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지명된 지 14일 만에 사퇴했다. 교회에서 한 강의에서 친일, 반민족적인 역사관이 논란이 된 끝에 결국 여론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교회에서 한 강의를 단편적으로 소개해 여론몰이 마녀사냥을 했다”는 말도 나오지만 국민들의 70%는 청문회도 하기 전에 문 후보에게 부적합 판정을 내렸다. 총리나 장관의 역사관, 특히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어떻게 보느냐는 한 나라의 정체성과 관련해 결코 소홀히 넘길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신문에 기고를 하는 등 유난히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국사 교과서 문제에 120주년을 맞은 동학혁명의 재조명 운동 등 과거의 ‘역사’가 현재를 좌우하는 요즘이다. ‘역사가 도대체 뭐길래’라는 의문을 갖고 이이화 선생을 만났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한 달에 10여 차례 강의를 다니고 계속 글을 쓰는 그는 “역사와 지도자의 역사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수차례 강조했다.
결국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자진 사퇴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으로서 교회에서 한 강의를 너무 확대 해석한 것은 아닐까요.
“그의 자진사퇴는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신앙과 상관없이 그런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총리를 맡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일제 식민지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조선 500년은 허송세월을 했고 우리 민족이 게을러서 식민지 지배를 자초했다는 것인데, 이건 일본의 정한론자들이 주장하는 이론, 즉 조선민족은 나태하고 분열적이고 타율적이며 미개하고 정체돼 있어서 독립국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일본이 근대화시켜야 한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또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국가들이 침략행위를 자행하면서 내세웠던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의 진화론을 흉내낸 것이고요.
이런 논리에 영합하고 식민지 지배정책에 동조한 윤치호는 ‘조선은 미국과 같은 문명국의 식민지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논리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로 이어졌고 일부 극우 기독교인들이 동조하고 나섰습니다. 이렇게 되면 200만명이 목숨을 걸고 참여한 3·1운동은 민족사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게 되고, 3·1정신을 계승했다는 대한민국 헌법은 무효나 다름없게 될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죠. 일본군 위안부를 두고는 일본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세계 인권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반인권의 사례여서 당사자인 한국, 중국만이 아니라 미국 정부와 의회, 세계 인권운동가들이 일본의 반성과 사과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는 겉치레 사과가 아닌 진정한 사죄를 하라는 의미였다고 궤변을 늘어놓았지만 이런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총리를 맡았다면 일본 아베 정권과는 어떤 대화를 했을까요.”
기독교 신자로 교회에서 한 ‘하나님의 뜻’이란 발언은 정서상 다를 수 있지 않을까요. 김대중 전 대통령도 감옥에 있을 때 모든 시련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는데요.
“민주화운동을 하고 탄압받아 죽음의 순간까지 갔던 김대중 대통령의 말은 스스로 받은 고통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삶의 해석이지 한국 역사와 하나님의 뜻을 연결짓지는 않았습니다.”
한 개인과 국가의 역사관이 참 중요한데 그 근본은 학교에서의 역사교육이 아닐까요.
“우리 역사교육이 그동안 파행을 걸어왔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우리 역사보다는 중국 역사를 먼저 가르치기도 했지요. 바른 역사교육을 통해 우리의 혼을 제대로 알리지 못해 유학이 승승장구한 것입니다. 19세기에 들어 이를 반성한 실학자들이 애국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이순신전> <연개소문전> 등을 쓰면서 바른 역사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해방 이후 군정기 때 처음으로 6개월 만에 국사와 국어 교과서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승만·박정희 대통령도 국사를 매우 중시해서 대학, 고시, 유학 등 주요 시험에 모두 국사를 필수로 넣었죠. 물론 독재정권이라 근현대사는 안 가르치고 고려와 무신정권을 강조해 국사를 이용했다는 지적도 받았지만 그래도 국사교육을 중시했어요. 김영삼 대통령 때 ‘세계화’를 외치며 국사를 무시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정권 들어서 국사가 각종 시험에서 빠지고 정규수업에서도 시간이 줄었습니다.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것이 실용적이란 판단인가 본데 절대 그렇지 않죠. 미국과 일본의 경우 자국의 역사를 주당 15시간 정도 배우는데 우리는 3분의 1 수준입니다.”
최근에 역사, 특히 한국사 교과서 논란이 뜨겁습니다. 국사 교과서를 국정 교과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고, 금성출판사의 경우 ‘좌파’로, 교학사는 ‘우파’로 불립니다.
“국정 교과서 부활 움직임은 교육이 아니라 정치 프로젝트입니다. 교과서의 자율성은 국정제(집필진 선정, 내용 감수 등을 모두 정부가 결정)-검인정제(민간 출판사가 집필진을 섭외해 교과서 제작 후 정부가 심사)-자유발행제(국가나 정부의 개입 없이 민간 출판사가 출판) 순으로 높아집니다. 한국에서 국정 교과서는 유신 정권 하에서 등장했으며 현재 북한, 러시아 등에서만 국정 교과서를 발행합니다. 금성출판사 한국사 교과서를 좌파 교과서라고 하는데, 과거 너무 편향된 부분을 겨우 중간, 아니 가운데 비슷한 지점으로 끌어온 수준입니다. 일제치하 때 좌파 지식인들이 조국 독립운동에 앞장섰는데 그들의 일화를 소개했다고 빨갱이 교과서라고 하면 됩니까. 이번 선거에서 진보교육감의 대거 등장은 무얼 의미합니까. 유권자들이 진보좌파의 선동에 놀아난 게 아닙니다. 뉴라이트에서 추천하는 교과서를 보니 이데올로기를 떠나 숫자, 연대가 틀린 부분이 너무 많던데 양식 있는 학자들이 어떻게 그걸 학생들을 교육시킬 교과서로 받아들이겠습니까. 특히 박근혜 정부에서 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은 역사교육에 대한 국가 독점을 꾀하려는 것으로 역사교육의 후퇴이자 파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정규교육을 제대로 안 받은 분으로 알려졌습니다. 어릴 때 고아원을 전전하고, 생활비를 벌려고 술집 웨이터도 했던데요. 어떻게 역사학자가 됐습니까.
“15세까지 주역의 대가인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습니다. 정규교육을 안 시켜주기에 가출해서 전국의 고아원을 전전하며 공부를 했지요. 늦은 나이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광주고)을 마쳤습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서 문학도의 꿈을 키우던 중 참기름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위암으로 쓰러지면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어요. 가정교사, 군밤장수, 보험회사 판매원, 맥줏집 웨이터 등 20여개의 직업을 오가며 돈을 버는 틈틈이 도서관에서 ‘난독잡학’의 독서를 했지요. 역사책을 보며 왜 우리 역사는 이토록 아픔과 고난이 많은가를 알고 싶어 본격적으로 역사학을 공부했습니다. 한문 실력 덕분에 동아일보 출판부와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실에서 일할 수 있었는데, 학자들이 번역한 고전들을 검토하고 교정하며 자연스레 당대의 대가들을 접촉할 수 있었죠. 고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이긴 하지만 우스갯소리로 서울대 규장각 박사 출신이라고 주장합니다. 규장각 소장 서적들의 편찬 경위와 내용 요약, 책의 가치를 밝히는 해제작업을 했으니 일종의 ‘박사과정’인 셈이지요.”
가장 많은 책을 낸 역사학자로도 유명한데요.
“지금까지 공저를 포함해 100여권의 책을 냈습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전 22권)는 9년 동안에 걸쳐 썼고요. <녹두장군, 전봉준> <평등과 자주를 외친 동학농민운동> <인물로 읽는 한국사>(전 10권)를 비롯,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만화 한국사>(전 9권) 등 많이도 썼군요. 평등을 강조한 인간주의자이자 현실 개혁론자로서의 허균을 다룬 논문 <허균과 개혁사상>을 1973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했습니다. 이른바 ‘학계’에 데뷔한 것이죠. 유신체제에 대한 나름의 저항의식을 표현한 글이기도 한 허균의 논문으로 이름을 좀 얻었습니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역사 대중화를 위한 글쓰기를 했습니다. 진짜 박사도 아니고 상아탑에 갇힌 엄숙한 학자도 아니지만 덕분에 각종 잡지나 매체에 잡문과 책을 많이 썼어요. 그 덕에 대중적 지명도가 높아졌죠. 당시엔 제게 좌파란 꼬리표가 붙지 않아 활동도 자유롭고 출판 제의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좌파란 꼬리표가 붙었습니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듯 주로 기득권과 영웅이 주인공이지만 저는 민중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어요. 계급투쟁적인 시각이 아니라 지극히 휴머니즘적인 관점에서 접근을 했습니다. 가령 옛날에 노비들이 뭘 먹고 어떻게 살았나, 어떤 압제를 받고 살았나, 또 자기 대에서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어떻게 노력을 했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적으려고 노력을 한 것이죠. 그게 아마도 기존 학자들이나 기득권층에게는 불편했을 거고, 그래서 그런 꼬리표를 붙였을 겁니다.”
<녹두장군>이란 별명을 얻었을 만큼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찾기에서 많은 활동을 했는데요. 올해 120주년을 맞는데 당시와 시대는 다르지만 농민이나 민초들의 아픔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는 의견도 많더군요.
“동학농민혁명은 120년, 60년을 회갑으로 하면 2주갑을 맞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대내적으로 평등, 대외적으로 자주를 부르짖었고, 북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남으로 여수·진주까지 떨쳤습니다. 토지제, 신분제, 남녀차별 등 전근대적인 사회구조를 바꾼 일대 혁명이었고, 그 정신은 미래로 가는 빛입니다. 지금은 양반상놈 제도가 없어졌지만 사실 재벌이나 기득권층의 독식이 새로운 차별과 또 다른 신분제도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부, 여전히 반성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정치인들을 보면 과연 지금이 21세기인가 싶기도 합니다. 동학혁명의 정신은 사회적 부조리를 개혁하는 것이니 지금도 혁명은 유효하다고 봅니다. 과거엔 칠순의 하인이 일곱살 양반 아들에게 굽신거렸다면, 요즘은 돈 많은 이들에게 지배당하는 셈이니까요. 부조리를 조리로 만드는 게 혁명이죠.”
동학농민혁명에 경도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80년대는 암흑의 시대였어요. 역사학자로서 무슨 역할을 할까, 그리 자문하면서 동학 관련 연구서와 자료들을 찾아보고 답사를 다니며 ‘왜 이들이 목숨을 걸고 봉기했을까’를 화두로 삼아 천착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동학농민혁명 전문가가 되어 있더군요. 1989년 역사문제연구소 부설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초대이사장을 맡는 등 책과 현장을 넘나들었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있을 때 규장각에서 수집했던 자료를 검토하고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특히 젊은 연구자들과 답사팀을 꾸려 전라도·경상도·충청도·경기도·강원도까지 유적지를 탐방했고, 유족이나 관련자를 찾아 증언을 들었습니다. 덕분에 원광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고 녹두대상도 받았지만, 운동은 혼자 하는 게 아닌, 같이하는 것입니다. 특별법 하나만 봐도 연구자와 단체, 국회의원들이 힘을 합해 뜻을 모아 이룬 것 아니겠습니까. 동학혁명 2주갑을 맞아 돌아보면 몇 가지 큰 진전과 성과에 자부심을 갖기도 합니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30권의 사료총서를 내 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학문적 토대를 제공했고, 특별법을 만들어 법적으로 참여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특별법에 바탕을 둔 재단 발족으로 혁명의 지속적인 조명과 선양사업을 가능하게 만들었죠. 무엇보다 역적 누명을 쓰고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졌던 ‘동학농민혁명’을 세계 인권운동사에 빛나는 시민혁명으로 되살리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 같아 기쁩니다.”
역사학계에서 제도권 교육을 안 받아 소외나 핍박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자유분방해 보이는 음악·미술계도 학계는 매우 폐쇄적이던데요.
“진보성향을 갖고 있어 빨갱이란 오해는 받았지만 저는 교수나 학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지금도 여전히 교류가 활발합니다. 정통학자들과 달리 논문이나 이론서를 못 썼지만 공부나 연구를 안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민중, 즉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춘 역사책을 써서 역사의 대중화에 앞장섰다는 자부심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역사책만 써서 먹고 사는 유일한 학자이고, 대학학사 학위도 없는데 명예박사에 대학 석좌교수도 지냈고,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이력은 남들이 흉내내기 힘들지요.”
빛의 속도로 변하는 현대에 역사, 특히 우리 역사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입니다. 드라마 <정도전>을 보며 지금 상황과 비슷하다는 이들도 있고, 역사 교과서에서 동북공정, 한국전쟁 등의 문제가 미묘합니다. 미국의 패권주의, 중국의 중화주의가 여전한 시대에 자주적으로 역사를 인식해야 현실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자기정체성뿐 아니라 그 사회의 방향성, 미래를 모르는 것입니다.”
집필과 연구를 위해 한적한 파주 헤이리로 이사했지만 세상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강의, 인터뷰 등으로 그를 찾는 이들이 너무 많단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술과 담배를 무척 즐기는 그는 “앞으로도 쓸 책, 할 공부가 너무 많다”고 한다. 진짜, 역사가 그의 미래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2014-7-4> 주간경향
☞기사원문: [유인경이 만난 사람]역사학자 이이화 “친일 역사관 총리였다면 아베와 무슨 대화 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