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26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열린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 출판기념회에는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한 80여명의 문화예술인을 비롯해 여러 지인들이 모처럼 한데 모여 민중문화운동 세대의 잔치판이 됐다. 앞줄 왼쪽부터 부인 박영애씨와 김용태 선생, 황석영 작가, 박현수 교수, 최열 환경재단 대표, 이부영 전 의원, 이재오 의원, 원경 스님,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신경림 시인, 임재경 선생,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 강연균 전 민예총 공동의장, 문재인 의원 등이다. 사진 정성하 사진가 제공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의 주인공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김용태(그림·박재동) 선생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아니다. 올해 들어 투병 중에도 회고록 구술을 해오던 그는 지난 5월4일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신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기꺼이 그가 못다 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나섰다.
지난해 12월 8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이 그의 투병을 응원하고자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용사모)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47명은 지난 3월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형>을 펴냈고, 화가 43명은 ‘함께 가는 길’ 전시회를 열어 후원했다.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이들 가운데 20여명이 필자로 참여해 1970~90년대에 걸쳐 민주화운동의 큰 축으로 자리한 민중문화운동사의 주요 마디를 되짚어줄 예정이다. 또 그 마디마디를 술과 차비를 챙겨주며 ‘접착제’처럼 이어준 ‘인간 용태 형’의 일화도 들려준다.
첫번째 필자로 이부영 전 국회의원이 2회에 걸쳐 민중문화운동의 시대적 의미와 ‘용태 형’이 차지한 자리를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김정헌,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윤범모,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옥상,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씨 등이 채비를 하고 있다.
문화라곤 ‘시낭송’ 고작이던 시절
‘현실과 발언’ 창립하면서
민중의 삶 예술로 담기로 작심했다
광주학살 뒤에도 용공조작…
재야 투쟁대열 서서히 정비돼
시·노래·춤·걸개 등 문화예술투쟁
그 중심에 용태 형이 있었다
82년 인제 내린천 여행 계기로
문화·언론·학계·청년층 등
민주화 주력부대 벽 허물어져
용태 형이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훌쩍 넘었다. 그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되짚어보는 연재 기획의 총론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왜 하필 나일까 생각해봤다. 용태에게 정을 느끼는 후배들, 용태에게 신세진 수많은 문화예술인들, 용태에게 술도 많이 얻어 마시고 바둑내기 돈도 얻어 쓴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징역산다고 정치한다고 용태와 살갑게 자주 만나지도 못한 필자에게 왜 총론을 맡기느냐 말이다. 그래도 짧지 않은 세월, 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거니 하고 믿는 처지였으니 내 몫이 된 게 아닐까 하고 받아들였다.
필자가 용태를 만난 것은 1977년 연말이 아니었나 싶다. 유신시대 말기 숨막히는 암흑기, 두셋만 모여도 감시의 눈초리가 따라붙던 시절, 대화는 산이나 들로 나가 산개 들개처럼 떠돌면서 나눠야 했다. 잠행의 시대였다. 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불같은 의지를 가진 젊은이들이 일망타진당하자 한편으로는 낙담을, 한편으로는 더 굳은 다짐들을 하던 때이기도 했다. 김지하의 양심선언을 돌려보고 김남주·조태일·양성우의 시를 읽으면서, 때로는 문익환 어른의 ‘꿈을 비는 마음’을 성래운 선생의 낭송으로 들으면서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다. 행사도 드물었거니와 문화를 곁들인다고 해도 시낭송이 고작이었다. 뒤돌아보면 엄혹하기는 했어도 그때 시대정신은 시와 소설이,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강만길 선생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 감당하고 있었다.
그보다 앞서 77년 말 필자가 2년6개월 징역 만기를 채우고 나왔을 때 함께 모이자고들 해서 동아투위에서 송년회를 열었다. 태화관이라는 중국집에서 모였는데 반유신 인사들은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민족–민주선언’ 같은 성명서도 낭독하고 술도 어지간히들 마셨다. 백기완·고은 선생을 앞세우고 동아투위 동료들과 김용태·김학민·이신범 등이 9평 청운아파트 우리집에 들이닥쳤다. 용태의 선동으로 고은 선생의 흰 고무신에 막걸리를 부어 마셨다. 지금은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된 네살배기 딸아이가 “왜 신발에다 물 마셔?”라고 물어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그렇게 용태와 인연을 맺었다. 폭압은 질식할 듯 심했지만 그 대응은 아직 떠들썩한 시적 낭만의 분위기에 머물러 있었다. 70년대 후반을 미술잡지 편집실을 어정거리던 용태는 유신군부독재의 정치적 폭압, 비대해져가는 재벌, 거기에 짓눌린 민중들의 삶을 담아내는 예술이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79년 <현실과 발언> 창립에 참여하면서 불온한 저강도 문화 비정규전을 시작했다.
시대의 담금질이 더 필요했던 것일까. 79년 ‘10·26 사건’ 이후 군부 내의 대립 갈등을 예상했지만 신군부의 쿠데타가 그처럼 전광석화처럼 감행될지는 몰랐다. 필자는 10·26 직후 계엄령 위반으로 제일 먼저 구속되어 80년 ‘서울의 봄’도 5·18 광주학살도 감옥에서 겪었다. 살인적인 삼청교육도 대구교도소에서 받았다. 81년 3월 삼청교육을 이수해 ‘순화’되었다고 해서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특사로 풀려났다. 분명한 것은 ‘광주’ 이전과 이후는 다른 시대였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도피중이었고 사람들 사이에는 말수가 더 줄어들었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고 만남도 줄어들었으며 떠들썩한 술자리도 별로 없었다. 늘어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등산 모임이었다. 이름들이 이상했다. 거시기, 머사니, 무명, 바가지 등등. 거시기 산악회에는 이돈명·리영희·송건호·강만길·백낙청·박현채·박중기·김정남·조태일 등 당시 재야의 중심에 있던 저명한 지식인들이 집결해 있었다. 무명에는 신경림 시인을 좌장으로 정희성·안종관 등 문인, 김종철 등 동아투위 해직언론인들과 김학민 등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바가지에는 홍성우 변호사를 좌장으로 정태기·신홍범·최병선 등 조선투위 해직언론인과 소장 변호사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이들은 산에 모여 소식을 주고받고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남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얘기할 수 있었다. 필자는 바가지를 캠프로 삼고 여기저기 비정규 회원으로 기웃거렸다.
그런가 하면 ‘기파’(棋派)가 있었다. 산에 가기 싫어 주로 관철동 한국기원을 중심으로 진 치고 앉아 바둑을 벗삼고 저녁이면 인사동 대폿집을 전전하는 인사들이었다. 당시 동아투위 해직언론인 성유보가 한국기원 발행 월간지 <바둑>의 편집을 맡고 있던 연유도 있었다. 여기서 단연 중심 인물은 용태였다. 임재경 선생과 황명걸 시인 그리고 박종태 전 국회의원도 단골이었다. 산파들도 산행을 끝내고 저녁에는 기파들과 한자리에 어울리곤 했다. 값도 싸고 자리도 널찍한 ‘이모집’이 단골이었다.
82년 여름 “우리도 여름이니 남들 간다는 바캉스 좀 가자”는 공론이 돌더니 7월 하순 강원도 인제 내린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문인, 화가, 해직교수, 해직언론인, 제적학생 등 시대와 불화하던 인물군이 어지간히 모였다. 무슨 토론이 되겠는가. 처음부터 술로 시작해서 밤새 술로 지새웠다. 내린천 깊은 골에서 발가벗고 밝은 달밤에 밤새 요즘 말로 하면 캠프파이어를 했다. 고은·조태일·송기원·여운의 광태가 빛을 발하도록 유도하는 몫이 용태의 할 일이었다. 어디서든 용태의 메마르고 높은 웃음소리가 들리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는 신호였다. 무슨 대단한 결의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풀고 온 뒤에는 모이라면 잘 모이고 얘기하면 합의도 잘됐다. 내 기억으로는 이 모임을 계기로 문화계·학계·언론계·청년층 등 민주화운동 주력부대들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 듯싶다.
점차 용태의 그 비범한 기획력과 조직력을 발휘할 시간과 무대가 준비되고 있었다. 다시 학생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학교 옥상에서 밧줄에 매달려 구호를 외치다가 추락해서 죽기도 하고 구호를 외치다가 분신을 하고 투신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은 제적학생 그룹을 학림·무림·부림 등 무협소설의 ‘강호제현’ 같은 이름을 붙여서 용공 사건들을 조작해내고 있었다. 이제 80년 광주학살 이래 납덩이 같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던 민주화운동 진영은 휘장을 찢어야 했다. 정치권에서는 김대중–김영삼 세력을 중심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했고 재야에서는 청년들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부문별 지역별 조직으로는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조직되었다. 야권과 재야의 투쟁 대열이 정비되어가고 있었다. 민민협에는 민청련이 함께 회원단체로 들어와 있었고 용태가 사무처장을 맡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도 구성단체가 되어 있었다.
민문협에는 청년문인·놀이패·노래패·화가들이 운동 현장과 결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시와 노래와 춤 그리고 걸개그림 등 문화예술이 투쟁의 주요 부문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 총참모장이 바로 용태였다. 거기에 지금은 세상 떠난 지 20년도 넘은 김도연이 있었다. 민청련과 민민협, 그리고 민문협의 고리로 용태와 함께 움직인 김도연·박인배·정희섭의 활약이 컸다. 용태는 회의를 하러 민민협에 들르면 조그만 짬을 내서라도 민민협의 사무처장 박계동과 어울려 바둑을 뒀다. 김도연까지 어울려 뒀다. 필자는 일하는 사무실에서 바둑 두는 것에 질색했다. 한번은 바둑판을 문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부영 해직언론인 전 국회의원
▲ 1980년대 초 서울 서대문 봉원사 근처에 있던 ‘용태 형’의 집들이에서 김용태(왼쪽) 선생이 특유의 몸짓과 함께 애창곡 ‘산포도 처녀’를 부르 자 후배 화가인 민정기(오른쪽)씨가 옆에서 기타 연주 춤으로 흥을 돋우고 있다.
술자리 무르익으면 바지춤 추어올리고 ‘산포도~’
백기완 선생도 “용태 형” 불러
노래 열창할 땐 다들 배꼽 잡아
헌정문집 표지도 그 모습 담아
‘산포도 익어가는/ 고향 산길에/ 산포도 따다 주던/ 산포도 처녀/ 떠날 때 소매 잡고/ 뒤따라 서던/ 흙묻은 그 가슴에/ 순정을 남긴/ 산포도 첫사랑을/ 내 못잊겠네.’
헌정 문집 <김용태와 함께한 문화예술인의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제목은 그의 애창곡 ‘산포도 처녀’(1966년, 남상규 노래, 이인권 작곡, 월견초 작사)에서 따왔다. 또 김용태를 아는 모든 이들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용태 형”이라고 불렀다. 1987년 대선 때 그가 대통령 후보 비서실장을 맡아 모셨던 백기완 선생도 그렇게 부른다. 워낙 감투나 직함 같은 허식을 싫어하던 그가 그렇게 불러주길 원해서였다.
▲ 문화예술인 47명이 글품을 모아 펴낸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표지.
“용태 형의 ‘산포도 처녀’를 언제부터 듣게 되었는지는 기억하기 어렵다. 나름 상당한 훈련을 쌓으시고 이 정도면 ‘현실과 발언’(현발) 모임에서 발표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데뷔하신 것 같다. 어느 날, 음식점 방 안에서 일어서더니 방문을 열고 나가서 마치 무대에 오르는 것같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산포도~’를 부르는데,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바지춤을 배꼽 상당히 위까지 걸치는 아주 촌스러운 스타일을 연출하셨다.”
화가이자 후배인 민정기가 책에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소개한 ‘산포도 처녀’의 기원에 대한 일화를 보면, ‘현발’을 결성한 1979년 무렵부터 ‘십팔번’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현발 모임은 학연, 지연, 작가, 평론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시작한 그룹 운동이다. 토론이 시작되면 얼마나 말씀들이 풍부한지 언변과 지식이 너무도 모자란 나는 그저 아무 소리 못하고 조용히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의 최민, 성완경, 원동석, 윤범모, 오윤, 김정헌, 임옥상, 노원희, 김건희 등 여러 분들이 포진하여 앉은 술자리가 아닌가. 나는 그저 소주잔만 기울이다가 ‘민정기도 한마디 해봐’ 하면 그땐 취한 김에 용감하게 일어서서 ‘노래라도 한 곡조 불러보겠습니다’ 하면서 ‘첫사랑’을 부르는데 그때쯤이면 대개 무거운 주제를 잠시 멀리하고 재치와 재기, 노래, 입담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여흥시간에는 각자 재미있는 것을 개발해서 발표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는데 … 용태 형의 ‘산포도~’도 이때쯤으로 어슴푸레 기억된다.”
이처럼 ‘용태 형’은 술자리가 무르익거나 토론이 뜨거워지다 못해 싸늘해지면 스스로 벌떡 일어나 오직 이 노래만을 불렀다.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도 “(용태 형은) 오로지 ‘산포도 처녀’ 하나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며 “작은 키에 바지춤을 들어 올리며 챔피언벨트를 찬 권투선수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열창할 때는 다들 박수를 치기보다 배꼽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헌정 문집의 표지로 쓰인 그림도 바로 화가 강요배가 ‘산포도~’를 부르는 용태 형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김경애 기자 ccandori@
<2014-07-07>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