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총장, 부총리, 장관 등 다채로운 경력, ‘햇볕정책’ 최초 제안도
압축적 경제성장 과정에서 생겨난 가치혼란과 무질서, 부패 여전
2014년 한국 1950년대 수준으로 하루아침에 후퇴해버려
방법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최고라는 생각 여전
<위클리서울>은 2007년부터 남북관계, 생태와 환경, 교육, 노동과 인권, 국가보안법 등의 문제와 관련 각계 인사들과 연속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그동안 송두율 교수,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김상봉 교수, 김수행 교수,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강기갑 전 통진당 대표, 노회찬·심상정 의원, 정세현·이종석·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홍윤기 교수, 박원순 서울시장, 이상돈 교수, 손호철 교수, 배우 최종원·문성근·권해효 씨, 가수 안치환 씨, 지율스님, 강정구 교수, 우석훈 교수, 박재동 화백, 이진경 교수, 유시민 의원, 문재인 의원, 김태동 교수, 신율 교수, 김명곤 전 문광부 장관, 홍세화 전 진보신당 대표, 서중석 교수, 최재천 교수, 한홍구 교수, 정지영 감독, 윤구병 변산공동체 대표, 표창원 교수, 함세웅 신부, 이용길 노동당 대표, 박범신 작가, 진중권 교수, 박노자 교수, 강수돌 교수, 권영길 전 민노당 대표, 안병욱 교수, 정태인 새사연 원장, 조희연 교수, 철학자 강신주, 신경림 시인, 박태균 교수, 한승헌 변호사, 백기완 선생,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한강 작가 등 340여 명의 사회 각계 인사들과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이번호에는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와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진보적 자유주의자, 평화순례자로 불리는 한완상 전 부총리. 그동안 그는 모든 극단주의를 배격하고, 극우와 극좌 양 극단의 정치사상을 배제하며 모두가 승리하는 상생 발전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사회학자이기도 한 한 전 부총리는 서울대 문리대 교수를 거쳐 YS 정부에서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DJ 정부 때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역임했고, 방송통신대학교 총장, 상지대학교 총장, 한성대학교 총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했다.
한 전 부총리는 이런 다채로운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 나아가 남북관계 등에 대해 고언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 그는 문민정부 때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안한 ‘한국병 치유’ 정책을 떠올렸다. 당시 이 정책이 실현되지 못한 부분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세월호 참사를 마주하면서 문민정부 시절이 떠올랐다. 1993년 장관직에 있었던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이른바 ‘한국병 치유’를 제안한 바 있다. 압축적 경제성장 과정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가치혼란과 무질서, 부패가 한국병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으로 말하면 관피아 등을 한꺼번에 극복해야 한다고 여겼다. 세월이 지나 2014년 세월호 참사와 다시 마주했다. 그동안 변한 게 별로 없다. 이번 참사를 통해 한국사회를 다시 총체적으로 되돌아보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문화, 시장문화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사회가 깨닫는 게 없다면 후진국에서 벗어나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과 ‘통일대박’ 발언이 그저 구호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드레스덴 연설의 내용은 10.4선언 5, 6, 7항을 베끼다시피 했다. 10.4 선언에서 다 이야기 한 것들이다. 그런데 한 가지만 쏙 빼놓았다. 10.4선언의 4항이다. 4항은 정전체제 종식시키고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관련된 3자 또는 4자와 정상이 한반도에 만나 종전협정을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이게 대박의 핵심 항이다. 7.4합의서부터 10.4선언까지, 그동안 남북이 역사적으로 합의한 다섯 가지 주요 안에 대한 실천적 고민이 없으면 대박도 없다.”
사회학자로서 그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는 비관적이다. ‘한국병 치유’는 요원한 문제다. 한 전 부총리는 “부자감세, 줄푸세 등과 같은 정책이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것을 정부와 정치권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줄푸세 정책은 제2, 제3의 세월호 참사를 예견하게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며 “소위 경제적 불평등, 부의 불평등 문제가 끊임없이 야기되고 있다. 집권세력과 부자들의 인식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했다. 다음은 한완상 전 장관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 세월호 참사 이후 어수선한 정국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사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2014년 한국사회와 국가가 1950년대 수준으로 하루아침에 후퇴해버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날 시장의 적자, 주류, 표준의 부도덕한 탐욕에 새삼 놀란 것도 있지만, 나와 같은 세대라면 아마 1950년 6월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방송을 해놓고 대전으로 대구로 달아났던 이승만을 즉각적으로 떠올렸을 성싶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들은 안전하게 서울을 탈출한 후 한강 철교를 폭파시키고 국민들은 피난도 못 가게 한 집권층들도 떠올렸을 것이다. 이들 집권층들은 3개월 후에 돌아와선 피난가지 못했던 국민들을 사상검증을 통해 괴롭혔다. 세월호 유가족의 뒤를 좇는 공안당국의 작태를 보자면, 다소 거칠지만 이런 맥락에서 2014년 한국사회가 실은 1950년대도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한편으론 문민정부 시절이 떠올랐다. 1993년 장관직에 있었던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국병 치유’를 제안한 바 있다. 당시 나는 한국병 치유 없이는 새로 출범하는 정부가 역사적으로 성공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압축적 경제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가치혼란과 무질서, 부패가 한국병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으로 말하면 관피아 등을 한꺼번에 극복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내가 문민정부라는 이름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의한 이유와 맥을 같이 한다. 6공화국을 끝으로 군사정권은 마무리할 때가 왔다는 연유에서 문민정부를 거론했고, ‘7공화국’이 아닌 문민정부로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김영삼 정부여야 하고 동시에 문민정부여야 박정희 독재 18년간과 6공화국까지 이어져온 온갖 적폐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이전까지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빨리 목적을 달성하면 최고라는 생각이 한국사회에 팽배해 있었다. 사실 이건 기본적으로 범죄적인 가치이다. 살인마저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당화 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한국사회의 병폐를 ‘한국병’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세월이 지나 2014년 세월호 참사와 다시 마주했다. 그간 한국병이 많이 치유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한 것 같다. 향후 세월호 참사를 통해 한국사회를 다시 총체적으로 되돌아보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문화, 시장문화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이번 참사를 통해 우리사회가 깨닫는 게 없다면 후진국에서 벗어나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 돌이켜보면 김영삼 정부 시절 ‘하나회’ 척결 등 한국병이 일정 부분 치유된 점도 없잖아 있다.
▲ 문민정부라는 이름을 넣은 것은 군사정부와 대조시키겠다는 취지였다. 군사정치의 문화, 편법주의적 문화 등을 고쳐야했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라는 군의 사조직을 과감하게 해체했다. 당시 군대를 건드리는 건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건 역사적으로 엄청난 성과다. 사조직 해체 이후 민주주의가 더 빨리 뿌리내릴 수 있었다.
하나회 해체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두 대통령은 냉전세력으로부터 친북좌파로 몰릴 가능성이 많았다. 만약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하나회를 해체하려 했다면 보수언론도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의 큰 정치적 자산은 냉전세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재임기간 5.16쿠데타 주역들을 재판에 회부하려 했다. 그건 대단히 용기 있는 일이었다.
이 외에도 ‘경제적 편법’인 한국병을 뿌리 뽑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다. 1993년 이전까지 차명으로 돈이 오가면서 시장과 강자와 국가 간의 카르텔이 공고했었는데, 그걸 깨부수는 제도적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누가 봐도 개혁적인 조치였다. 아마 하나회 해체와 금융실명제의 등장은 역사적으로 재평가될 것이다.
– 그럼에도 김영삼 정부 시절 정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 다만 남북관계가 악화되면 국내 온갖 정치사회 문제가 해결되기 힘들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남북관계 악화를 빌미삼아 정치적,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는 세력은 남에도 북에도 있다. 남쪽에선 냉전수구세력이며 북한에선 강경군부다. 김영삼 정부는 이런 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남북관계와 국내문제가 왜 함수관계에 놓여있는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회를 해체하고 금융실명제를 단행하고도 총체적 개혁을 일궈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 남북관계의 역사와 과정을 한자리에서 논하기란 벅찬 게 사실이다. 먼저 통일부총리로 재직할 당시 주력했던 정책이 있다면.
▲ 1993년 2월 통일원을 맡았다. 더 이상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보복적 상대주의로는 남북관계 개선이나 우리사회의 평화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과 문법으로 대북정책을 펼치고자 했고,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바꿀 계획을 세웠다.
그해 3월 대통령과 독대하면서 다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당시 우리 경제 규모는 북한의 14배였다. 그러니 이젠 새로운 관점에서 북한에 접근해야 한다며 훗날 김대중 정부가 본격 실행한 이른바 ‘햇볕정책’을 제언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도발을 하더라도 보복만이 최선은 아니라고 했다. 마침 김영삼 대통령은 교회 장로였다. 예수가 원수를 사랑했듯, 저쪽(북한)에서 우리를 때리더라도 우리는 껴안아야 한다고 했다. 이 얘기를 꺼내자 당시 김 대통령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원수사랑’을 거론한 결과, 이인모(비전향 장기수)를 북으로 보내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강풍과 햇볕이 경쟁을 하면 결국 햇볕이 이기게 돼있다. 나그네 코트를 벗기는 건 추운 강풍이 아니라 따스한 햇볕이다. 이 햇볕정책은 벗는 자와 벗기는 자 모두를 웃게 한다. 도덕적으로나 실용적으로 모든 면에서 그 이전까지의 대북 강경 증오 정책보다 우위에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햇볕정책은 요원하기만 했다. 대통령에게 여러 번 강변했지만 허사였다.
당시 나는 “문민정부는 흡수통일 할 ‘필요’도 없고, 흡수통일 ‘의지’도 없고, 흡수통일 할 ‘능력’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여전히 강성 기조를 유지했다. 그런데 5년 후 김대중 대통령이 ‘필요, 의지, 능력’ 이 세 가지 이야기를 그대로 강조하면서 공식적 대북정책으로 삼았다. 나는 다음 정부에서나마 그것이 실현됐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꼈다.
<기사 이어집니다.>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2014-06-27> 위클리서울
☞기사원문: 한완상 “6.25때 국민들 안심시키는 방송해놓고 달아났던 이승만 떠올리게 한 세월호 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