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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피고인들 투쟁 덕에 재판권 독립 얻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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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는 누가 봐도 굴곡진 현대사였다. 시국사건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졌다. 때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앞장서다 징역살이도 마다하지 않은 수많은 ‘시대의 등불’이 있었다. 언론계에 작고한 리영희 선생이 있었다면, 법조계엔 한승헌(81) 변호사가 있었다. 

한 변호사의 삶은 영화 ‘변호인’의 주인공 ‘송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아니 수십년간 송변보다 더 굵직한 시국사건을 맡으며 갖은 고초를 당했다는 점에서 송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시국사건이 유난히 많았던 70~80년대. 김대중 전 대통령, 김지하 시인, 황석영 작가 등은 모두 그에게 빚을 졌다. 이 과정에서 한 변호사는 두 번의 옥고를 치르고 변호사 자격을 8년간 박탈당하기도 했다. 삶은 바위를 안고 산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던 시지프의 고행과 같았다. 

한 변호사는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검사 생활(법무부, 서울지검 등)을 거쳐 변호사로 전신했다. 1965년 소설 ‘분지’ 사건을 시작으로 독재정권 아래서 탄압받는 양심수, 시국사범의 변호와 민주화, 인권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방송위원회 위원,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 위원,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감사원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대통령 통일고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분을 맡았다.

최근엔 법조인생 55주년을 기념해 ‘피고인이 된 변호사’, ‘권력과 필화’, ‘한일현대사와 평화,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 등 네 권의 기념선집을 완간했다. 이 선집의 의미는 크다. 비록 과거를 기술한 내용들이지만, 이를 통해 현재의 대한민국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 ‘무릇 역사학이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학의 대명제를 떠올려보면 한 변호사의 선집은 현 시국을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한 변호사에게 최근 선집 출간의 의미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국사건 등과 관련해 들어봤다. 다음은 한승헌 변호사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 법조55년 기념선집 네 권이 지난 3월 완간되었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 2013년은 내가 법조인으로 활동을 시작한 지 55년이 되는 해였다. 55주년이라는 것을 나의 개인사로만 여기지 않았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굴곡이 많았다. 그래서 집권자의 독재 탄압으로 양산된 많은 정치적 사건의 변호에 나섰던 체험과 생각을 담은 글을 네 권의 책으로 묶어 선집을 냈다.

집권자의 압제로 찢겨진 민주 법치주의의 참상을 기록하고 이를 널리 알림으로써 야만적 권력의 재현을 막아낼 역사인식을 배양하는데 일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다시 말해서 이번 선집은 정치적 탄압의 현장에서 박해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기록이자 증언이다. ‘야전의 현장에서 쓴 역사의 사초(史草)’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무릇 변호사는 그때그때 부여된 변호업무를 잘 수행해야 하지만, 재판에 정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때, 그 실상을 기록해서 동시대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또 다음 세대에게 이를 전해 줄 의무가 있다. 우리 역사를 배우는 후대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근작 ‘한국의 법치주의를 검증한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 우선 법치주의에 대한 근본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내게 되었다. 법치주의라는 게 참 잘못 인식돼 왔다. 국가가 국민에게 준법을 요구하기 전에 위정자의 준법이 선행돼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와 반대로 법치가 국민에 대한 하향식 준법 명령처럼 되어버렸다. 국민이 위정자에 대해 법에 따른 지배를 요구하는 것이 ‘법의 지배’요,  법치주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반민주적인 권력자들이 어떻게 법치주의를 훼손했는가 하는 것을 실증적으로 예증했다. 가식적 법치주의의 실상을 해부한 후, 집권 정략에 의한 법의 정통성 훼손과 압제정권하 사법의 진통과 무력을 밝혀보고자 했다.

한국의 법치주의는 상처와 치욕으로 점철되어 왔다. 민주헌정에 고장이 빈발했는가 하면, 아예 탱크로 헌정을 밀어붙인 것도 모자라 국회를 배제하고 만든 유신헌법까지 등장했다. 입법, 행정, 사법의 3부가 모두 독재자의 입김에 흔들린 가운데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법의 민주적 본질에서 멀어져갔다. 그 현장, 그 실상을 밝혀보자는 생각에서 ‘검증’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이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

– 책 내용 중 74년에 쓴 ‘정치범과 정치현실’에선 세계 각국의 정치범 실태를 논한다.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정치범은 ‘비극적 모순’이지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대목이 있다. 한국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자면 어떤가. 

▲ 무릇 정치범은 박해와 저항의 산물이다. 위정자의 폭압은 정치권력의 탈취와 그 유지를 위한 야만적 수법이었기에, 이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자연스런 반작용이었다. 그러기에 박정희 정권을 비롯한 역대 군사정권 하에서는 무모한 폭력과 협박으로 정치범이 양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에 비해 지금은 보다 지능화된 수법으로 국민을 농락하고 억압한다. 과거에는 헌법 등 실정규범 자체가 불법의 산물이었음으로 체제저항적인 정치범이 많았다. 근래에 와서는 민주헌정에 배치되는 통치전략이 개발돼 이에 반대하는 개인이나 세력을 탄압하고 있다. 예전의 ‘내놓고 함부로’ 대신 ‘은밀하고 영리하게’로 그 수법이 바뀌었다고나 할까.

정치범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국가보안법이나 내란죄 등의 법 집행 과정과 판결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사실 일반 대중들에게도 법이 정치적으로 활용된다는 게 눈에 훤히 보일 정도다. 삼권분립은 과연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 법은 그 생성과정에서 정치 내지 정당의 입김이 개입된다. 따라서 실정법의 운용 즉 법의 시행 또는 해석 적용의 공정성은 사법부의 판단에 의해서 담보되어야 한다. 그것이 입헌국가의 정도다. 그러나 과거의 실상을 보자면, 사법부가 집권자의 압력이나 눈치를 배제하지 못하고 온갖 과오를 범했다. 1987년의 6월항쟁 이후에는 법원에 대한 ‘외풍’이 잠잠해졌지만, 이명박 정권으로 넘어간 뒤에는 예전의 악몽을 연상케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속출해 의혹을 사기도 하였다.

선진국의 경우 우리처럼 정치권력이 직접 사법부를 겨냥하는 경우는 없다. 미국만 해도 위정자가 재판에 간섭하는 일은 없지 않은가. 정보기관원이 법원에 출퇴근하는 전례는 유신통치의 하이라이트였다. 돌이켜보면 87년의 민주항쟁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줘야 할 사법부가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거꾸로 사법부가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피고인들의 투쟁 덕에 재판권의 독립을 얻어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앞으로 경우에 따라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된다. 독재자와 그 주변에서 재판을 쏘아보더라도, 삼권분립의 기본 틀이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김대중 정부 당시 감사원장을 지냈다. 그 당시 청와대는 어떠했나. 감사원을 찍어 누르지 않았는지. 

 ▲ 혹여 최고권력으로부터 감사원 독립을 침해당할 경우에 대비해 모범답안을 준비해 뒀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이나 청와대에선 어떤 지시도 않았고 간섭도 안 했다. 결국 모범 답안을 한 번도 써보지 못했다(웃음).

노태우 정부 당시 남북교류에 장애가 되는 국가보안법 조항을 고치겠다는 얘기가 나온 적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크게 변화된 건 없어 보인다. 한 변호사는 책에서 “북한의 요구에 사사건건 반대해야지만 국가보안법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자면. 

 ▲ 국가보안법대로라면 북한의 주장에 찬성하거나 합의해주는 것은 뭐든지 찬양 고무 동조가 된다. 실제로 그렇게 처벌해왔다. 그런데 남북 정부 간의 합의를 보면 그걸 성과라고 하는데 반해 민간 차원에서 국민이 공감하고 합의하면 범죄로 몬다. 이건 법적으로도 모순이다. 소위 통치행위론을 동원해도 납득시킬 수 없는 자가당착이다.

국가보안법은 ‘북한공산집단은 반국가단체다’라는 전제 위에서 만들어졌고, 안보의 명목으로 자주 남용되어 왔다. 만약 북한을 정말 반국가단체로 본다면 한국 정부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즉각 이를 토벌 궤멸시켜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원칙을 천명했고, 노태우 정권은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휴전선 이북을 북한정권의 관할지역으로 인정하고, 상호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합의까지 했다. 또한 평화애호국가만이 회원국이 될 수 있는 유엔에 함께 가입할 것을 북한에 권유해 남북이 동시에 유엔회원국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북한이 반국가단체라는 입법은 위에서 본 한국정부 자신의 제반 조치와 양립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적어도 북한이 반국가단체라는 주장은 철회된 것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그 후의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 그리고 남북 정부 간 또는 민간 차원의 교류 협력까지를 아울러 생각한다면 북한이 반국가단체임을 전제로 한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큰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국정원과 검찰에 엄중한 책임 물어 공식적으로 국민과 역사 앞에 사죄 표명해야”

 

– 사람이나 폭력이 아닌 법이 지배하는 이른바 근대적 국가원리가 법치주의라고 할 수 있겠는데, 책을 읽다보면 이 법치주의가 외려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법치주의의 한계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대안이 있다면.

▲ 법치주의는 치자(治者)의 자의(恣意)나 폭력 대신 법에 의해서만 통치를 하라는 것이 그 명제이다. 다시 말해 치자의 지배방식이 법의 근거와 절차와 요건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향적 견제의 결과로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것, 이것이 근대적 의미의 법치주의다. 국민이 치자에게 통치의 룰을 들이미는 의미가 있지, 국민보고 법을 지키라는 명령과 권능을 치자에게 준 게 아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준법을 요구하면서 법치주의를 내세우는 난센스가 되풀이되곤 한다. 만일 치자 아닌 국민의 준법이 법치주의의 본질이라면, 과거 히틀러 시대나 유신시대가 법치주의의 모범이었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대안이 몇 가지 있기는 한데,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먼저 집권자가 법치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국회가 올바른 법치의 실현을 위해 집권자에게 충고하고 감시하고 견제할 책무를 다해야 한다. 여당이 집권자의 눈치나 보며 정치적 하수인을 자처하지 말고, 올바른 국정수행을 위해 쓴 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집권자나 권력자들의 잘못된 행위를 법적으로 바로잡고 구제할 책무는 최종적으로 법원에 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아주 중대하거나 민감한 사안에 대해 법원은 좀 더 의연해야 한다. 헌법재판소도 반민주적인 입법을 무효면 무효, 위헌이면 위헌이라고 분명한 결정을 과감하게 해야 한다. 그렇잖아도 우리나라는 제왕적 대통령제다. 그런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해야 법치주의가 바로 선다.

– 네 권의 선집,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혔으면 하나.
▲ 우리는 엄청난 과거사도 쉽게 잊고 넘어간다. 심지어 4.19나 5.16은 물론 유신시대나 긴급조치도 모르거나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많다. 불과 몇 해 전의 사건조차도 기억에서 지워진 채 살아간다. 나는 독일 바이즈첵커 전 대통령의 “과거에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도 맹목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가끔 인용한다. 과거를 바로 알아야 현재를 정확히 볼 수 있고, 나아가서 미래를 내다볼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선집이 국민들의 ‘과거사망각증’을 예방하는 ‘기억 소생’ 내지 ‘역사 다시보기’의 촉매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시는 이 땅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지는데 있어 나 정도의 경험자의 필설이라도 일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 좀 가벼운 얘기를 하겠다. 영화 ‘변호인’, 어떻게 보았나.
▲ 무거운 얘긴데…(웃음).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스토리에 감동하진 않았다. 그러나 군사독재 하의 용공사건조작 실례를 잘 부각시킨 영상물이란 점은 평가할 만했다. 집권세력의 하수인격으로 비친 검찰의 광분을 보면서 나는 그냥 관객의 한 사람일 수만은 없었다. 그 시대의 그보다 훨씬 더 처절한 사례에서 억울한 수난을 당한 많은 피해자들의 처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주연 하나 빼면 호화캐스팅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봤을까. 게다가 액션 영화도 아닌 법정 영화인데 말이다. 10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몰려든 이유도 지난날의 폭압정치에 대한 분노의 응어리를 스크린에서나마 씻어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건의 실제 주인공인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일념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 최근 유우성 사건(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에서 증거재판주의의 장점이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변호인에서는 판사의 재량으로 증거가 삭제됨으로써 결국 그것이 피고인들의 발목을 잡는다. 증거재판주의의 한계는 없는지.  

▲ 재판에서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해야 한다’는 게 증거재판주의다. 그런데 실제 재판에서 유죄의 증거로 볼 수 있느냐의 여부는 법관의 판단에 달려 있다. 소송법상으로는 증거능력과 증명력의 문제로 귀착되는데, 유우성 사건의 1심에서는 유죄의 증거가 없는 것으로 판결이 났다. 그런데 그 후 검찰 측에서 항소심 재판부에 낸 증거문서가 모두 위조로 판명이 되자 검찰은 이를 모두 철회했다.
이번 재판에서 만약 중국측 공문서의 위조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 공문서라 할지라도 판사가 판단하기에 사건의 전반적인 맥락상 유죄의 증거로 볼 수 없다고 본다면 증명력을 부정해버릴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오판이 나올 수도 있다. 그것이 증거재판주의의 한계이기도 하다. 

앞으로 문제는 그 밖의 나머지 증거만 가지고도 유죄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항소심에서 1심과 동일한 증거판단을 하는 한 유죄판결이 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과 국정원의 체통을 생각해서 항소 취하를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외국의 공문서까지 위조해서 유죄의 증거라고 법정에 내놓은 국정원과 검찰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두 기관의 공신력을 위해서도 차선책으로 남아있는 회초리가 될 것이다.

– 국정원 사태, 전교조 법외노조 사태, 통합진보당 해산청구 사태 등 박근혜 정권 아래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 정말 떳떳하고 강한 정부는 매사를 돌격정신과 강경책으로 밀어붙이려는 저돌적 방식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지금의 정권 수뇌부는 군과 공안 분야의 요직 출신들로 짜여져 있기 때문인지 임전무퇴와 공안적 대응을 능사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단기적으로는 강경이 곧 효과 있는 득책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민주정부의 본질에 배치되는 극약처방은 국민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집권자 자신과 정권을 위해서도 독이 될 수 있다.

– ‘분지’ 사건에서 지금까지, 한국의 사법부와 사회 분위기, 어떻게 변화했다고 생각하나.
▲ 1965년 ‘현대문학’지에 실린 소설 ‘분지’가 용공작품이라는 이유로 그 작가인 남정현 씨가 반공법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문학작품에 대해 정면으로 반공법을 적용한 충격적인 사례였다. 해방 후 진주한 주한 미군의 성적 만행을 다룬 내용이 반미이자 용공이라는 것이었다. 문학작품에 반공법을 들이댄 군사정권의 처사는 창작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다. 변호인인 나의 무죄 주장과는 달리 판결은 유죄(선고유예)로 끝났다. 그 후로도 반공법을 발동한 필화사건은 속출했고, 표현의 자유는 전반적으로 위축되었다.

독재정권하에서 내렸던 판결들이 이제는 재심에 의해 연달아 무죄판결이 나고 있다. 그동안 사법부가 과오를 저질렀다는 점을 사법부가 자인한 셈이다. 문제는 앞으로 또 그런 독재권력의 검은 그림자가 미쳤을 때 과연 사법부 스스로 독립을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다. 지금까지 사법부는 재심 무죄 판결을 하면서 간혹 오판에 대한 개별적인 사죄를 한 법관도 있었다. 이제 한번쯤은 공식적으로, 사법부의 이름으로 국민과 역사 앞에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으면 좋겠다.

– 한 변호사는 스스로 ‘늘 실패한 변호사’라고 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 여기서 ‘실패’라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변호를 통해서 주장하고 지향했던 성과를 못 얻어냈다는 의미다. 여러 재판에서 죄 없는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고, 풀려나야 할 사람들이 징역을 살았다. 그러니 변호인으로서 실패가 아닌가? 제대로 된 사법부가 아니라고도 하지만 변호인인 나로서도 일말의 자책감이 들 수밖에 없다. 적어도 시국사건에 관해서는, 내 변호의 효험이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피고인의 무죄를 확신하면서 동시에 유죄판결이 나리라는 점도 확신해야 했다’고 참담한 심정을 토로한 적도 있었다.

– 변호사 한승헌, 어떻게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이 있다면.

▲ 인권변호사, 참 듣기에 민망한 호칭이다. 변호사란 말 속에 이미 인권을 지킨다는 직분이 내포돼있다. 우리 한국의 특수한 정치 풍토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생긴 말이기는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호칭이 없어지고, 그냥 변호사라고만 해도 당연히 인권변호사라는 인식이 드는 시대가 와야 한다.
60년대만 하더라도 시국사건 변호에 나서는 변호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만일 나마저도 억압당하는 이들을 외면했다가는 나중에 가책을 느끼고 후회할 것 같았다. 당시 피의자나 피고인들의 신념과 용기에 감화를 받아 내 변호의 소임을 버릴 수가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1974년 4월의 ‘민청학련’사건(긴급조치 4호 발동)이다. 특히 그 중 경북대 학생회장 출신의 여정남 군이 인혁당 재건위사건 연루자로 조작돼 사형을 당한 것이 가장 가슴 아팠다. 그의 변호인이던 나도 그의 처형 당시, 같은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재소자였으니 더욱 기가 막혔다. 그 사건은 30년이 넘은 뒤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처형된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시국사건을 맡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 가족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내가 변호활동 와중에 반공법으로 구속되고 감옥살이를 해도 집사람이나 아이들이 한 번도 만류한 적이 없다. 오히려 아이들은 아버지를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반면 밖에서 나를 아끼던 분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변호사 자격 박탈당한 지 8년만에 겨우 복권이 되자, 그만 평범한 변호사로 돌아가서 생계를 챙기라며 전자계산기를 선물 한 분도 있었다. 그런데 징역 살고 나온 뒤에 시국 사건에 손 떼는 건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문익환, 임수경, 황석영 같은 분들을 구치소와 법정에서 마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 한국의 법조계, 그리고 한국 정치와 사회가 향후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말해 달라. 
▲ 이 나라의 법조인들은 신분과 소득에 안주하지 말고,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해서 좀 더 적극성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우리의 정치는 지난날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를 퇴색시키는 단계로 후진하고 있는데, 정치인들 스스로의 각성 내지 재활능력은 기대할 수 없어 보인다. 지식인을 비롯한 국민 각자가 민주역량을 강화해 국면을 바로잡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우리 교육의 현실은 어떤가. 올바른 세계관을 함양시키는 교육이 아니어서 걱정스럽다.
역사를 장기적으로 보면 느리게나마 조금씩 전진한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때로는 후진기어가 걸릴 수도 있지만, 그러나 장기적으론 앞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그 전진을 가능케 하는 배터리 또는 전원은 지식인을 비롯한 유권자들의 각성과 헌신과 결집력이다. 절망 가운데서 희망의 싹이 자라는 법이다. 국민 각자의 주권자다운 언행과 참여정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위클리서울 <2014-04-27>

기사원문: “사법부,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피고인들 투쟁 덕에 재판권 독립 얻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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