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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입국’…문창극이 모독한 ‘엄비’의 조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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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46] 당찬 여인 ‘엄비’, 조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순헌황귀비 엄씨. 못 생기고 뚱뚱했지만 두뇌가 뛰어나고 지략을 갖춰 고종 황제가 크게 신임했다.



◈ 문창극이 악의적으로 비난한 엄비, 당대의 여걸이자 백년대계를 내다봤다

문창극 국무총리 지명자의 강연 일부를 들어보자

“제가 책을 읽어보니까 그 당시 민비라는 사람 죽고 나서 엄비인가 하는 사람이 대신했는데, 얼마나 나라에 대해 무책임하냐 하면 일본한테 나라를 팔아 먹어도 좋다, 일본이 우리를 합병해도 좋다, 단 우리 왕실, 그러니까 이씨 왕실만 살려달라, 그게 조건이었어요.
이거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 나라가 없어지는 거에요.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지면 조선의 국왕이라는 것, 조선의 대신이라는 것 다 없어지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거야.
그리고 일본에게 나라, 조선을 너희들한테 바칠테니 이씨 왕조만 살려달라, 그러면 나라를 다 너희들한테 갖다 바치겠다.
그래서 갖다 바친 거에요”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엄비가 아니라 문창극이다. 엄비(대한제국 출범 후 ‘황귀비’로 책정)의 인생 역정을 대강 아는 사람이라면 문창극의 주장이 궤변이라는 걸 알 것이다. 그가 쓰는 용어(이씨 왕조, 민비 등)는 전부 황국사관에 젖은 일본인들이 지은 용어이고, 그가 공개적으로 모독한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 황귀비 엄씨에 대한 거친 비난은 다 일본인들이 퍼뜨린 소설로 추정된다.

엄비는 조선과 조선인, 나라의 중심인 고종 황제, 그리고 미래의 새 싹인 소녀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러나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조선과 유일한 아들 영친왕을 일본에게 모두 뺏기고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 엄비, 일본군에 의해 유폐된 고종을 구출해 러시아 영사관으로 피신하다




아관파천의 무대 러시아 영사관. 가장 꼭대기에 있는 영사관 건물에서 고종은 국사를 처리했다.



1895년 10월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왕비가 비극적으로 살해되고 궁궐이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자, 고종은 엄 상궁을 불러들였다. 당시 일본이 세운 친일 내각은 고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어 사실상 연금상태에 놓여 있었다. 수라마저 믿을 수 없어 궁궐 바깥에 사는 왕족들이 보내는 자물쇠를 채운 음식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밤에는 매일 두세 명의 외국인을 불러 자기 옆에 같이 있도록 했다. 고종의 은밀한 지시를 받은 엄 상궁은 러시아 영사관과 친러파, 친미파와 은밀하게 연락하면서 거사를 도모했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심복 궁녀 한 명과 분담해 가마 두 채를 타고 궁궐을 출퇴근했다.

경비병들은 이 장면에 익숙해지자 어느 순간부터 감시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896년 2월 11일 밤, 왕과 세자는 호위병도 없이 여자용 가마를 타고 곧장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 중인 고종. 가운데 창가에 있는 세 사람 중 가운데가 고종이고, 왼쪽 창가에 서있는 소년이 왕세자이다.


대궐 안에 있던 일본군과 친일 내각이 이 사실을 안 것은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고종은 자신이 신임하는 관리들을 불러 새로운 내각을 조각했다. 왕비마저 없는 고종 옆에는 이번 일을 성사시킨 엄 상궁이 죽는 날까지 자리를 지켰다. 왕이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일본군과 친일 내각에 포위되어 목숨마저 부지하기 어려운 경복궁에서의 탈출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고종이 주도한 ‘아관파천’은 청나라를 격파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인 고도의 책략이었다. 마치 태국이 영국과 프랑스가 팽팽히 맞서던 시기에 외교로 독립을 지킨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 엄 상궁, 황태자를 출산하고 황귀비로 책정되다



대한민국 황실의 초상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년 후 러시아 영사관에서 나와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서거한 왕비 민씨(‘민비’란 호칭은 사용된 적이 없다)는 ‘명성황후’로 추존된다. 이 해에 엄 상궁은 44살의 나이에 황태자를 낳아 ‘황귀비’로 책봉된다.




영친왕 이은(오른쪽)과 이토 히로부미



이 때부터 사실상의 황후이자 국모의 자리로 올라선다. 이 아기가 후에 순종이 등극한 후 마지막 황태자로 책봉된 영친왕이다. 그러나 영친왕은 황태자가 되자마자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11살의 나이에 도쿄로 끌려간다. 사실상 볼모의 신세였다. 자식이 끌려가자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엄 귀비와 고종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는 해마다 방학 때마다 영친왕을 조선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 엄 귀비, 실의를 딛고 육영사업에 몰두하다

자식을 뺏긴 슬픔 속에서도 엄 귀비는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녀는 “이제 조선은 여성들의 문맹 탈출과 교육에 신경써야 한다”는 선교사들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국운을 회복하려면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엄 귀비는 사재를 털어 1905년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1906년에는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와 명신여학교(현 숙명여대)를 설립하는데 후원했다.




숙명여대의 본관건물인 ‘순헌관’. ‘순헌’은 엄 귀비의 시호(생전의 공덕을 기려 붙인 이름)이다.


(사진=숙명여대 제공)


엄 귀비는 또 영친왕의 보모인 최송설당의 건의를 받아 들여 김천고등학교를 세우는데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들을 그리워하던 엄 귀비는 끝내 얼굴을 못 보고 1911년 7월 20일 58세의 나이로 서거한다.




귀비의 장례식 풍경. 조선을 너무나 사랑했던 것을 알고 있는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진=살림출판사 제공)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영친왕은 급거 귀국하지만, 일제는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이유로 접근을 막아 끝내 마지막 얼굴도 볼 수 없었다. 홍릉 경역으로 장지를 정하고 서거한 지 열흘 뒤인 8월 2일 엄 귀비의 상여가 대궐을 출발하자, 고종 황제와 영친왕은 영성문 밖에서 곡을 했다. 그날 오시에 하관을 한 엄 귀비는 영휘원에 잠들게 되고, 장례를 마치고 사흘 후 영친왕은 일본의 재촉을 받아 다시 도쿄로 떠난다.





영휘원 안에 있는 엄 귀비의 무덤.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세운 학교의 학생들이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이끌게 된다. (사진=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그는 거기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일본 귀족의 딸과 정략 결혼을 하게 된다. 엄 귀비의 인생 어디를 들여다 보아도 문창극의 악의에 찬 주장처럼 ‘왕실을 살리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이야기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노컷뉴스 <2014-06-20>


기사원문: ‘교육입국’…문창극이 모독한 ‘엄비’의 조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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