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2> 5.16쿠데타,
열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5.16쿠데타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5.16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청와대 ‘부정 선거’ 앞잡이, 정보부…어쩌다?
[5.16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전 재산 헌납’ 삼성 약속은 왜 물거품이 됐나
[5.16쿠데타, 열 번째 마당] 박정희 거듭 구한 은인, 제대로 뒤통수 맞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 후 남북 관계에서도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황태성 사건이다. 황태성이 박정희,
김종필과 관련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서중석 : 황태성 사건은 단순히 박정희, 김종필과 관련된 사건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여러 가지 면을 동시에 보여줬다. 야당의 성격도 부분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게 있었다. 5.16쿠데타가 났을 때 김종필이건 박정희건 다 정보 장교 출신이어서 그렇겠지만 대북 문제에 민첩하게 움직였다. 1961년 7월경 육군 첩보 부대인 HID 서해 지구 파견대가 대북 공작 차원에서 북한에 정치 회담을 제안했다. 용매도(황해도 해주만 어귀에 있는 섬) 등 여러 곳에서 1961년 9월부터 그다음 해까지 수차례 북한의 첩보 기관과 비밀
접촉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런데 황태성 사건은 이것하고도 차이가 아주 많이 난다.
1961년 8월말 남쪽으로 떠난 황태성은 임진강을 건너 서울로 왔다. 당시 북한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때 제일 많이 이용한 코스가 임진강을 건너거나 강화도 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서울로 온 황태성이 9월 1일
어느 집을 찾아갔느냐. 옛날에 황태성 이웃에 살았던 친지의 아들 김민하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면서 ‘박정희하고 김종필한테 내가 왔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한 것이다. 김민하는 정치학자로 나중에 중앙대 총장도 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얼마나 놀랐겠나.
황태성은 해방
전부터 박정희의 셋째 형인 상희의 아주 친한 친구이자 동지였다. 황태성은 ‘박정희가 나를 사숙했고 박정희의 진로를 의논도 했고 만주군 시절에도 휴가를 나오면 날 찾아왔다‘고 했다. 이건 황태성이 감옥에 들어가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얼마만큼
사실일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약간 과장됐을 수 있지 않느냐고 볼 수도 있다.
하여튼 황태성이
박정희, 김종필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건 틀림없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할 때 신원을
보증한 사람도 황태성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편집자>) 박정희와 잘 아는 사이였다는 점도 그렇고, 박상희는 김종필의 장인 아닌가. 김종필의 장모와 장인을 중매해준
사람이 바로 이 황태성이다. 그렇기 때문에도 황태성은 그때까지 살아 있던 김종필의 장모 조귀분한테는
특별한 존재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황태성은 박상희하고 같이 1946년 10월 ‘대구
폭동‘이라고도 하고 ’10월항쟁‘이라고도 하는 사건에 참여했다. 박상희는 구미에서 경찰에 쫓기다 죽음에
이르렀다. 이것도 예전엔 잘 안 밝혀져 어떻게 죽었는지가 불확실했는데,
2000년대 들어 확실하게 밝혀졌다. (1946년
10월 이때 황태성은 친구인 박상희뿐만 아니라 큰아들도 잃었다. <편집자>)
프레시안 : 황태성은 어떤 경위로 내려오게 된 것인가. 훗날 간첩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지만 황태성은 자신이 간첩이 아니라 밀사라고 주장했다.
서중석 : 황태성은 북한에서 직책이 높았다. 무역성 부상(副相), 그러니까 차관을 지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이들 가운데 1960년대까지 따지면 제일
높은 사람이었다. ‘내가 누구를 만나겠다‘고 한 것이니까, 간첩으로 내려온 건 처음부터 아니었다. 김민하가 이야기한 것처럼
밀사였다. 황태성이 내려온 건 박정희의 쿠데타 동기와 통일에 대한 견해, 그리고 남북 간의 협상이 가능한지 등을 타진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황태성은 조선공산당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반박헌영파에 속하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내가 본 기록으로는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만들 때 황태성이 경상북도 대표로 왔다. 그때 중앙당 간부들하고
각 도에서 올라온 대표들이 연석회의를 열었다. 민전 문제도 있지만 노선 문제 때문에 박헌영파와 반박헌영파
사이에 심각한 알력, 갈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공산당
대회 개최 문제도 있었지만 반탁 문제도 있었다. 황태성 이 사람이 그 자리에서 ‘신탁 통치 문제에 잘못 대응하고 있는 것 아니냐. 국민들이 반탁
투쟁을 하고 있는데 우리 당이 잘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 이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걸 볼 수 있다.
이 사람은 1947년경 월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어떻게 해서 내려오느냐. 김일성 수상이 주도해서 보냈다는 주장과 황태성이 ‘내가 박정희를
잘 안다‘며 적극적으로 자신이 내려가겠다고, 마지막 목숨을
바치겠다고 해서 내려왔다는 설이 있다. 난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일성 등 수뇌부가 황태성 밀사 파견과 관련해 많은 논의 끝에 최종 지시를 하지 않았겠나. 당시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같은 건 수뇌부에서 했다고 봐야 한다. 내려가도
된다고 봤기 때문에 내려가라고 한 것 아니겠나.
황태성과 박정희·김종필의
아주 특별한 관계
프레시안 : 북한은 쿠데타 세력의 실체는 물론 남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서중석 : 황태성 밀사 사건을 보면 북한이 너무 순진하다고 할까, 비현실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북쪽은 ‘남조선은
미제의 식민지‘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지 않나. 박정희가
쿠데타는 독자적으로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미국이 인정하고 지지한다고 했을 때는 쿠데타 주도 세력이
미국의 입장을 충분히 받아들일 것임을 정면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박정희가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이런 판단을 내렸다는 건
정말 안 맞는 이야기다.
황태성을 보낸
사건과 관련해, 4월혁명 때 그러니까 1960년 3월과 4월에 시위가 일어날 때 북쪽에서 너무나도 잘못 판단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와 다른 판단을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북한은 ‘남조선은
미제의 식민지이고 미국에 종속돼 있다‘고 봤기 때문에 시위라든가 반이승만 투쟁을 벌인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3월과 4월 항쟁에 대해 말로라도 뭔가를 보여주는 일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4.19까지 나니까 4월 21일에
와서야 ‘남북 조선의 정당·사회단체 대표 연합 회의를 긴급 소집하자‘고
했다. 1948년에 있었던 연석회의와 비슷한 것을 소집하자는 제안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고 4월 27일이
되자 ’22개 제 정당·사회단체 지도자 연석회의를 열고 남쪽의 노동자,
농민 등 각계와 함께 임시 행정 기구를 지체 없이 성립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했다. 둘 다 현실성이 전혀 없는 주장이었다. 어쨌든 4.19 이전에 뭔가를 했다는 게 별로 없다. (1960년
4월 12일, 3.15 부정 선거 무효화 및
마산 시민의 이승만 정권 반대 지지 등을 주장하는 성명을 내긴 하지만 이 시기에 북한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편집자>) 그것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까, 5.16쿠데타가 일어나니까 그때의 실책을 만회하고자 황태성을 보내는 걸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는 주장을 일부에서
하고 있다.
그렇지만 4월혁명하고 5.16쿠데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학생 시위나 민중 항쟁이라는 건, 북한의 주장대로 예컨대 ‘한국은 미국의 통제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통제와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어떤 사회에서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인데, 학생 시위나 민중 항쟁이 미국의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못 일어난다고 판단했다면 그건 역사도 잘못 알고 남한도
잘못 알았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군이라는 것은 북한이 그렇게 강하게 주장했듯이 그야말로
미국과 가까운 사이이고, 북한의 평가대로 한다면 미군의 통제 아래 있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박정희가 과연 미국의 의도에 어긋나는 활동을 쿠데타 이후에 할 수가 있었나. 이건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황태성을 보낸 것이다.
북한에 정보
능력이 있었느냐 하는 것도 이야기할 수 있다. 예컨대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 사건 때 어떤 역할을 했고
그 후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너무 일방적으로 판단한 것 같다.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 이후 어떻게
변했는지, 박정희가 어떤 사람인지, 쿠데타가 왜 성공했는지, 쿠데타의 성격은 뭔지 등을 황태성은 물론이고 북쪽에서 너무 몰랐다는 말이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북한, 박정희도 남한도 몰랐다
프레시안 : 1961년 7월 남한이 대북 공작 차원에서
시도한 비밀 접촉의 진의를 북한이 오판했고, 황태성을 보낸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남한도, 북한도 오랫동안 상대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서중석 : 그렇다. 그런 점은 남파 간첩 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 1950년대, 1960년대에 남한과 북한은 우리가 간첩이라고 부르는
공작원을 무수히 침투시켰다. 한홍구 교수의 논문을 보면 남한의 경우 한 정보 기관에서 1만1273명을 북한에 보낸 것으로 돼 있다. 1951년에서 1996년까지 남쪽 당국이 생포하거나 사살하거나 또
자수한, 하여튼 남쪽 당국에 적발된 공작원(간첩) 숫자가 4495명으로 돼 있다. 여기엔
간첩으로 활동하다 북한으로 넘어간 사람은 안 들어 있다. 그러니까 양자를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어도
양쪽이 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보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한홍구
교수 논문을 보면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걸쳐서
특히 많이 보냈다. 1972년 이후에는 북한이 공작원 남파를 사실상 포기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주 소수에 그친다. 나도 이건 옛날부터 똑같이 생각하고 있던 건데, 틀림없다고 본다. 북한이 그렇게 사실상 포기한 것은 간첩 한 명을
보내는 데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돼 있다. 그런데 가져오는 건 뭐가 있겠나. 너무나 비효율적이니까 그때쯤 되면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보낸 사람들 중에는 남쪽 출신이
많다. 그러나 남쪽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밀봉교육 받은 것 하나 가지고는 20년 가까이 남쪽이 변화한 것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남쪽이 얼마나 많이 변했나. 그런 남쪽 정세를 정확히 안다는 건 어려운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북한이 남파 공작원을 보내는 데 비용은 많이 드는데 결국은 미미하게 끝나고 만다. 비전향 장기수들도 자신들이 받았던 ‘남조선 정세 교육‘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졸렬했는가를 이야기하지 않나. 이 사람들은 북한에
대한 연대 의식이 있는데도, 자기들이 남쪽에 와보니 남한이 그런 남한이 아니더라고 얘기한다.
나는 참 1950년대 후반, 1960년대 초반에 여러 지식인이 간첩으로 내려와
체포를 당하고 중형을 받고 하는 것을 볼 때 비감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해방이 되고 혁명적 분위기였는데
친일파가 남쪽에서 너무 득세하니 ‘분단을 막기 위해서라도 북한에 간다‘,
이러면서 여러 계통의 사람이 북한에 많이 갔다. 이 중에는 고급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도 많았다. 일제 때 우리나라에서 고급 지식인이라고 볼 만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너무나 적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 북한에 간 이들을 나중에 소모품 비슷하게 남쪽으로 보낸다. 사실 이 사람들은 지식인이기 때문에
간첩 능력은 별로 없다. 그런 걸 볼 때 우리가 통일 국가였더라면 참 다 유용하게 일할 사람들, 좋은 일을 많이 할 사람들이었는데 그렇게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전쟁이
나자 대량 학살을 당하는 국민보도연맹원들도 어느 지역에서건 그 지역에서는 뜻있는 사람이라고 할까, 해방
후 ‘우리 지역에서 뭔가 해보겠다‘,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나. 참 그런 사건들을 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우리 현실, 우리 근현대사를 수구
냉전 세력이건 진보 세력이건 잘 알려고 하는 것 같지가 않다. 일제 때도 그랬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간첩으로 몰아간
쿠데타 세력, 이념 공세 소재로 삼은 야당
프레시안 : 1906년생으로 박정희보다 열한 살 위인 황태성도 일제 때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사회주의자로서 일본에 맞서고 해방 후 월북했던 황태성은 밀사로 내려왔다가 간첩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다. 황태성의 삶에는 20세기 한국사의 중요한 장면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념의 잣대부터 들이대는 대신 황태성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차분히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남쪽에 내려온 후 황태성의 행적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주장이 많다.
서중석 : 그것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예컨대 ‘황태성이 직접 김종필 장모 집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더라‘, 이런 증언도 있고, 그렇지 않고
‘서신을 보냈더니 그 장모가 새파랗게 질렸다‘, 이런 증언도 나온다. 어디서건 박정희를 직접 만났다는 증언은 안 나온다.
박정희는 황태성에
관해 수년간 계속 보고를 받았을 터인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셋째 형 상희 생각도 많이 들고 그랬을
것이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시절 성적이 아주 나빴다. 성적
불량으로 기숙사비 혜택마저 못 받게 되고 그랬다. (박정희 정권 시기,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시절 성적표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와 달리 1등을 했던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 성적표는 공개됐다. <편집자>) 그때 박상희한테 자주 들락거리면서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나. 해방
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에 갈 때까지 셋째 형 신세를 많이
졌다. 그리고 박정희가 그 부인 김호남을 돌보지 않는다고 박상희한테 아주 꾸지람도 많이 듣고 심하게
매를 맞았다는 증언도 있다. 또 형은 잘생기고 키도 크지 않았나. 자존심이
아주 강했던 박정희는 형에 대해 외모, 성격 면에서 열등감, 질투심
같은 걸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또 형을 존경했다는 여러 증언이 나오지 않나.
남로당 프락치로
가입한 것도 형과 관련이 분명히 있는 것 아니겠나. 형에 대해 갈등이나 경쟁심, 일부 사람은 적개심이라는 심리적 표현도 쓰던데, 그런 걸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 한편으로는 형에 대한 감정 때문에도 남로당 프락치로 가입한 걸로 보인다. 그런데
남로당 프락치 사건의 전모를 털어놓지 않았나. 그런 것에 대해 심한 정신적 갈등을 느꼈을 텐데, 그때 제일 많이 생각난 사람이 형일 것이다. 바로 그런 갈등이나
죄의식, 그것과 연결된 자신의 배신적 행위, 그리고 과거
사범학교에 다닐 때부터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황태성에 관한 보고를 받을 때마다 그런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을 것이고, 그러면서 박정희 심경이 참 착잡한 면도 있었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의 실권자가 되지 않았나. 5.16쿠데타는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고,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미국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박정희처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지 않았나. 그래서 쿠데타 직후부터 아주 냉혹하고 철저하게 반공 정책을
실행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권력에 대한 무한한 집념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황태성에 관한 보고를 받을 때 착잡한 건 분명히 있었겠지만, 냉혹한 측면이 더 강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런데 어느 경우나, 박정희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다. 간접적인
이야기들만 있고, 민정 이양기 즉 대통령 선거 때 한 말 정도가 남아 있다.
김종필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것도 알 수가 없다. 김종필이 이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한 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김종필이 황태성을 만났는가 하는 것도 두 가지 설로 나뉘어 있다. 만났다는 주장도 있고, 얼굴이 비슷한 경감을 김종필로 위장해서 만나게
했다는 설도 있다. 후자가 유력하다.
프레시안 : 황태성은 1961년 10월 20일 체포된 후 1963년 12월 14일 처형된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황태성 문제를 숨겼지만, 2년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황태성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정치 쟁점으로 번졌다. 1963년 대통령 선거 때는 박정희 반대 세력이 박정희에게 색깔론 공세를 펴는 데 황태성도 활용했다.
서중석 : 황태성은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군법회의 판결 조문이 잘못 적용된 것이다‘라고 해서 파기 환송했다. (군법회의 1심과 2심은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황태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대법원이 파기
환송하자, 군법회의는 국가보안법과 함께 형법의 간첩죄를 적용해 다시 사형을 선고했다. <편집자>) 그렇게 대법원과 군법회의를 왔다 갔다
하는 과정에서 미군 당국이 알게 됐다고 한다. 미군 정보 당국이 수차례에 걸쳐 ‘황태성을 우리에게 인도해라. 물어볼 게 있다‘고 강력히 요구하지만, 처음에는 불화와 긴장 속에서 넘겨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황태성은 미군 정보 당국의 심문을 받게 된다.
황태성 문제가
국민한테 알려진 건 민정 이양기, 그러니까 대통령 선거 때였다. 야당에서
이걸 문제 삼았다. 그래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1963년 9월 하순에 허정을 비롯한 야당 측에서 진상을 밝히려 했다. 그렇게
다그치니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기자 회견을 통해 설명했다. 그렇지만 그걸로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박정희 전력을 들추고 있던 윤보선 후보는 ‘황태성이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에도 개입한 것 아니냐‘, 이렇게 주장했다. 김형욱
회고록을 보면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은 밀봉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설령 황태성이 사전 조직에 관여했어도
밀봉교육을 받은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돼 있긴 한데 설마하니 밀봉교육에까지 참여했겠나.
박정희 후보도
기자 회견을 하면서 이 사건에 대해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선 닷새 전인 1963년 10월 10일, 박정희는 황태성 문제에 대해 직접 해명했다. “민주공화당의
조직이 간첩 황태성의 돈으로 만들어졌으며 (…) 공산당 조직과
같다고 한 윤보선 씨의 발언은 모두 조작에 불과하다.” 또한 자신이 여순사건 관련자라는 야당
측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이긴 했지만, 반란군과 직접 관련됐던 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진압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편집자>) 그 후 1963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취임 사흘 전에 사형이 집행됐다고 발표됐다.
황태성 사건은 1964년에 또 문제가 됐다. 1964년 야당에서 ‘황태성에 대한 사형이 정말 집행된 것이냐. 집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오키나와에 있다고 한다. 이걸 확인하자‘고 하면서 국정 감사 실시를 제의했다. 여당도 할 수 없이 이것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달 넘게 국정 감사를 했다. 여당
측이라 볼 수 있는 다수 의견은 ‘사형 집행이 확실하다‘고
했고 야당 측 소수 의견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사형을
당했다는 사진 같은 것이 문제가 있다‘, 이렇게 나오고 그랬다. 황태성
사건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이후락이 밀사로
평양에 갔다는 사실이 공표되면서 또 이야깃거리가 됐다. 이후락처럼 황태성도 밀사 아니었느냐는 것을 거론하고
그런 것이다.
▲ 박정희와 특별한 관계였던 밀사 황태성은 간첩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다. 사진은 2011년 8월 27일 경북 청도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이날 공개된 박 전 대통령 동상에 손을 대며 활짝 웃는 모습. ⓒ연합뉴스
황태성 사건을
통해 짚어본 박정희의 사고 체계
프레시안 : 황태성 사건은 박정희의 좌익 전력 논란과 관련해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서중석 : 황태성 밀사 사건은 박정희의 정치 이념과 기회주의적 성격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면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황태성은 박정희가 자신이나 형 상희와 비슷한 정치 이념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박정희가 황태성의 주장에 때로는 공명했을 수도 있고, 남로당
프락치가 됐을 때는 공산주의에 기울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쿠데타를 일으킬 때까지 박정희의 정치 이념이라고 할까 사고는
황태성이 믿었던 것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고 난 본다.
박정희는 해방
후 형하고 여러 번 충돌했기 때문에도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조선경비사관학교에 갈
때 돈이 없어 박상희의 카메라를 훔쳤다는 증언도 있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것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든다. 박상희의
사상, 황태성의 사상 같은 것에 크게 공명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프락치가 된 것은 일시적으로 그 사상에 공명했다고 하더라도 박상희의 죽음과 관련해 형에 대한 죄의식 같은 것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당시 남로당이 강력했다. 강력한 조직을 갖고 있던 것
등이 사상보다는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겠나. 그런데 그 사건 이후 배신자 즉 공산당과 결별한 자가 갖는
특성, 또 프락치가 됨으로써 출세를 망쳤다는 반감 같은 것 때문에도 사실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부터 좌익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았나.
그런 것의
배경은 군인 정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 군인들은 공산주의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일제 말에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들고나온다. 그래서 파시즘이나 나치즘처럼 ‘공산주의는 인간을 부패하게 만드는 박테리아‘라고 하는 글들이 많다. 공산주의는 아주 나쁜 병균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난 박정희가 이
시기에 이런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1970년대 유신 체제 담화문 같은 걸 보면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온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쉰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2014-07-09>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통’의 특별한 선배는 왜 간첩으로 죽어야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