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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역시 이순신家… ‘종손’들도 대대로 일본에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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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가의 ‘항일’ 역사에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이 더해졌다. 충무공의 13대 종손 이종옥 선생이 독립군 결사대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렀던 사실이 14일 민족문제연구소의 발표로 확인됐다. 충무공 후손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은 학계에서 알려진 사실이지만 ‘종손’의 적극적인 항일 무장항쟁이 입증된 것은 처음이다. 충무공이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지 300년이 지난 시점에 후손들이 다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인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연구위원은 “충무공 집안이 대대로 일본에 맞서 우리나라를 지켜왔다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역사적 사실이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1887년 9월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이종옥 선생은 항일 무장투쟁의 본거지인 신흥무관학교를 2년간 다닌 뒤 1914년 3회로 졸업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충무공의 12대손 이세영(1869∼1938) 선생이 교장을 지냈던 곳이었다. 이종옥 선생은 1914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백두산 서편 고원에 건설한 독립운동 기지인 백서농장 간부를 지내며 항일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의 기초를 닦은 이 선생은 1919년 6월 독립군 50여명으로 조직된 ‘광복단 결사대’에 몸담아 경성으로 들어왔다. 1919년 6월 21일자 신한민보에 따르면 이 선생을 포함한 11명은 총기 등으로 무장한 채 친일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던 이 선생은 1923년 12월 독립운동 시국사건에 또 한번 휘말렸다. 아산 온천리경찰서 고등계에 체포된 이 선생은 경성으로 압송돼 고초를 당했다. 이후 아산으로 돌아온 이 선생은 1930년 자택에 ‘덕의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민족정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 무렵 이 선생이 독립운동 과정에서 진 빚이 점점 늘어나면서 충무공의 고택과 임야, 묘소까지도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1919년 동일은행에 진 1300원의 빚이 이자가 불어나면서 1931년 총 2400원에 이르렀다. 1930년대 조선인 공장 노동자 월급(22원)의 100배가 넘는 금액이다. 당시 충무공의 유적을 지키기 위한 민족적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1년 만에 채무의 7배에 달하는 1만6300원이 모금돼 현충사를 중건할 수 있었다.

당시 명문가의 종손들은 사회활동보다는 가문을 돌보는 데 더욱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화되면서 명문가 후손들도 적극적인 항일 항쟁에 나서게 된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1867∼1932) 선생처럼 ‘가문보다 나라가 먼저’라는 사명감을 갖게 된 명문가의 후손들이 많아졌다. 

충무공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충무공의 11대손인 이민화(1898∼1923) 선생은 독립군 양성 교관으로 활동하며 청산리전투 승리에 공을 세웠고, 이세영 선생이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종옥 선생과 그의 장남 이응렬(1914∼1993) 선생도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모두 선조의 길을 따랐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1년 1월 20일 세상을 떠난 이 선생은 충남 아산 충무공 묘소 곁에 잠들어 있다.

전수민 김동우 기자 suminism@kmib.co.kr




<2014-08-15> 국민일보


기사원문: [단독] 역시 이순신家… ‘종손’들도 대대로 일본에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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