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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홍범도 장군 유해, 언제까지 이역에 방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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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전투가 없었다면 우리 독립운동사는 몹시 빈약했을 것이고 한민족의 패기와 의기는 그만큼 취약하게 보였을 것이다. 3대첩이 있었기에 부끄러운 식민지시대를 씻을 수 있고 당당한 민족의 상무정신을 이으면서 향후 어떤 외적의 침략에도 맞설 수 있는 국민적 결기를 갖게 되었다. 대첩은 국치를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병전쟁의 결실이고 이후 항일무장전쟁과 의열투쟁의 시발점이었다. 중국정부와 인민들에게도 정신적, 전략적 교훈을 주었다.

67일은 봉오동전투 74주년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재군비의 칼날을 품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추진하면서 동북아의 풍랑이 거세지고, 국내적으로는 역사왜곡 등 친일잔재들의 권력화가 갈수록 강화된다. 봉오동전투를 비롯하여 치열했던 항일투쟁은 묻혀지고 독립군에게 총질했던 일본군 출신들이 영웅으로 추앙되는 가치전도의 세상이 되었다.

홍범도와 최진동이 지휘하는 독립군부대는 1920 67일 새벽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한 봉오동에서 일본정규군 야스가와 부대와 니히미 중대를 격파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앞서 64일에는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하여 격파시켰다.

봉오동대첩과 관련 임시정부기관지독립신문은 일본군 전사 157,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 아군 전사 4, 중상 2명의 경미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신문상해시보는 일본군이 독립군에 대패하여 150여명의 전사자와 수백명의 부상자를 내고, 독립군은 160정의 소총과 3정의 기관총을 노획했다고 보도했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의 지휘하에 그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이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라는 대규모 독립군 연합부대를 편성하고 신민단의 소부대도 합세하여 봉오동 골짜기에서 정예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한 대첩이었다.

일본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최신 화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독립군이 대첩을 이루게 된 것은 홍범도 장군 등 지휘관들의 지리적 요지를 활용한 치밀한 작전계획과 일선 병사들의 충천하는 사기에 힘입은 바 컸다. 봉오동전투는 4개월 뒤 청산리대첩을 가져오게 하는 독립군의 사기진작에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다. 3대첩을 비롯하여 이후 만주의 무장부대들 그리고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등 연연한 무장투쟁은 1911년 창설하여 10년간 3500여명의 군관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항일무장투쟁의 전선에서 꽃잎처럼 산화한 수많은 독립군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고, 역사는 이들을 잊었다.

그런가 하면 부인과 두 아들까지 항일전에서 잃고,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장투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지금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황량한 묘소에서 망향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서거 70주년이던 지난해 1025일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회장 이종찬)는 해방 후 처음으로 현지에서 조촐한 추모제를 지내고 위령하였다.

필자는 졸저 <빨치산대장 홍범도평전>을 영전에 헌정하면서, 장군의 유해를 언제까지 천만리 먼 이역에 방치할 것인가, 북한이 평양 출신이란 연고권을 주장한다면 이 기회에 남북이 공동으로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봉환하는 길이 없겠는가를 생각하였다. 봉환된 유해가 남쪽이면 어떻고 북쪽이면 어떤가. 장군의 고국이면 될 것 아닌가. 내년이면 해방 70주년을 맞게 되는 우리나라가 독립군 대장의 혼령은 이역을 헤매고 일본군 장교들은 생시나 사후에나 호사한다면, 내일의 주인공이 될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애국심과 정의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 답을 묻는다.

<김삼웅 | 전 독립기념관장>

경향신문<2014-06-04>

기사원문: [기고]홍범도 장군 유해, 언제까지 이역에 방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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