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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188] 허은 선생님께 – 서중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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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백여든 여덟번째 편지 – 2014년 5월 13일      
 

100년 편지

허은
선생님께 -서중석-

 

 표제를 ‘허은선생께’라고
했습니다만, 저의 어머니와 연세도 비슷하고 자애롭게 느껴지는 분이어서 어머니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는 우리 역사 강의 시간에
독립운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을까를 고심했는데, 어머니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읽고서, 언제
어디서 독립운동이 어떻게 벌어졌다, 일본군과 어떻게 싸웠다고 설명하는 것 못지않게 독립운동자들이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고민했는지를 가슴에 닿게
얘기해주는 것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 하면 대개가 남성만 떠올리는데, 그렇다면 여성들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허은
선생님

 어머니의 회고록을 읽은 뒤 저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근대사나 한국사개설 시간에 어머니의 책과 이은숙선생의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이해동선생의 『만주생활 77년』을 읽고서
‘독립운동과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레포트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레포트의 내용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남학생들은 독립운동자들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초점을 맞추어 쓰거나 어려운 조건을 굳굳이 버티며 한시도 다른 마음을 갖지 않고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에게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앞의 세 책에 드러나 있는 생활상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명문거족
이회영의 부인이 1920년대에 국내에 들어와 공장에도 나가 일하고, 유곽의 여자들 옷을 지어주는 일도 해서 남편한테 돈을 부쳐주는 것에
감명받았다는 글도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어려운 생활에 대해서 쓴 학생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최고 어른인 서로군정서 독판 집 손자 며느리로 한끼
해결이 어려웠고, 빗자루 하나 없이 산 세월도 많았다는 어머니의 글에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예전과 달라 제가 레포트를 쓰게
했을 때는 여학생이 수강생의 반이나 되었는데, 대부분의 여학생들 레포트에는 독립운동자 아내들의 결혼생활에 관한 것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김동삼의
큰 며느리 이해동이 시아버지를 세 번밖에 못 보았고, 같은 시기에 김동삼의 부인은 남편을 한번밖에 못 보았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1920년 경신대학살 직후 워낙 위급한 상황이라 양가가 부랴부랴 서둘러 이해동은 ‘시집’을 갔지만 그때는 김동삼을 보지 못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 김동삼이 와 부인 며느리와 함께 이틀 낮 사흘 밤을 지낸 뒤 그림자처럼 사라졌다고 쓰여 있잖아요. 그뒤
며느리는 한 번 더 만날 기회를 가졌고, 마지막으로 1931년에 일제에 체포된 시아버지를, 그리고 함께 체포된 친정 아버지를 하얼빈 영사관에서
만났던 것이지요. 김동삼선생은 옥사하셨으니 그 이후에는 뵐 기회가 없을 수밖에요. 어머니 책에 결혼 직후 남편 이병화가 신흥무관학교에 계속
다니기 위해 합니하에 갔는데, 그리고는 6개월후 잠깐 왔고, 첫 아이 나았을 때 다녀간 뒤, 독립운동 ‘바람’이 들어 6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고 쓰여 있는 것에 대해서도 놀랐다는 거예요. 아마 학생들은 독립운동 ‘바람’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실감하지 못했을
거예요.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김동삼 며느리의 글을 읽고 저도
처음에는 ‘만주의 호랑이’답게 일상 생활에는 초연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했어요. 그렇지만 며느리를 처음 만났을 때 시아버지가 세루치맛감
두 벌과 지폐 50원을 내놓으면서 옷감은 치마를 만들어 나들이 할 때 입고 돈은 너 쓰고 싶은대로 쓰라고 말씀하는 대목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도 “김동삼씨는 자상한 면이 있어서 여가 있으면 할머님(이상룡 부인을 가리킴) 붙들고 자주 말씀 나누었다. 혼인 전 우리 친정에도 몇 번
오셔서 뵌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정말 독립운동 ‘바람’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학생들이 어머니 글이나 다른 두 분
글을 다 읽은 경우는 아주 드물 거예요. 어쩌면 레포트 쓰는데 요긴하다고 생각한 부분만 띄엄띄엄 읽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제 책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을 적당히 읽고 쓴 학생들이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어느 경우든 독립운동자들의 글을 안 읽은 것과는 천지 차이가
나지 않겠느냐고 생각해요.

 저는 망명자 사회, 그러니까
독립운동자들 사회가 항상 독립정신에 충만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말합니다. 더욱이 1910년대에는 국내가 몹시 무기력하고 암울하였기 때문에
서간도 망명자사회에도 불현 듯 절망이라는 몹쓸 병이 엄습하거나, 우리 힘 가지고 저 무지막지한 일제 군인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조악한 식사에 목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지만, 어머니가 잘 기억하고 있는 교가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내여 / 새 나라 세울 이 뉘이뇨”를 목청껏 부르며
기개를 자랑했잖아요. 칼 대신 막대기를 휘둘렀지만, 만주벌판을 누빌 꿈에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들으며.

 저는 지난 2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공주교육대학생들이 임시정부 유적지를 탐방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권유해 따라나선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학생들에게
임시정부의 활동과 의열투쟁을 얘기하면서 그러한 투쟁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전개되었는가에 비중을 두어 설명했습니다. 또 절망이라는 병에
대해서도 언급했고요.

 저는 공주교육대 학생들이 임시정부
발자취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것에 놀랍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또 차 안에서 독립군가를 되풀이해서 여러 차례 목청껏 부르는
것도 귀담아 들었고요.

 저는 교사들이 강연해달라고 부르면
언제나 달려갑니다. 한 사람에게 얘기한 것이 열사람, 백 사람, 천 사람에게 옮겨질 테니까요. 공주교대 학생들에게도 이 말을 몇 번이고
했습니다. 저는 공주교대 학생들이 임시정부 사적지를 둘러보면서, “정말 오기를 잘 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내 인생에 뜻있는
여행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다른 대학생들이 왔더라도 똑같은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많은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현장에 접근하도록 하고, 현장에 대한 증언을 읽을 수 있게끔 하여야 우리의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이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때 그 사회에 미래가 열릴 터이니까요.

 저는 강의시간에 후방기지라는 말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은 다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나치와 싸우다 죽으면 동네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그 시신과 가족을
돌봐주는데, 우리는 그러한 후방기지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얘기하지요. 어머니는 석주 선생이 돌아가신 후 국내에 들어왔을 때 느낀 심정을 이렇게
쓰셨지요.

 “압록강을 건너 서울역에 떨어졌을
때의 우리들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외모도 초라하기 그지 없었지만, 마음이 더 춥고 떨렸다. 그렇게 이역만리 남의 땅에서 고국을 위해 애쓰고
투신했건만, 귀환동포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손길은 없었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제가 강의시간이건 강연에서건 자주
얘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해방후 독립운동 집안과 친일파들 자손들의 삶에 대해서인데요. 그 부분에 대해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인용하는 것을 끝으로
이 글을 마치려 합니다.

 “그때 친일한 사람들의 후손은
호의호식하며 좋은 학교에서 최신식 공부도 많이 했더라. 그들은 일본 · 미국 등에서 외국유학을 하는 특권을 많이 누리고. 그러니 그들은 훌륭하게
성공할 수밖에. 그러나 우리같이 쫓겨다니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위기를 넘긴 사람들은 자손들의 교육 같은 것 생각지도 못했다. 목숨을 항상 내놓고
다녔으니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 애 어른 없이 그 허허벌판 황야에 묻힌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데”

 

                                                                     

 서중석

 

 前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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