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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초상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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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일제 강점기 때 네 곳에 있던 초상화 국외반출·행방불명으로 사라져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나라에는 네 곳 이상의 이순신 장군 사당에 오래된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볼 때 통영 제승당과 여수 충민사, 아산 현충사, 여수 장군 영당에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온 이순신 장군 초상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 초상화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모두 사라졌다. 현존하는 이순신 장군 초상화는 일제시대 이후 유명 화가들이 자료를 참고해 그렸거나 아니면 오래됐지만 출처가 불분명한 초상화 한 점(동아대 박물관 소장)뿐이다. 그리고 사라진 초상화의 사진이 겨우 존재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없어진 이순신 전래 초상화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여수 장군 영당(해신당)에 전해 내려왔던 이순신 장군 초상화는 <한국문화택리지 전남 동부>에 의하면 1943년 당시 여수경찰서 김차봉 형사부장이 가져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내고장의 문화재(영당편)>에도 이 내용이 나오고 있다. 일제가 장군 영당을 훼손할 때 두 개의 초상화는 소각되고 두 개의 초상화만 개인이 빼돌렸다. 김차봉 형사부장이 가져간 이순신 초상화의 행방은 이때부터 묘연해졌다.
 
기록에 의하면 1960년대에 문교부에서 이순신 진영을 통일할 때 이 초상화가 가장 적합하다고 결정했다. 당시 제주시장이었던 김차봉 시장에게 연락해 확인했으나 골동품점에 매각했다고 한다. 이 기록들을 발굴 확인한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나 친일인명사전에 보면 김차봉이란 이름이 등장한다”면서 “해방 후 고향이었던 제주도로 가서 경찰 간부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김차봉 전 시장은 이후 1960년과 1961년 제3대와 제4대 제주시장으로 재임했다.

김차봉 전 시장이 가져간 장군 영당의 초상화는 어떤 것일까. 1927 4 14일 동아일보 기사에 ‘차당(此堂)은 최영·이순신·정운·이대원 사위(四位)의 초상을 봉안하였는데’라는 초상화 기록이 나온다. 1931 6 2일 동아일보에 실린 춘원 이광수의 답사기에도 영당에 있는 초상화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왼쪽) 황의돈의 <증정중등조선역사>라는 교과서에 실린 여수 충민사 초상화 사진. 조선일보 1929년 사진에 나타난 초상화와 동일하다. (가운데) 1920년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실린 통영 제승당 초상화(모사품). 이때 벌써 전래 초상화는 없어지고 원 초상화를 모사한 작품이 걸려 있었다고 기록됐다. (오른쪽) 동아대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이순신 장군 초상화. 출처와 제작연대가 불분명하다.

 

일본이 장군 영당 훼손, 초상화 소각
여수군수 오횡묵(吳宖默)의 ‘영당치제문’에 의하면 “당머리에 이 충무공의 영정과 여러 장수들의 영정을 모셔놓았다. 임진란 후에 당()을 앞바다에다 세워놓으니 지나는 배들이 축원하고 갔다”고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 직후에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가 모셔졌음을 추측할 수 있는 기록이다. 박 연구가는 “임진왜란 직후에 모셔졌다는 구전이 있는 초상화라는 점이나 1960년쯤 문교부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 초상화를 표준 영정으로 할 것을 결정하려 했다는 전언으로 볼 때 이 초상화가 이순신 장군의 모습과 가장 가까울 것으로 추측된다”고 설명했다. 장군 영당 건물은 1975년 여수 국동 어항단지 조성사업으로 없어졌다.

통영 한산도 제승당에 존재했던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는 1920년대 당시 이미 없어진 것으로 드러나 있다. 1928 4 28일자 조선일보에는 한산도 제승당에 봉안된 진영은 ‘모국 사람’이 가져가고 남아 있는 그림은 모사한 그림으로 잘 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모국 사람’은 외국인으로 일본인 혹은 서양인을 말한다. 1928 7 5일 동아일보 사진에도 조선일보 사진과 동일한 초상화가 나온다. 이 두 사진은 조선일보에 언급한 대로 본래 진영의 모사품이다. 1958년 발간된 김용모의 <충무공유적사진첩>에는 제승당에서 1606년부터 충무공 영정을 모셔왔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1920년대 당시 이 영정과는 다른 모사품이 있었고, 현재 제승당에는 1978년부터 정형모 화백이 그린 초상화가 걸려 있다.

여수 충민사에서도 일제 강점기까지는 이순신 장군의 전래 초상화가 존재했다. 조선일보 1929 4 17일 기사에는 충민사 영정의 사진이 등장한다. 사진 설명에는 “이 사진은 공이 임진년 당시까시 계시던 전라좌수영인 여수군 마래산 밑에 있는 충민사에 봉안한 영정을 찍은 것”이라고 적혀 있다. 충민사는 <전라도 여수읍지>에 의하면 ‘본영의 교리(
校吏) 박대복(朴大福)이 충무공께 7년 동안이나 종사하다가 전쟁이 평정된 뒤에 공의 충절에 감격하여 두어 간 사당집을 세웠다’고 한다

1601
년에는 오성 이항복이 왕명을 받아 사당을 세울 것을 의논하였고 통제사 이시언이 그 일을 맡았다. <여수읍지>에는 이순신 장군과 같은 배를 탔던 승군 출신의 옥형 스님 일화가 적혀 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 충민사 사당 곁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비록 일화이긴 하지만 이런 기록을 보았을 때 충민사에 있던 초상화는 이순신 장군의 실제 모습과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영정은 일제 강점기 이후 모습이 사라졌다. 국가 사적 381호로 지정된 충민사에는 현재 표준 영정인 장우성 화백의 그림이 걸려 있다.

현충사 현 초상화는 장우성 화백 그림
지난해 <주간경향>에서 처음 공개한 이순신 장군 초상화 사진은 1929년 조선일보의 여수 충민사 영정 사진과 동일한 초상화를 찍었다. 황의돈의 <증정중등조선역사>라는 교과서에는 여수 충렬사에 있는 초상화라는 설명이 있다. 여수 충렬사는 충민사의 오기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에 아산 현충사에 있었다는 전래 초상화도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1929년 조선일보 사진 설명에서 충민사 영정이 아산 현충사 봉안 영정과 비교해보니 틀린 바 없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아산 현충사의 초상화는 일제 때 유명 화가들이 이순신 장군 초상화를 그리는 데 하나의 근거 자료가 됐다. 1931 5 22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정제 최우석 화백은 ‘아산 충무공 산소의 영정과 통영 제승당의 영정을 본 뒤’ 이순신 장군 초상화를 그렸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에는 이상범 화백이
삽화를 그렸다. 이 화백은 통영·여수·아산을 돌며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를 둘러봤다. 이 화백은 <삼천리> 1934 8월호에서 “그 선영의 땅인 배아미골에 이르러 붓으로 그려져 수백년 전해 내려온 초상화를 보고 다소 참고하였지만, 요컨대 이순신은 순전히 내 머릿속에서 빚어낸 얼굴이었다”고 말했다.

이상범 화백과 최우석 화백이 본 현충사 초상화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범 화백이 그린 이순신 초상화 한 점은 1932년 현충사에 모셔졌다. 현충사에는 현재 표준 영정인 장우성 화백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는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직후부터 민간에서 그려 전해 내려오던 초상화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국외 반출 및 국내 행방불명으로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How are you? 이순신」이라는 책을 쓴 혜문 스님은 “일제 강점기 때 이순신 장군에 관한 유물이 많이 없어졌다”면서 “초상화 역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의도적으로 훼손됐다”고 말했다.

전래 이순신 장군 초상화는 크게 문관풍과 무관풍으로 나뉜다. 박종평 연구가는 “여수 충민사와 아산 현충사처럼 문관 복장의 초상화가 있고, 통영 제승당의 초상화나 여수 장군 영당의 초상화는 이순신 장군을 무관으로 그려놓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혜문 스님은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는 무관 스타일로 그려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 <2014.06.03> 주간경향 1078

☞기사원문: [사회]이순신 장군 초상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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