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상암동의 한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있는 학부모입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시장과 혁신학교를 공약으로 내세운 교육감의 당선을 누구보다 기뻐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런
제가 이런 공개 편지를 보내게 되어 유감입니다.
시장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상암동 월드컵파크 3단지 옆, 난지천공원
앞에 있는 상암동 1693번지 부지에는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아래 박정희기념관)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박정희기념관 부지를 서울시에서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아래 박정희기념재단)에 매각한다는 이야기는 지난해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시민과 마포구민의 관심 부족 때문이었을까요? 지방선거 끝나고 2주일이 지난 6월 18일
서울시가 이 부지를 박정희재단 측에 매각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는 매각을 위한 감정평가를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사용허가를 취소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부지 매각이라니요? 박원순 시장님, 박정희기념관 부지 매각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DJ 정부
시절 역사와의 화해 차원으로 추진된 박정희기념관 건립 사업
▲ 16일 오후 1시반 서울시의회 개원에 맞춰 본관 앞에서 <상암동 박정희기념관을 공공도서관으로!’ 마포공동행동(준)>과 <민족문제연구소>가 함께 박정희 기념관 부지 매각 철회를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
ⓒ 마포공동행동(준)
시장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이 문제는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해 5월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 화해 차원에서 박정희기념관 건립 지원 의사를 밝힙니다. 그리고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박정희기념재단의 전신)는 서울시에 부지 지원을 요청합니다. 당시 상암택지개발사업을 계획
중이던 고건 시장은 상암동의 현 부지를 제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200억 원이 넘는 국고보조금까지 지원된다는 소식에 250여개의 민간단체와 시민들이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를 결성하기도 했습니다.
이같은 반대 여론에 부담을 느낀 당시 서울시는, 시 소유의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되 그 위에 세운 건물을 기부채납받는 형식으로 해 국민의 비판을 피해가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1년 12월 31일
서울시와 박정희기념재단 측은 아래와 같은 내용의 협약서를 체결하게 됩니다.
<전략>
2. 건축물의 용도는 공공도서관 및 전시관, 기타 부대시설로
하며 건축면적은 2,145㎡ 내외로 한다.
3. 건축을 위하여 “갑“(서울시)은 “을(박정희기념재단)에게 필요한 토지사용을 승인한다.
4. “을“은 건물을 완성함과 동시에 시설 일체를 “갑“에게 기부채납하여야 한다.
5. “갑“은 기부채납된 일체의 시설을 “을“에게 위탁하여 관리토록 한다.
6. “을“은 제5항에
의해 관리 위탁된 모든 시설을 「서울시도시공원조례」가 정하는 바에 따라 전담(專擔) 운영하고 관리한다.
<후략>
한 마디로 말해 서울시는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재단 측이 그 토지 위에 건물을 지은 후 서울시에 기부채납하면, 시가
이 건물을 재단 측이 위탁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를 준다는 것입니다. 재단 측은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받아서 좋고, 서울시에서는 건물에 대한 소유권을 갖게 됨으로써 ‘재단에
특혜를 준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2002년부터 박정희기념관 건립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
국고보조금 교부 결정이 취소되기도 하고, 이에 반발하여 재단 측이 소송을 제기하는 법적 공방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결국 재단 측이 법적 공방에서 승리함으로써 2010년 3월 공사가 재개되고 국고가 지원되어 마침내 2011년 11월 박정희기념관이 완성되었습니다.
여기서 시장님께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협약서 2항과 3항입니다. 2항은 ‘공공도서관과 전시관, 기타
부대시설‘로 건축물의 용도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2항의 연장선에
있는 3항은 그같은 조건 하에서 서울시가 재단 측에 토지사용을 승인한다는 내용입니다. 공공도서관으로의 건축물 용도 협약을 지키지 않으면 토지사용 승인 역시 취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협약서는 명확히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운영비 지원과 위탁관리 기간 문제, 부지 매매로 해결하려 시도
2011년 11월 완공된 박정희 기념관은 그 다음해인 2월 21일
개관합니다. 그러나 재단 측은 서울시가 도서관 운영비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층의 절반과 3층의 전체에 해당하는 공공도서관 공간을 폐쇄하고 전시관만
개관하는 파행적 운영을 하게 됩니다. 2014년 7월 14일 현재까지도 도서관 공간은 폐쇄되어 있습니다. 그 경과 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완공 후 재단 측은 2001년 협약서 내용대로 2012년 2월에 기부채납을 신청합니다. 그리고 별도로 공공도서관 운영비를
지원해 줄 것을 서울시에 요청합니다. 그러나 서울시가 이를 거부하자 재단 측이 재정 문제를 핑계 삼아
공공도서관을 폐쇄한 것입니다.
▲ 박정희 기념관 파행 운영 관련 일지 박정희기념재단측이 공공도서관을 폐쇄한 채 전시관만 운영한 것은 명백히 2001년 협약서 위반이다.
ⓒ 장창준
서울시는 이같은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제재를 가하지도, 시정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통합진보당
오병윤 의원실에 따르면, 위 일지에서 언급한 내용 외에 서울시가 재단 측과 어떤 내용의 공문도 주고
받은 게 없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이에 서울시 임대주택과 담당자는 “기부채납절차가 끝나야
관리에 대해 개입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그 전에는 소유주가 재단 측이기 때문에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해명했습니다.
애초 협약대로 개관 1년 후인 2012년 2월
재단은 시에 기부채납을 신청합니다. 그러나 시유지를 무상으로 영구사용하는 것에 대한 특혜 비판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재단 측도 서울시도시공원조례 개정에 따라, 기부채납이
받아들여서 영구위탁을 받더라도 10년마다 심사를 받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것입니다.
재단 측은
2013년 2월 ‘당초 기념과 건립 목적과 취지에
충분히 부합되고 기념과 사업이 영구히 발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라는 명분으로 해당 부지 매입 의사를
피력합니다. 비록 부지를 감정평가액대로 주고 사야하는 재정적 부담은 있지만, 공공도서관을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2001년 협약서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면적 5000㎡가 넘는 3층 건물을 누구의 제재나 간섭을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따라서
부지 매입은 재단 측의 ‘신의 한수‘였습니다.
그런데 박원순 시장 체제 하에서의 서울시가 재단
측의 매입 의사를 수용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2001년 서울시와 재단 측이 체결한 협약은
서울시민을 대리하여 서울시가 맺은 협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성격의 협약이었기 때문에 ‘공공도서관‘이 협약서에 명기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울시는 서울시민 혹은 서울시민을 대표하는
서울시의회의 어떤 동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시유지 매각 입장을 재단 측에 천명했습니다. 마포공동행동(준) 등 시민단체가 박정희기념관 부지 매각 문제를 서울시의회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기념관 파행 운영에는 서울시 책임도 커
기념관 파행 운영은 운영권을 갖고 있는 박정희재단
측에 더 큰 책임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공공도서관을
폐쇄한 채 전시관만 운영하는 것은 2001년 협약서 위반이며, 이는
서울시민을 우롱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파행적 운영의 책임에서 서울시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서울시는
비록 재정적 이유를 내세웠더라도 재단 측이 ‘의도적으로‘ 공공도서관을
폐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치했습니다. 기념관은 2012년 2월 21일
개관 첫날부터 파행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그 해 10월 23일 서울시가 재단 측에 보낸 공문을
보면, 서울시 역시 이같은 파행적 운영의 문제를 알고 있었고, ‘협약서
위반‘이라는 표현도 공문에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어떤 대책도 세우지 않은 것에 대해 ‘기부채납 받기 전이라 운영에 간섭할 자격이 없다‘는 서울시 해명만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둘째, 서울시가
시유지를 무상으로 제공, 박정희재단 측에 특혜를 주고 있다는 비판 여론이 일자 서울시는 2013년 12월 2일 “현재 기부채납 절차를 이행 중으로 아직 건축물의 소유권이 기념재단 측에 있어 건물사용료 부과도 미성립됨으로써, 특혜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해명자료를 냈습니다.
그러나 오병윤 의원실이 낸 자료에 따르면, 이미 서울시는 5개월 전인 7월 10일 175억 감정가격으로
부지 매각 의사가 있음을 박정희 재단 측에 공문으로 피력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부채납 절차가 진행 중‘이라고 한 서울시의 해명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 서울시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조례 서울시 조례에는 사용수익허가부에 명시되어야 할 항목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서울시는 2001년 협약서가 사용수익허가부를 대체한다고 주장하지만, 2001년 협약서에는 이런 구체적인 내용이 결여되어 있어 사용수익허가부를 대체될 수 없다.
ⓒ 장창준
셋째, 박정희재단 측의 파행적 운영을 사실상 방조하는 서울시
행정의 법적 하자가 존재합니다. 2014년 3월 28일 서울시가 오병윤 국회의원실에 제출한 답변서에 따르면 “건축물의
기부채납을 전제로 시유지의 무상사용을 목적“으로 하고,
“기념재단 측의 건축물 건립 및 건축물 기부채 절차 이행 과정의 토지사용에 대하여도 협약서(2001년)에 의거 허가“되었기 때문에 별도의 사용허가서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2001년 협약서 서울시와 박정희기념재단(당시 기념사업회)가 체결한 협약서 사본이다.
ⓒ 장창준
그러나 ‘서울시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조례‘ 19조와 20조에 의하면 서울시는 공유재산 사용·수익허가부를 반드시 작성하고, 이를 보존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2001년 협약서가 사용·수익허가부를
대체한다고 주장하지만 협약서에는 위 조례 19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사용 목적에 대한 사항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건축물의 용도만 규정하고 있습니다.
기념관 부지 매각이 갖는 법적 절차와 역사 의식의 문제점
▲ 지난 10일 서울시청사 앞에서 박정희 기념관 매각 철회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했다.
ⓒ 마포공동행동(준)
저는 행정도, 법률·규정도
잘 모릅니다. 그런 문외한인 제가 봐도 박정희기념관과 관련한 서울시의 행정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부지 매각이 갖는 법적 문제점부터 지적해 보겠습니다.
서울시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는 시유지 매각
절차에 따르면, ‘매각신청서 접수→현장 확인→매각 방침 수립→공유재산심의위원회 심의→공유재산관리계획반영(의회의결)→감정평가→예정가격 결정→경쟁입찰‘의
순서를 밟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서울시가 추진하는 박정희기념관 부지
매각은 공유재산심의위원회와 공유재산관계계획에 대한 의회 의결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서울시와
재단 측 사이에 오고 간 지난 공문들에 의하면 ‘경쟁입찰‘이
아닌 ‘수의계약‘으로 매각한다는 방침을 서울시는 갖고 있습니다. 이같은 과정들의 적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부지 매각이 갖는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한 문제입니다.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의
친일 역사 발언으로 우리 사회에서 역사 청산의 과제가 또 다시 화두가 되었습니다. 백번 양보해 박정희
독재 시절 한국 경제의 일대 발전이라는 ‘공‘은 인정하더라도, 박정희 시대의 군부 독재 정치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 행적에 대한 ‘과‘는
전혀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입니다.
독재기념관보다 공공도서관으로… 시장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 서울시가 서울시의회의 어떤 동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시유지 매각 입장을 재단 측에 천명한 것과 관련, 마포공동행동(준) 등의 시민단체가 의회에서 논의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마포공동행동(준)
박원순 시장님. 혹시 박정희기념관을 가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군부 독재를 미화하는 갖은 문구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박정희기념관의 절반이 공공도서관이라는 것 하나였습니다.
박정희재단은
운영비 부족으로 ‘공공도서관‘ 공간을 3년 동안 폐쇄하고 운영해 왔습니다. 그런 재단이 부지를 매입한 후 ‘공공도서관‘을 운영할 리 만무합니다. 부지 매각은 ‘박정희기념관‘을 ‘박정희독재찬양기념·도서관‘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기념관을
짓는데 200억 원이 넘는 국고가 들어갔습니다. 재단 측은
협약서를 지키지 않고서도 3년 동안(공사기간까지 포함하면 10년 훨씬 넘게) 시유지를 무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공사 기간까지 포함해 1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사용료를 받았다면
그 액수 역시 상당할 것입니다. 서울시가 부지를 매각한다면 이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재단 측의 ‘먹튀‘를 돕는 꼴이 됩니다.
많은
서울 시민들이 박원순 시장의 재선에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지 매각은 박원순 시장의 시정에 커다란
오점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박원순 시장의 결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독재기념관보다 공공도서관이 우선인 서울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 첫 걸음은 부지 매각 결정을
철회하는 것입니다. 박원순 시장님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2014-07-2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박원순 시장님, ‘박정희 기념관 부지
매각‘ 유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