중석 : 한국은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 불끈불끈 일어서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되지 않았나. 일본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다. ‘일본이 저렇게 커지면 또 우리한테 오는 것 아니냐’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면서 반발이랄까 착잡한 심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미국이 이 당시 ‘1달러, 2달러 정책’을 썼다.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한데, 무슨 얘기냐 하면 미국이 1달러를 한국에 원조하는 것이 2달러 효과를 보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 원조 물자는 일본 걸 반드시 사라. 그러면 일본에서도 1달러 효과를 보고 결국 양쪽에서 2달러 효과를 보는 것이다’, 이런 것이다. 일본을 부흥시켜 강력한 경제 대국, 군사 대국으로 만들기 위한 미국의 적극적인 정책 중 하나로 나타난 거다. 이 무렵 자위대도 생기지 않나. (자위대의 모체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만들어진 경찰 예비대다. 경찰 예비대는 1952년 보안대를 거쳐 1954년 자위대로 확장된다. <편집자>) 이승만 대통령도 이것에 대해선 아주 기분 나빠했다. 한국인 모두 기분 나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일본이 저렇게 일어서는 것은 한국에 좋게 보일 수가 없는 상황 아니었나. 문제는 일본이 경제적으로 부흥하면서 물건을 팔아먹을 시장이 (더)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소련 같은 아주 큰 시장이 옆에 있지 않나. 그러니까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은 정경 분리를 내세우면서 ‘우리는 정치는 미국과 입장을 같이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급속히 관계를 발전시키고 소련과도 국교를 정상화하고 관계를 발전시키겠다’, 이렇게 나왔다. 이것도 이승만 대통령을 대노하게 했지만, 다른 것도 있다.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가 ‘북한과도 경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발언까지 나중에 한 것이다. 프레시안 : 반공과 반일이 맞닿는 상황이 된 셈이다. 서중석 : 그러니 반공 투쟁의 일환으로, ‘일본의 빨갱이’라고까지 하면 뭣할지 몰라도 (이승만 정권 기준대로 하면) 이 사람들을 용공 세력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걸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강렬한 반일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면서 ‘일본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주장도 정부 발표로 여러 차례 하는 걸 볼 수 있다. 심지어 영국에 대해서도 “일전을 불사”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영국이 중국과 경제 관계를 트면서 ‘영국이 북한에 대한 수출 금지령을 풀었다’는 말이 나오자, 1957년 조정환 외무부 장관은 국회에서 “일전을 불사하더라도 영국의 대북한 수송을 막겠다”, 이렇게 말했다. 영국 상선이 북한을 향해 항행하면 한국 해군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지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능력이 정말 있느냐 이전에, 영국은 미국 다음의 ‘자유 진영 국가’로 알려져 있어 논란이 되고 그랬다. 1955년 8월에는 대일 교역 및 여행 금지 조치를 내렸다. 일본은 손해를 거의 안 보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미 경제 대국이었고, 당시 한국은 경제적으로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교역을 막으면 우리만 타격을 입는 것이었다. 그래서 야당뿐만 아니라 언론에서도 ‘이건 전혀 효과가 없고 우리만 손해 보는 것’이라고 했는데, 하여튼 반일 운동의 일환으로 그랬다.
박근혜 대통령 부친과 아베 신조 외할아버지의 특별한 인연 프레시안 : 일전불사라는 위험하고도 무거운 이야기가 가볍게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그렇다. (어쨌건) 이시바시 단잔(재임 1956∼1957)이 하토야마 이치로를 이어 내각을 구성했는데, 거기까지는 정경 분리 정책을 썼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이) 반공 정책의 일환으로 반일 운동을 펼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다음에, 그러니까 1957년에 기시 노부스케(재임 1957∼1960) 정권이 들어선다. 기시 노부스케가 어떤 사람인가. A급 전범이지 않나. 그래서 3년 동안 형무소에 있었다. 그런데 미국 정책이 1948년 무렵 바뀐다. (미국은 일본 점령 초기 비군사화, 민주화에 정책의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냉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중국 공산화 가능성이 높아지자, 일본을 아시아 반공의 보루로 부흥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꿨다. 이러한 역코스(逆course)는 일본 개혁 움직임의 퇴행으로 이어졌다. <편집자>) 그러면서 앞의 A급 전범은 처형됐지만 뒤의 전범들은 처형되지 않았다. 그래서 참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얘기한다. 이 사람은 1952년 4월까지는 일제 때 경력 때문에 정치 활동이 금지됐다. 그러나 그 이후 정치 활동에 나서면서 1957년에 수상이 되고 그다음에도 또 수상을 한다. 두 차례에 걸쳐 수상을 했다. 이 사람 동생(사토 에이사쿠)은 한일 회담을 타결할 때 일본 수상이었다. 사토 에이사쿠는 일본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수상(재임 1964∼1972)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쿠데타를 했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지원하고 지켜준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1978년 12월 박정희가 유신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할 때 전 세계 어떤 나라도, 미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만에서조차, (한국) 정부가 요청했는데도 축하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공식 사절은 안 왔다. 그렇지만 기시 노부스케가 이끄는 (민간) 사절만은 왔다. 그렇게 기시 노부스케는 유신 정권을 지켜주는 데도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런 기시 노부스케가 아베 신조 수상의 외할아버지이지 않나. 그래서 ‘아베가 저런 극단적인 우경화 정책을 펴는 건 외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펴려던 정책을 지금 와서 구체화해 일본을 강력한 전쟁 국가로 발돋움하게 하려는 정책이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프레시안 : 구보타 망언을 계기로 중단된 한일 회담이 기시 노부스케 집권 후 재개된다. 서중석 : 1957년 수상이 됐을 때 기시 노부스케는 강력한 친미를 주장했다. 경력 때문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유화 정책을 쓰고 ‘한일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나왔다). 또 이 사람들의 출신 지역도 어민이 많은, 우리로 따지면 동해안 지역이지만 일본으로 치면 서해안 지역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출신 지역은 혼슈의 서쪽 끝인 야마구치 현이다. 메이지 유신의 중심 세력이던 조슈 번이 있던 곳이다. <편집자>) 그래서 이승만 정부와 좋은 관계를 맺어서 이승만 정권이 일본 어선을 나포하는 걸 막을 필요도 있었다. 그런 것 때문에도 기시 노부스케 정권은 미국에 가기 전에 아주 적극적으로 제스처를 취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랬을 때 이 대통령은 훈령 같은 것을 통해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주일 대표에게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말라’, 그렇게 나왔다. 그러면서 강하게 반일 운동을 편다. 왜 이 시기에 이 대통령이 이렇게 강하게 반일 운동을 폈느냐. 이건 이 대통령의 노회함, 권력에 대한 예민함, 이걸 이해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반공 운동보다 어떤 면에서는 반일 운동이 국민한테 지지를 받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걸 알아낸 거다.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이 정경 분리 정책을 펴면서, 그전에는 조그마하게 하던 반공·방일 운동이 막 커졌는데 그때 국민들이 적극 호응했다. 일본으로부터 벗어난 지 몇 년 안 되던 때여서 당시 일본에 대한 반감은 굉장히 강했다. 이 대통령은 이것을 중시한 거다.
반일 정책 때문에 쫓겨난 이승만? 그런 건 없었다 프레시안 : 일본을 맹비난한 데 다른 속셈이 있었던 셈이다. 서중석 : 이승만 정권 말기까지 반공 운동과 함께 반일 운동을 편다. 그런데 (일본 릿쿄대) 이종원 교수가 잘 분석했듯이, 미국으로 봐선 이런 이승만 정권의 반일 정책은 자신들의 동아시아 통합 정책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종원 교수가 논문에서 분명히 제시한 것처럼 미국이 이걸 이해한 측면도 많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반공 정책만이 지금 미국의 이해에 부합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한마디로 ‘한·미·일 수직 안보 체제가 꼭 필요하다. 미국=중심, 일본=부심, 한국=최전선으로 이어지는 안보 체제를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고 좋은 관계를 맺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그것을 한국 정부에 권유한다’ 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압도한 건 역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정책이었다. 물불 안 가리는 강력한 반공 정책이야말로 미국에 가장 믿음직했던 것이다. 그래서 (1960년) 3.15 부정 선거가 있었는데도 미국이 (4.19 시위 전에는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이는 식으로) 그렇게 반응한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 문제, 이승만 정권의 대일 정책 때문에 미국이 이승만 대통령을 권좌에서 축출하려 했다’, 이런 건 전혀 있지 않았다.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 정책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걸 수정할 것을 권고도 하고 견제도 했지만, 그것 때문에 내쫓으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프레시안 : 미국의 한일 국교 정상화 촉구 움직임은 이승만 하야 후에도 계속된다. 서중석 : 이 대통령이 물러나자 바로 허정 과도 정부는 다섯 가지 중요한 정책의 하나로 한일 관계 정상화를 들고나왔다. 장면 내각도 강력하게 ‘일본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겠다’, 이런 걸 내세운다. 박정희 정부도 이걸 이어받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러면서) 한일 회담을 저자세로 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허정 과도 정부, 장면 정권의 그런 정책이 미국의 눈치를 봐서 나왔다고도 볼 수 있지만, 경제 때문에도 일본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많이 있었다. 미국이 한국에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하는 건 1962~1963년에도 있었지만 1964년부터 더 강해졌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1964년에 (프랑스의) 드골이 중국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이 핵 실험을 했다. 그리고 월남전(베트남전쟁)이 그때부터 격화된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월남전 수행에서 동아시아가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봐서도 (미국이) 이제는 한일 관계를 남의 집 불구경하듯 볼 수가 없었다. 이 불을 빨리 끄고 국교를 정상화하게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서 1964년 초부터 미국이 아주 강력하게 한일 관계 정상화를 촉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마흔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프레시안 <2014-04-30> 기사원문: ☞ ‘일본과 일전불사’ 대통령, 속셈은 따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