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부의 반헌법적 역사관이 심히 우려됩니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사퇴를 촉구하는 한국사 원로학자들이 국민에게 드리는 글
1.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국회의 동의를 거쳐야 하는 요직인 만큼, 투철한 역사관·민족관·국가관에 기초하여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고 지역·이념·세대·계층 간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통합형 인물이 선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창극 후보자는, 그간의 발언을 종합해 볼 때, 역사관과 민족관, 국가관에 커다란 흠결이 있는 인물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정부와 여당은 문 후보자를 ‘국민이 본받을 만한 애국자’로 치켜세우고 총리 인준절차를 강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금의 현실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며, 문 후보자의 역사관과 민족관, 국가관의 문제점들을 국민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2. 문 후보자는 전통문화를 폄하하는 사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문 후보자는 ‘조선민족의 상징은 게으름’이라며, ‘조선이 5백년을 허송세월 보냈으니, 일제식민 지배를 통한 하느님의 시련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조선인은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는 게 DNA로 남아 있다는 문 후보자의 발언은 조선시대를 미개한 것으로 파악하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입니다.
3.1운동 직후, 일제는 식민지배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 문화의 독창성과 자주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일제는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한국사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왜곡하였는데, 식민통치의 바로 앞 시기인 조선시대에 대한 왜곡이 특히 심했습니다. 일제는 식민지배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도출해 내기 위해, ‘조선은 자주성 결여와 분열을 특징으로 하는 민족성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조선민족에 대해 모멸감과 자괴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 후보자 역시 식민사관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 후보자의 주장대로라면 조선은 건국 즉시 망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한 왕조가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500년 동안이나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조선이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 지속되었던 이유는 문화적, 정신적 가치를 바탕으로 도덕적인 힘으로 지배하는 문치주의를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문치사회는 강제나 폭력이 아닌 대화를 통한 소통과 합의, 소수의견 존중, 그리고 높은 수준의 교육의 힘에 의해 유지됩니다. 이것이 일본역사와 다른 조선역사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조선은 일관되게 문치(文治)사회를 유지하였습니다. 헌법은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제9조)라고 하였습니다. 문 후보자와 같이 식민사관에 사로잡힌 사람이 국무총리가 된다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족문화가 창달될 수 없습니다.
3. 문 후보자는 ‘일제의 식민지배는 하나님 뜻’이며 ‘8·15해방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미국한테 일본이 패배했기 때문에 우리한테 거저 해방을 갖다 준 거다’라고 발언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을 독립운동세력이 전취(戰取)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미국이 거저 주었다는 ‘타율적해방론’은 우리를 무척 당혹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문 후보자의 주장은 독립운동을 모독하는 망언입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오로지 민족의 독립 하나만을 염원하며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줄기차게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면 연합국이 독립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항일 민족독립운동의 역사적 경험이 해방 직후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운동으로 분출된 건국준비위원회와 같은 건국활동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3.1운동의 독립정신과 4월혁명의 민주정신을 국가정체성으로 선언합니다. 그 동안 헌법이 9차례 개정되었지만, ‘대한민국이 3·1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건립되었다’는 전문 내용이 부정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독립운동의 전통은 손상된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국가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소환해야 할 기억의 창고이기 때문입니다. 해방이 거저 되었다는 문 후보자가 국무총리가 된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제와 맞서 싸운 위대한 독립정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4. 문 후보자는 ‘일본으로부터 위안부 문제를 사과 받을 필요가 없다’ ‘이미 끝난 배상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 것이 당당한 외교’라면서 배상요구를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1965년 한·일협정을 거론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배상요구를 ‘떼쓰기’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식민지배의 야만성과 폭력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일제가 정신대 명목으로 젊은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성노예)로 끌고 가는 반인도적 전쟁범죄행위를 저지른 이상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피해 배상을 요구하며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시위’가,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처음 시작한 이래, 지난주까지 무려 22년간에 걸쳐 1,130차례나 열렸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한국정부의 공식입장은, 일본정부·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으며, 일본정부에 대해 법적책임 인정 등 지속적인 책임 추궁을 하는 한편, UN인권위 등 국제기구를 통해서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한다는 것입니다.
2011년 8월 헌법재판소도 ‘권력의 국민에 대한 기본권 보호 의무가 헌법상 요구되는 법적 작위(作爲) 의무가 될 수 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것은 ‘위헌’, 즉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이듬해에는 대법원에서도 ‘강제동원·강제노동 등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라고 판결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강제동원·강제노동 피해자들의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소송을 통한 권리구제가 가능해졌습니다.
이처럼 피해당사자와 정부 그리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모두,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양립할 수 없다는 데 입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문 후보자의 발언은 정부의 공식견해 등 기본적인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나온 것으로, 피해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입니다. 이는 문 후보자가 헌법의 이념 및 가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앞장서서 노력할 책임이 있는 국무총리로 결코 적합한 인물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5. 문 후보자는 ‘남북분단도 6.25전쟁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통일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 질 것이므로 남북 간의 협상도 대화도 필요 없게 됩니다. 이는 대립과 갈등을 전제로 하는 냉전적 사고에서 나온 분단고착화 주장이며 흡수통일론입니다. 대한민국은 7.4남북공동선언 직후에 마련된 유신헌법에서 평화통일의 책무를 민족의 지상과제로서 헌법상 의무화하였습니다. 남북한의 통일은 평화주의에 기초한 통일이어야 한다는 평화통일의 원칙이 대한민국 통일의 기본원칙입니다.
그는 제주4·3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사태’라고 주장함으로써, 반공주의 역사관을 드러냈습니다. 정부는 진상조사를 통해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을 살상하는 등 중대한 인권유린과 과오가 있었다.’고 4.3의 실체적 진실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어 대통령이 제주도를 방문하여 제주도민과 유족에게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하였으며,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올해부터는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였습니다. 문 후보자의 발언은 4.3의 본질을 국가폭력에서 반공이라는 이념갈등으로 변질시킴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고, 주민집단학살(genocide)이라는 반인륜적 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것입니다.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 공존과 불가침이라는 시대적인 흐름에 발맞추어 평화체제구축이 필요한 현시점에서, 문 후보자와 같이 수구 냉전적 사고를 가진 극단적 반공주주의자가 국무총리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6. 작년에 박근혜정부는 국사편찬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을 비롯해 역사 관련 주요 기관의 수장에 친일·독재를 미화하는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을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사 교과서 검정파동을 야기하여 부실검정과 편파심의로 헌법이 부여한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식민사관에 사로잡혀 전통문화를 폄훼하고, 독립운동을 부정하며, 반인도적 범죄행위를 옹호하고, 남북 간의 대립갈등을 부추기는 수구냉전적인 극우인사를 총리에 앉히려 하고 있습니다. 교육부장관도, 친일·독재를 미화한 교학사 교과서를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교학사 교과서를 반대한 한국사학계에 대해서는 낡은 색깔론을 내세워 좌파라고 공격한 인물을 내정하였습니다. 친일·독재를 거부한 국민에 대해 ‘국가적 수치’라는 모욕적인 발언을 늘어놓고,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한국사학계 구성원 다수에 대해 ‘이념 투쟁’ 운운 하는 비교육적 언사를 늘어놓는 사람은 대한민국의 교육을 책임질 자격이 없습니다. 김명수 교육부장관 내정자는 역사를 국가권력의 이데올로기 통제수단으로 삼기 위해 한국사교과서를 국정제로 전환하자고 주장하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입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국정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북한 등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7. 박근혜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겠다고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은 국민과의 약속대로 대한민국의 최고규범인 헌법의 규정과 정신에 입각하여 국정운영을 해야 합니다. 국민과의 약속과는 달리, 박대통령은 반 헌법적인 역사관을 지닌 문 지명자 임명동의안과 인사청문요청서를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문 후보자와 같이 반 헌법적인 역사관을 지닌 인물이 총리로 임명된다면 후세의 역사가들은 박근혜정부 2기내각을 ‘친일·극우내각’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주권자인 국민 여러분들이 나서서 문 후보자의 총리 임명을 막아주실 것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2014년 6월 18일
강만길(前 고려대학교 교수), 김삼웅(前 독립기념관 관장), 김태영(前 경희대 교수), 박현서(前 한양대학교 교수), 서중석(前 성균관대학교 교수), 성대경(前 성균관대학교 교수), 신해순(前 성균관대 교수), 유승원(前 가톨릭대 교수), 윤경로(前 한성대학교 교수), 이만열(前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이병휴(前 경북대학교 교수), 이이화(前 서원대학교 석좌교수), 이장희(前 성균관대학교 교수),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전형택(前 전남대학교 교수), 조광(前 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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