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상의 역사산책 42]조선독립을 둘러싼 경성제대 교수들의 엇갈린
행보
◈ 아직도 총독부 아래에 있는 경성제대의 후신 ‘서울대 국사학과‘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있다가 연세대로 자리를 옮긴 민족사학자
김용섭 교수가 최근에 회고록을 펴냈다.
이 회고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분명치는 않은데 민족주의 역사학인가, 실증주의 역사학인가를 강의하는 시간
같은데, 교학부장 고윤석 교수를 포함한 네댓 명의 중년. 노년
교수가 내방했다. 노크를 하길래 문을 열었더니, 김원룡 교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제 때 경성제국대학에서 내가 배운 스에마끼 야스카즈 선생님인데, 김선생 강의를 참관하기 위해 모시고 왔어요. 김선생, 되겠지?” 하는 겁니다.
스에마끼 야스카즈가 누구인가?
그는 “고대부터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황국사관의 선봉장이었다.
그는 대표작 <임나흥망사>에서 “일본의 한반도 영유(임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일본의 자랑이며, 구한말 일본에 의한 조선 병합은 고대의 복현이다“라고 주장하고
다녔다.
이런 인물을 김원룡은 하늘처럼 떠받들며 충성을 다했다.
경성제대에서 스에마끼 야스카즈로부터 일제 식민사학을 전수한 김원룡은 그런 사관에 입각해 ‘원삼국시대설‘ 등 해괴한 학설을 주장하고 다녔다. 이런 인물이 ‘고고학계의 태두‘라고 불리며 서울대 고고미술과 교수, 대학원장을 지내고 역사학회 회장, 한국고고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한다.
회고록에는 또 동료였던 김철준 교수가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아“라고
얘기하는 장면과 “이병도 선생에 대해 무슨 글을 그렇게 써!”하고
질책하는 얘기도 나온다.
자기들의 스승인 대표적인 친일사학자 이병도의 제자다운 처신이다.
한우근 교수는 여러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김
선생~ 우리 민족사학 그만 하자“고 조롱하는 소리까지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급기야는 황국사관의 영수까지 모시고 와서 수업을 지켜보겠다는 것을 김용섭 교수는 ‘나가달라는 은밀한 압박‘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김용섭 교수는 “여기 서울대 국사학과는
아직도 총독부 아래에 있구나“라는 생각을 갖고 서울대를 떠난다.
◈ 쓰다 소키치 등의 황국사관~이병도 등의 식민사학~서울대 국사학과~문창극
“하나님이 이 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다”
“식민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이조 5백년을 허송세월로 보낸 민족이어서 시련을 준 것이다“
“8.15 해방은 어느날 갑자기 뜻밖에 하나님께서 해방을 준 것이며, 미국한테 일본이 패배해 우리한테 거저 해방을 갖다 준 것이다“
“일본으로부터의 기술 이전을 보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이웃인 건 축복이다“
“일제 식민지배에 이은 남북 분단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우리 체질로 봤을 때 한국한테 온전한 독립을 주셨으면 우리는 공산화될
수 밖에 없었다”
“구한말 우리 민족성을 보면,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는 게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다“
이 발언은 황국사관에 젖은 일본인 학자나, 이병도
같은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친일 사학자의 주장이 아니다. 나라를 되찾고 건국한 후 70년이 다 되가는 시기에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후보자가 공개석상에서 내놓은 발언이다.
일제는 1927년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인은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고 끊임없이
세뇌시켜왔다. 그리고 일제의 이같은 세뇌작업은 문창극을 통해 다시 한반도에서 부활하고 있다.
지하에 있는 친일사학자의 정신적 기둥 ‘쓰다 소키치‘가 들으면 “드디어 우리가 해냈다“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쓰다 소키치나 스에마끼 야스카즈 등 황국사학을 신봉한
일본인 학자들이 전파한 식민사관의 핵심은 3가지다.
1.’일선동조론‘으로, 일본 민족의 조상과 한민족의 조상은 애초에 하나였으니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
2.’만선사관‘으로 한반도는 대륙에서
실패한 정치 세력이 옮겨 자리잡은 곳으로 만주와 하나로 묶어야만 역사나 문화가 체계화된다.
3.’정체성론‘으로 한반도는 발전이
정체돼 있었고, 일본 때문에 고대적인 것에서 근대적인 것으로 도약했다.
문창극의 주장은 정확하게 세번째 논리와 일치한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한반도에 남겨놓고 떠난 ‘식민사관의
망령‘이 이제 대한민국 ‘일인지하 만인지상‘ 권력자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 경성제국대학의 양심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 조선독립을 도와주다
1934년 5월 21일 서대문경찰서.
이 곳에 끌려온 경성제대 법문학부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는 공산주의 조직과의 관련과 이재유의
행방을 대라는 일경의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재유는 당시 조선 최대의 공산주의 지하조직인 ‘경성트로이카‘의 지도자로,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됐다가 탈출에 성공해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를 잡기 위해 500원의 현상금이 걸리고, 경성 시내 5개 경찰서가 비상근무 중이었다.
고초를 겪던 미야케 교수는 “하루만 시간을
주면 다 자백하겠다“고 토로했다.
일경은 일단 조사를 중단했다.
한편, 미야케
교수의 동숭동 관사의 다다미방 아래에 토굴을 파서 숨어있던 이재유는 미야케가 경찰에 연행되고 가택수색을 하는 소리를 들으며 숨어 있었다.
일본 경찰이 철수하자 조용히 토굴에서 나와 짐을 챙긴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하루가 지난 후 미야케 교수는 경찰에게 자백했다.
24시간이면 이재유가 충분히 잠적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 집에 이재유가 숨어 있습니다“
놀란 경찰이 관사를 덥쳤지만 이재유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재유를 놓친 경찰은 미야케를 두둘겨 패며 분노를 쏟아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상태였다.
이 사건은 일제의 보도통제로 기사화하지 못하다가 1년
후인 1935년 8월 24일에야
조선은 물론 일본의 각 신문에 보도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조선인들은 경찰서를 탈출한 이재유가 숨어있던 곳이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의 집이었다는 사실에 ‘독립운동 사상 초유의 일‘이라며 흥분했다.
더 충격을 받은 건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의 수뇌부였다.
“대일본제국의 최고 엘리트가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다니…”
미야케 교수는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다녀온 후 경성제대 경제학부 교수로
부임한 일본 최고의 마르크스 경제학의 권위자였다.
그가 수감되고 교수직에서 쫒겨나자 관사를 나온 아내는 헌책방을 차린후 출소 때까지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미야케 교수는 일제가 망할 때까지 강단에 서지 못하다가
8.15 해방 후 다시 일본의 대학에 들어갔다.
미야케 교수가 투옥되고 바로 일본에 돌아간 후에도 그가 키운 제자들은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벌였다.
조선 최고의 국문학자 김태준을 비롯해 이강국, 정태식, 최용달, 박문규 등 기라성같은 제자들은 변절하지 않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여나갔다.
식민지 지배 36년간 한민족의 정신을 좀먹은 수많은
일본인 황국사관 학자들도 있었지만, 음으로 양으로 조선 독립을 도와준 일본인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2014-06-13> 노컷뉴스
☞ 기사원문: “독립 능력 없어”…문창극 통해 부활한 日 세뇌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