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4월혁명은 그 의의와 별개로, 대안 세력을 키우지 못했을 때 생기는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이 문제는 다른 문제보다 논의가 많이 됐다. 대안 세력 부재라는 문제가 제일 많이 논의됐다. 1960년대, 1980년대 또는 1990년대에도 ‘4월혁명이 미완의 혁명이 되고 제대로 혁명 과업을 수행하지 못한 건 대안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야당이 자유당과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집권하고도 국민이 4월혁명에 건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런 평가를 많이 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조금 더 분명히 해야 할 대목도 있다. 프레시안 : 어떤 대목이 그러한가. 서중석 : 우선 유럽에서 68혁명이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지 않나. 그렇지만 68세대가 정치 이념을 구체화하고, 녹색당을 비롯한 진보 정당을 만들어 자신들의 꿈을 현실에서 부분적으로라도 실현하는 건 수십 년이 지나서다. (전 세계 녹색당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독일 녹색당이 연방 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한 건 1983년,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해 연방 정부 운영에 참여한 건 1998년이다. <편집자>) 학생들이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해서 학생이 바로 집권하는 경우는 다른 데서도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실 4.19 그날 지도부가 있었다고 봐야 하느냐(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서울시청 옆에 있던 국회 의사당까지 진출하는 데 앞장선 학생이 있었던 건 틀림없지만, 그걸 한 단계 더 높일 수 있는 지도부가 있었느냐. 대학생이기 때문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런 지도부가 생길 만큼 1950년대가 그렇게 돼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던 시대가 아니고 관제 데모만 성한 시대였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지평과 조직력을 학생들 내부에 쌓고 갖춘다는 건 쉽지 않았다. 또 초·중등학생은 초·중등학생이기 때문에 그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4.19에 참여한 면도 있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다. 4.26 (이승만) 하야 이후 일부 대학생이 도로 청소, 교통정리 같은 활동에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다. 부상자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한 활동도 있었다.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활동이다. 신생활 운동이라든가 국민 계몽 운동 같은 것도 비슷하게 평가할 수 있다. (학원으로 돌아온 학생들은 외제 사치품을 멀리하고, 양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지 말자는 운동을 벌인다. 이를 신생활 운동이라 한다. <편집자>) 학생들 사이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는 건 8월 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면서다. 그즈음 통일 문제 같은 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러나 과연 그 수가 얼마만큼 되느냐 하는 것도 논란이 있다. 대안 세력 부재…혁명의 과실은 시위 방관하던 민주당 품으로 프레시안 : 조직 역량을 갖춘 중심 세력이 없었던 건 이승만 하야 후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 그리고 4월혁명에 적극 나서지 않은 농민을 어떻게 설득해 도시 혁명의 한계를 넘어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과 이어져 있다. 그 결과, 이승만 세력과 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민주당이 혁명의 과실을 대부분 차지한다. 서중석 : 민주당 정권이 얼마만큼 4월혁명 정신을 이어받아 수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느냐. 민주당은 (이승만 정권이) 조기 선거를 강행한 탓에 조병옥 후보(가 사망한 후에도 그)에 이어 대통령 후보도 낼 수가 없었다. 장면 부통령 후보가 각지에서 연설할 때마다 그렇게 심한 탄압을 받았는데도 이것에 대해 그다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4월혁명 과정에서) 민주당 지도부가 시위에 나선 건 4월 6일, 딱 한 번이었다. 3월 15일 제1차 마산의거를 처음에 이끈 건 민주당 당원들이다. 그날 광주나 춘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건 지방당원들이다. 중앙당 간부들은 4월 6일 장면을 포함해 딱 한 번 시위를 했는데 이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고 볼 수 없다. 자신들이 정한 구역만 약간 돌고 끝냈다. 그러나 이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이걸 기다리던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학생들이 여기에 적극 편승하면서 시위를 확대했다. 민주당 간부들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했어야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구호도 조심스레 하면서 일정한 범위 안에서 멈췄는데, 기다리던 학생들이 시위를 키운 것이다. 재미난 일이다. 4.19에 시위가 그렇게 크게 일어났는데도 기자나 다른 사람들 중에서 민주당 간부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민주당 간부 몇 명이 아주 걱정스럽게 시위대를 보고 있었다’고 쓴 건 있다. ‘이거 해방 직후에 있었던 혼란, 좌파의 움직임 같은 게 또 일어나는 것 아니냐’ 하는 (민주당 인사들의) 극우적 성향이 그런 식으로 발로된 것이다. ‘4.19 그날 하루에만 100명 넘게 죽는 엄청난 사태가 생겼는데도 민주당은 시위를 방관했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과연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했느냐’, 이런 얘기를 듣는다. 4월 25일과 26일 시위에도 물론 참여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 4월 19일 밤,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 미국 대사에게 ‘장면과 민주당이 이 봉기의 선동자’라고 강변한다. 민주당으로서도 듣기 민망했을 거짓말이다. 민주당은 집권 후에도 혁명 과업 이행에 적극 나서지 않는다. 서중석 : 민주당 정권은 부정 선거 원흉이나 발포 책임자, 부정 축재자, 반민주 행위자를 처단하기 위한 특별법인 혁명 입법을 만드는 데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자기들과 가까웠던 자유당 인사들이 반민주 행위자로 처단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한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당은 이 시기에 우유부단했다. 특히 참의원에서 이것을 아주 심하게 방해하는 행위가 있었고, 민의원도 적극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참의원은 상원, 민의원은 하원에 해당한다. <편집자>). ‘허정 과도 정부가 이승만 정권의 유복자라면 장면 정부는 쌍생아가 아니냐’, 그런 얘기도 듣고 그랬다. 그렇다 하더라도 장면 정권이 여러 가지로 새로운 노력을 한 것 자체는 평가해줘야 한다고 본다. 다만 그 사람들은 큰 변화를 두려워했다. 극우 반공적인 사고가 있었고, 그런 속에서 법치주의나 규범적 민주주의가 지켜지기를 바라는 정도에 머문 것이다. 과거를 (철저히) 청산하려고 한다든가 미래의 새 좌표를 설정해 밀고 나간다든가 하는 건 없이 경제 발전과 경제 건설을 내세우는 수준에 머물렀다. 사실 우리나라 야당은 집권하기 전에도 ‘수권 정당으로서 능력이 있느냐’, 이런 얘기를 들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이나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야당의 존립 자체가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탄압을 받았고 분열 공작에 항상 시달렸다. 그런 점도 있었지만, 정책이나 정보를 정부가 독점해서 야당이 대안적인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예컨대 1950년대 민주당에 대해 ‘이건 하나의 당이라고 볼 수 없고 0.5당, 2분의 1당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그랬다). 그러니 대안 정당 되기가 참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이 민주당 정권에 부담이라고 할까, 어려움으로 작용하게 된다.
탄압에 시달린 진보 세력, 혁명 후 선거에서 참패 프레시안 : 대안 세력 부재 문제는 이승만 집권기에 학살과 ‘빨갱이 사냥’이 거듭된 것과 맞물려 있다. 극우 반공 성향이 아닌 진보적인 세력이 존립하기 어려웠다. 서중석 : 진보 세력의 경우 진보당 탄압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진보당이 결성될 때도 지방당을 만들 때 얼마나 테러가 심했나. 당원들이 난자당하고 그러지 않았나. 어디 한 군데에서도 행사를 제대로 열 수가 없었다. (1957년 7월 17일 단도와 총을 지닌 괴한이 진보당 전남도당 추진위원회 부위원장 조중환의 집에 난입해 조중환을 칼로 찔렀다. 진보당 전남도당 추진위원회 조직부장 임춘호의 집도 습격을 당했다. 임신 7개월이던 임춘호의 부인은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고 임춘호도 자상을 입었다. 다른 지방당 결성 과정에서도 진보당 관계자들은 경찰, 정치 깡패 등의 노골적인 방해와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편집자>) 더군다나 1958년 1월 (조봉암 등에게 간첩죄를 뒤집어씌운) 진보당 사태가 일어나고 이듬해(1959년) 조봉암이 사형대에 올라가면서 혁신계는 평화 통일이란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1958년 5.2선거 때는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작해 선거법을 고치면서 혁신계가 이 선거에 참여하는 걸 막으려고 했다. 진보당 탄압의 직접적인 목표도 이 5.2선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들 얘기한다. 이 선거에는 진보당보다 (진보적 색채가) 훨씬 약했던 민주혁신당(서상일을 비롯한 진보당 이탈파가 중심이 돼 만든 정당. <편집자>)조차 아무도 후보를 내지 못했다. 5.2선거엔 혁신계가 전혀 참여할 수가 없었다. 1959년에 진보당 간부들 중 석방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뭔가 해보자’ 하니까 정부에서는 ‘정부가 해산한 당이 움직이는 건 불법 행위다. 엄단하겠다’, 이렇게 나왔다. 당시 신문에 그런 게 자주 나온다. 조인구 치안국장도 혁신계 움직임에 대해 그런 얘기를 했다. 그렇게 움직이기가 어려웠는데도, (그리고)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아주 심하게 경계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 3∼4월 시위에도 진보 세력, 혁신 세력이 조직적으로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민주당도 참여하지 못했지만 진보 세력도 못했다. 이것에 대해서도 씁쓸한 점이 있다. 프레시안 : 혁신계는 1960년 7.29선거에서 기대를 모았으나 참패했다. 서중석 :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자유를 다시 찾을 수 있었고 민주주의가 다시 현실이 될 수 있는 역사적인 계기를 맞이하지만, 진보 세력이 움직이는 데는 참 한계가 있었다. ‘수염이 허연 노인네와 새로운 젊은이들이 혁신계로 모인다’, 이런 식으로 얘기가 나오고 그랬는데 워낙 고생들을 많이 해서 그런지 ‘현실 인식이 얼마만큼 명료했느냐’, ‘현실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인식을 갖추고 있었느냐’ 하는 점도 논란이 됐다. 그것도 논란이었지만 특히 조직, 더더군다나 자금, 이런 것에 대해선 백지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진보당 간부들이 아니더라도 이때는 대부분이 허름한 방 하나 얻어 살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세끼 밥 먹기조차 어렵고, 이 집 저 집 전전하기도 하던 때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했던 이들 중에도 1950년대, 1960년대에 참 어렵게 생활한 사람이 많다.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이 당시 얼마나 불안하고 힘든 생활을 했나. 감시도 받았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감옥소에도 여러 번 갔다. 정말 힘든 생활을 할 수밖에 없던 때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 세력이 7.29선거 같은 데서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아니냐’ 하는 기대를 일각에서 6월까지만 해도 했는데, 6월 중순 넘으면서부터는 ‘진보 세력은 별로 힘을 못 쓸 거다’, 이게 일반적이었다. (이승만 하야 후) 4월혁명을 구체화하는 데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딸려 있었다. 프레시안 : 진보 세력의 설 자리와 관련해 미국 문제도 중요한 변수다. 서중석 : ‘미국이 진보적인 야당, 과거사 청산을 거침없이 하려고 하고 민족 자주, 국가 자주를 내세우는 정당을 용납했겠는가’, 이런 지적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대학생 사회에서도 그런 면이 있다면 (미국이) 그걸 용납했겠느냐. 혁신계, 또 민족통일연맹(민통련) 같은 진보적 대학생들의 통일 운동 등에 대해 아주 강한 의혹의 시선을 던진 글이 미국 중앙정보국(CIA) 보고서 같은 데 여러 차례 나오고 그러지 않나. 그러면서 CIA가 5.16쿠데타와 일정한 연관을 갖는 걸로 지적하고 그런다. 하여튼 간에 미국이 장면 정부에 대해 그렇게 호감을 갖지 않은 제일 큰 이유가 ‘진보 세력을 탄압하는 능력이 약한 것 아니냐. 진보 세력이 상당히 활동하는 것 아니냐’, 이런 것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가졌기 때문으로 분석들을 하지 않나. 그래서 이 당시 전반에 걸쳐 있던 어떤 제한적 요인들, 특히 한국 사회가 직면했던 어려움, 한국 사회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같은 것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 같다.
이승만 대신 장면 정권 집중 비난한 5.16쿠데타 세력 프레시안 : 이 시기 통일 운동은 북한에 이용당할 소지가 많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서중석 : 통일 운동은 얘기하자면 아주 길다. 당시 혁신계에서 가장 강하고, 유명한 사람이 많이 모여 있던 곳이 통일사회당(통사당)이었다. 1961년 (혁신계에) 네 개의 핵심 정당이 있었는데. 통사당의 경우 상당히 반공적이었고 대북 관계에서 명확한 선을 그었다. ‘북한과 통일 문제를 얘기하려면 그건 김일성이 죽은 다음에나 가능하다’, 이러면서 중립화 통일을 지지했다. 여기서 말하는 중립화 통일은 반공적인 중립화 통일이다. ‘통일 운동 쪽에서 부분적으로 좀 앞서나간 것 아니냐’ 하는 것과 관련해선 당시 장면 정권의 취약성, 그리고 자유당 정권과 경찰이 단죄되는 것들과 관련해 극단적인 보수 세력 일부가 상당히 불안해한 것 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런 (극단적인 일부) 사람들이 ‘저거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데 통일에 대한 급진적이라고 할까 강한 주장이 좀 역할을 했다는 측면은 앞으로 더 많이 논의할 필요가 있겠다. 프레시안 : 4월혁명 시기가 혼란기였다는 주장도 오랫동안 나왔다. 서중석 : 혼란기라는 선입견이 많은 사람에게 딱 들어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박정희 정권 18년간 끊임없이 이 부분을 선전하고 홍보(한 것이 작용)했다. 그때 우리 현대사는 연구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은 부분이다. 사실은 연구하기도 힘들었고 가르치지도 못하게 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도 박정희 정권이 18년 동안 제일 많이, 쉬지 않고 거론한 게 바로 장면 정권 비판이었다. 박정희 개인으로만 보면 (집권 후) 이승만을 거론하면서 직접 비판한 건 찾기가 쉽지 않다. 이건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른바 ‘군사 혁명’을 주장하는 쪽에서 나온 책자 등에서 이승만 정권 또는 이승만 대통령을 아주 부정적으로 보는 건 틀림없다. 박정희 개인도 불만이 많았던 것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승만을 직접 거론해 비판하는 건 찾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장면 쪽은 직접 거론해 비판을 많이 했다. 5.16쿠데타 나고 장면 총리가 구속돼 감옥에서 고생도 많이 하고 그러지 않나. (박정희 쪽에서) 초기에 제일 많이 비판한 것에 부정부패가 들어가 있었다. 장면 정권 쪽에서 나중에 강하게 반발한다. ‘우리 장관급 간부들이 감옥소나 중앙정보부 같은 데서 그렇게 닦달을 당하면서 부정부패에 대해 추궁을 당했지만 부정부패 사실이 나온 게 있느냐. 그 점에선 깨끗했던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반발하는 걸 볼 수 있다. 사실 장면 같은 사람은 부정부패를 저지르라고 해도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부정부패 이건 박정희 정권이 억지로 뒤집어씌우려 그렇게 노력했고 나중에도 ‘(장면 정권은) 부정부패했다’고 말은 하지만, 증거를 찾기가 어려운 거다. 프레시안 : 장면 정권이 파쟁에 휩쓸렸다는 비판도 많이 나왔다. 서중석 : (5.16쿠데타 세력이) 그것도 18년간 굉장히 강조했다. 그건 어느 정도 맞는 측면이 있다. ‘민주당 신·구파 분쟁이 워낙 심해 (구파와 신파의 관계는) 구파와 자유당 온건파의 관계보다 더 나빴다’는 평가가 4.19 이전에, 이승만 정권 때 이미 나올 정도였다. (조병옥과 윤보선 쪽이 구파, 장면 쪽이 신파였다. <편집자>) 장면 쪽과 조병옥 쪽은 보통 사이가 나쁜 게 아니었다. 그건 7.29선거 때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후에도 구파 쪽에서 장면 정권을 심하게 공격하는 게 사실이다. 구파 쪽에선 나중에 (민주당에서 뛰쳐나가) 신민당을 만든다. 그렇지만 세월이 가고 지방 선거도 거치면서, 또 의석수를 계속 늘리면서 장면 정부는 1961년에 들어서면 점점 안정된다. 신민당의 공격에도 이젠 크게 흔들린다고 얘기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면서 여러 경제 정책 등을 집행하려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가는 걸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그 후 박정희는 파쟁 문제를 아주 강조하면서 야당을 무조건 파쟁 세력으로 몰아세우는 측면이 강했다.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유신 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이 파쟁을 갖고 설명을 많이 한다. 특히 장면 정권이 파쟁 정권이라고 그렇게 강하게 이야기한다.
쿠데타는 무능한 정부 탓? 정권 출범 한 달도 안 돼 쿠데타 모의 프레시안 : 장면 정권이 무능했다는 비판도 많이 했다. 서중석 : (5.16쿠데타 세력이) 그 얘기를 18년 동안 쉬지 않고 참 많이 했다. 장면이 그것에 대해 아주 세게 반발한 게 있다. 회고록을 읽어보면, ‘내가 (1960년) 8월 23일 정권을 맡았는데, 김종필을 비롯한 쿠데타 핵심들은 9월 10일 충무장(퇴계로에 있는 일식집)에 모여 쿠데타 모의를 결의하지 않았나. 정권이 들어선 지 한 달도 안 돼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해놓고, 우리가 무능해서 그랬다고 떠드는 게 말이 되나? 너희는 처음부터 권력을 탈취하려 한 자들 아니냐’, 이런 식으로 쓴 걸 볼 수 있다. 사실 장면 정권이 무능했느냐, 민간인 정부는 무능했고 군인 정부는 유능했는가, 이 문제를 따지는 건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장면 정부가 2∼3년만 더 갔어도 따지기가 쉬웠을 텐데, 출범한 지 채 9개월도 안 돼서 무너지지 않았나. 막 일을 하려고 할 때 깨졌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을 봐라. 경제 정책이니 뭐니 1961년, 1962년에 얼마나 죽을 쑤나. 잘못하는 게 얼마나 많이 나오나. 그리고 군인들 내부에서 이른바 ‘반혁명 사건’ 같은 게 얼마나 많이 일어나나. 파쟁이라든가 내분이라든가 무능함은 박정희 정권 초기에도, 1963~1964년까지라고 해도 좋은데, 그야말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경험을 쌓으면서 경제 정책에서도 1964~1965년 가면 변화가 보이지 않나. 수출 정책도 그때 확립되는 것 아닌가. (정권을 운영하려면) 이런 노하우가 있어야 하는 건데 장면 정부엔 그게 없었다. 그래서 장면 정권은 무능한가 하는 문제는 정말 평가하기가 어렵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하여튼 그 부분도 더 연구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수많은 학살 및 의혹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움직임이 4월혁명 후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일각에서는 이것도 혼란의 징후로 받아들인다. 서중석 : 이 시기가 혼란기였느냐. 여러 가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우선 이승만 정권 12년 사이에, 전쟁도 일어났지만, 정부 수립 초기부터 얼마나 많은 의혹 사건이 일어나나. 1949년 6월에 이미 김구 암살 사건이 일어나고 그러지 않나. 그 이전에 (1948년) 여순사건 때 다른 (학살) 사건이 부수돼서 일어나지 않나. 이런 식으로 이승만 정권 12년간 의혹 사건이 참 많았고, 주민 집단 학살 같은 큰 사건도 많이 터지고 그랬다. 그리고 억눌린 상태에서 경찰이나 관리나 특권 세력한테 당한 게 얼마나 많나. 그러니까 4월혁명으로 찾아온 자유 속에서 자기들 목청을 좀 내려고 하고, 의혹 사건이건 집단 학살 사건이건 수많은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운동이 일어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게 안 일어나는 게 참 이상한 사회인 거다. 그런 행위를 저지른 것과 연관된 세력, (그러니까) 과거의 집권 세력, 또 이런 집권 세력과 뜻을 같이했던 세력이 참 많았다. 극우 반공 보수 세력 가운데엔 이런 (진상 규명) 움직임을 굉장히 불안하게, 그걸 혼란으로 보고 ‘저건 척결해야 한다’고 여기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상당히 있었다. 그런 점도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
4월혁명 시기, 혼란기로만 볼 수는 없다 프레시안 : 혼란기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때 시위가 많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서중석 : 주된 혼란 하면 시위를 연상한다. (일각에서) ‘데모 만능 시대다’라고 하는데, 그럼 데모가 언제 제일 많이 일어났느냐. 시위가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건 1960년 4월 27일부터 그해 6월말까지다. (이듬해) 5.16까지 일어난 시위의 대부분이 이때 일어난다. (집계에 따라) 60퍼센트 이상(으로 본 데도 있고), 어떤 데는 80퍼센트라고도 본다. 상인들도 일어나고, 경찰도 시위했다고 한다. 억눌린 사람뿐만 아니라 뭔가 불만 있는 사람, 당한 사람은 다 시위 한 번씩 하려고 했던 거다. 이때 시위의 대종이라고 할까, 제일 많은 부분을 차지한 건 사실 사립 학교였다. 우리나라 사립 학교가 복마전이라고 불리지 않나. 대학이건 중·고등학교건 거의 모든 사립 학교에서 들고일어날 정도였다. 시위 숫자가 늘어난 데에는 이처럼 복마전 같은 사립 학교의 비리, 부정부패 문제도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7월 이후 조금씩 뜸해진다. 그러나 7.29선거에 더해 12월에 가면 네 차례에 걸쳐 거의 완벽한 지방 자치 선거라고 볼 수 있는 선거가 치러지는데, 그 와중에 또 혼란이나 어려움으로 보일 수 있는 게 있긴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체 시위 숫자는 현저히 줄어든다. 1961년 2월에 가면 한 신문에 ‘요새 시위가 안 일어나서 이상한 느낌이 든다’는 글이 실릴 정도로 많이 줄어든다. 그러다 (1961년) 장면 정부가 무너질 것이라는 3~4월 위기설이 돌고 (정부에서) 반공법에다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 당시엔 데모 규제법이라고 불렀는데, 그걸 만들려고 하면서 시위가 또 상당한 규모로 일어났다. 그럼 그건 어떻게 봐야 하는가. 무조건 혼란이라고 볼 수 있는 거냐. 난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고 본다. 2대 악법 반대 투쟁이라고 하는데, 하여튼 그것 때문에 시위가 좀 있었다는 건 틀림없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 세력은 3~4월 위기설을 퍼뜨렸다. 서중석 :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이 시위를 조장하려고 했다. ‘4.19 1주년 때 뭔가 일어날 것이다’ 해가지고 쿠데타 날짜로 그날을 생각했다고 쓰여 있지 않나. 그런 분위기 때문에도 대학생들이 ‘이건 조심해야 한다’며 입에다 반창고를 붙이는 침묵시위로 (4.19 1주년을) 일단은 끝냈다. 학생들도 굉장히 조심했던 것이다. (1961년) 5월에 다시 통일 운동이 일어나면서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 꽤 큰 집회가 있긴 했다. 이런 것들을 어느 시각에서 평가하느냐, 이것이 문제다. 하여튼 시위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한다 하면 (1960년) 6월말까지 제일 많았고, 그 후 잦아들어 1961년 들어서는 1960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줄어들었다. 프레시안 : 장면 정권은 과거사 정리 작업 전반에 대해선 미온적이었지만, 경찰에 대해서만은 달랐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이 때문에 치안력이 약화돼 혼란을 자초했다는 식으로 장면 정권을 겨냥하기도 한다. 서중석 : 장면 정부가 경찰에 대해선 강하게 숙청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았나. 왜냐하면 (경찰은)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의) 도구 아니었나. 3.15 부정 선거를 비롯한 각종 부정 선거에서 제일 도구 노릇을 하지 않았나. 특히 사찰 경찰이 심했다. 그러니까 숙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경찰력이 약화됐기 때문에도 1960년에 시위가 좀 많았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1961년 3월 시위와 4월 시위, 그러니까 2대 악법 반대 투쟁에 관한 당시 기사들을 보면, ‘경찰의 시위 대처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고 보도하고 그랬다. 장면 정권이 새로운 경찰을 기용하면서 시위 대처 능력도 차츰 나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혼란기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로 판단해야 한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18년간 집요하게 무엇을 주장해왔는가, 그로 인한 선입견이 얼마나 깊숙이 우리 몸 안에 파고들어왔는가, 이런 것도 많이 생각해봐야 한다. ※프레시안<2014-05-13>
기사원문: ☞ 결정적 순간, 야당 지도부는 비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