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9> 제3공화국의 탄생, 여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일곱 번째 이야기 주제는 제3공화국의 탄생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5.16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청와대 ‘부정 선거’ 앞잡이, 정보부…어쩌다?
[5.16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전 재산 헌납’ 삼성 약속은 왜 물거품이 됐나
[5.16쿠데타, 열 번째 마당] 박정희 거듭 구한 은인, 제대로 뒤통수 맞다
[5.16쿠데타, 열한 번째 마당] ‘박통’의 특별한 선배, 왜 간첩으로 죽어야 했나
[5.16쿠데타, 열두 번째 마당] ‘장면 맹비난’ 박정희, 사실은 대부분 따라 했다
[제3공화국, 첫 번째 마당] ‘가만있어라’ 강조한 ‘박통’, 은밀히 뒤통수쳤다
[제3공화국, 두 번째 마당] ‘구악 쇼’ 박정희, ‘적폐 쇼’ 박근혜…닮은꼴 부녀
[제3공화국, 세 번째 마당] 주가 조작, 그 뒤에 정보 당국이 있었다
[제3공화국, 네 번째 마당] 박정희, 휘하 장군들에게 무릎 꿇을 뻔한 사연
프레시안 : 군정 연장 국민 투표를 보류한 4.8 성명 이후 여론은 어떠했나.
서중석 : 그 성명 이후에도 박정희나 군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불신이 아주 컸다. 그것은 1963년 7월 29일 <경향신문>에 발표된 여론 조사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차기 정권 담당자로는 누가 더 적합한가를 물었는데 ‘정치 경험이 풍부한 민간인‘이 46.3퍼센트, ‘몇 사람만 제한한 현 정치인‘이 10.1퍼센트 나왔고 ‘지금 정치를 하는 군인‘, 이건 박정희와 김종필을 가리키는 것인데 12.4퍼센트밖에 안 나왔다. 그리고 요 몇 년 동안에도 잘 나오는 말인 ‘전혀 새로운 인물‘ 29.1퍼센트, 무응답 2.1퍼센트였다. 56.4퍼센트가 그래도 정치는 정치인이 맡아야 한다고 본 것이고, 군인을 지지한 건 12.4퍼센트밖에 안 됐다. 이렇게까지 박정희와 김종필의 신당과 정치 참여에 비판적이었다.
군정 공보부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도 이와 비슷하다. 훨씬 유리한 방식으로 조사했을 수도 있는데 결과가 그랬다. 1963년 8월 9일 각의에 보고한 걸 보면 ‘잘한다‘가 25.7퍼센트밖에 안 되고 9.8퍼센트는 ‘못한다‘, 5.7퍼센트가 ‘말할 수 없다‘, 30.5퍼센트가 ‘그저 그렇다‘인데 사실 군정 측 조사의 경우 ‘잘한다‘가 적다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본다. 그게 25.7퍼센트밖에 안 나왔다. 그러니 군정에 대한 불신은 쿠데타 초기보다도 훨씬 더 심했다고 얘기해도 된다.
그렇지만 이게 과연 야당에 대한 지지냐고 할 때 우리는 1950년대를 상기해볼 수 있다. 이승만과 자유당이 도시에서, 특히 서울에서 그렇게 미움을 받고 불신을 당한 것은 야당이 믿음직해서 그런 게 전혀 아니다. 이게 우리나라의 특이한 현상인데, 야당이 좋아서 찍는 것이 아니라 여당 또는 이승만 같은 집권자가 너무나 밉기 때문에 이를 견제해 달라는 뜻에서 야당을 찍는 것이다. 그런 것이 1960년대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 아닌가. 1971년 선거에선 달라진다. 대선이건 총선이건 좀 다른데, 어쨌건 1960년대도 1950년대와 같은 짝이라고 난 본다.
여당이 너무나 미워서 할 수 없이 야당을 찍는 한국 정치
프레시안 : 야당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여당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야당을 밀어주는 건 21세기 한국 정치에서도 심심찮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서중석 : 당시 야당은 그런 욕을 얻어먹어도 싸게 보였다. 1963년 1월 1일 정치 활동이 허용되자 야권은 바로 모였다. 1월 3일 김병로 전 대법원장 집에서 윤보선, 김병로, 이인, 전진한 이렇게 4명이 모여서 어떻게 정국을 끌어갈 것인가를 얘기하고, 범야권 단일 정당도 만들어야 할 것 아니냐는 논의도 한다. 그러면서 1월 27일, 민정당(가칭) 발기인 대회를 이 사람들 중심으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민정당에서는 신민당계가 우세했다. 옛날 민주당 구파, 그리고 장면 정권 때는 신민당이 되는 그 세력이다. 왜냐하면 김병로나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법무부 장관을 한 이인 같은 사람은 자기 조직은 없는 인물이었다. 전진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5월 14일, 공화당 다음으로 민정당이 창당 대회를 열었다.
프레시안 : 이 무렵 박정희 쪽에서는 범국민 정당 조직 작업이 이뤄진다.
서중석 : 이때쯤 되면 범국민 정당이 크게 조직은 되지만 속사정이 워낙 복잡했다. 최근에는 박정희가 양다리를 걸칠 생각이 있었다는 설도 나온다. 범국민 정당이 잘되면 그쪽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김재춘은 내 사람이다‘, 박정희가 이건 또 굳게 믿고 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박정희의 2.18 민정 불참 성명까지 나아가게 하는 데 김재춘이 주요한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김재춘은 자기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그런다.
그렇지만 역시 민주공화당이 단단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5월 19일에 민주공화당 정구영 총재가 “박정희 의장은 (…)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면 이를 수락, (…) 군복을 벗고 예편한 후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얘기했으면 이제 그렇게 되는 것이다. 5월 24일에는 이후락 공보실장이 “공화당이 총의로써 박 의장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한다면 이를 수락하겠다는 것을 박 의장 자신이 밝힌 바 있다“며 기정사실화하는 걸 볼 수 있다. 5월 27일 민주공화당은 박정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게 된다.
윤보선의 옹고집과 야권의 이전투구
프레시안 : 야권은 대통령 후보 문제 등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인다.
서중석 : 그렇다. 이렇게 되니 야당에선 ‘우리가 단일화해야 할 것 아니냐‘고 해서 단일화 운동이 이때부터 여러 달에 걸쳐 일어난다. 8월 1일에는 민주당을 제외한 세력이 모여 ‘국민의당 창당 준비 위원회 결성 대회‘를 열었다. 민주당은 옛날 민주당 신파, 즉 장면 정권 때의 민주당을 가리키는데 이건 따로 독자적인 당을 만들었다. 윤보선하고는 원수지간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5.16쿠데타 때 윤보선이 그런 모습을 보인 것 때문에 더 그랬다. 그리고 박 정권으로부터 얼마나 탄압을 받았나. 이 민주당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들, 그러니까 민정당, 허정이 이끄는 신정당, 이범석이 이끄는 민우당, 일부 재야 세력이 국민의당을 만들자고 모인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당을 만들자고 하면서 바로 이전투구에 들어간다. 어디서나 있는 것처럼 통합할 때 지구당을 어느 쪽이 더 많이 차지하는가, 좋은 자리를 누가 차지하는가를 놓고 싸우는데 역시 제일 큰 것은 대통령 후보 문제였다.
김병로를 대통령 후보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김병로는 누구나 존경할 만한 분이었지만 이때는 연세도 지긋하고 건강이 나빴다. 박정희의 군정을 종식해야 한다는 그 명분 때문에 이 노인네가 나온 것이었지만,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본인이 수락도 안 했다.
그런데도 윤보선은 ‘어떻게 그 건강 나쁜 사람이 나오느냐. 대통령 후보는 국민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나섰다. 어쨌건 민정당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력은 다 허정으로 기울고 ‘윤보선은 안 된다‘, 이런 쪽으로 갔다. 허정과 윤보선이 팽팽히 대립하는 속에서 재야에서도 허정을 지지하고 나왔다. 그러나 9월 5일 국민의당 창당 대회에서 결국 대통령 후보 문제 때문에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한 신문이 사설에 ‘우리 국민이 참 불쌍하다‘, 이렇게 썼던 게 50년 넘게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난다.
국민의당이 허정을 미는 쪽으로 가니까 결국 윤보선 쪽이 국민의당에서 나와 버렸다. 그렇게 국민의당에선 허정이, 민정당에선 윤보선이 나오는 큰 틀이 잡히면서 대통령 선거를 맞이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선거전 돌입하기도 전에 만신창이가 된 여야…특이한 1963년 대선
프레시안 : 8월 15일, 정부는 대선을 10월 15일에, 총선을 11월 26일에 치른다고 발표한다. 9월 5일에 이를 정식으로 공고하면서 각 세력은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한다.
서중석 : 여든 야든 만신창이가 다 된 속에서 대선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참 특이한 선거였다. 박정희 후보 쪽은 쿠데타로 민간인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그때까지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었다. 경제는 더 나빠졌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엔 농산물 문제가 굉장히 심각했는데, 농산물이 흉작이었다. 1962년엔 쌀, 1963년 들어서는 보리가 흉작이었다. 6월은 보리를 거둘 때 아닌가. 지금은 쌀을 다 먹지만 그 당시만 해도 농촌에선 거의 다 보리밥을 먹고 있었다. 도시에서도 가난한 사람은 다 보리밥을 먹었다. 쌀은 비싼 것이지 않았나. 지금은 오히려 보리가 특식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그때는 안 그랬다. 그런데 이 보리가 흉작이었다.
미 공법 480호에 따른 농산물 도입량도 줄었다. 그러면서 6월에 농산물 파동이 일어났다. 한 가마에 2000원대이던 쌀값이 4000원대까지 거의 2배로 뛰고 그랬다. 이러면 도시 사람들은 죽는 것이다. 또 6월과 7월에 잇따라 재해가 발생했다. 태풍 셜리로 피해가 컸고 폭우도 심했다. 이렇게 아주 어려운 일이 6월부터 일어난 것도 집권 세력에게 불리할 수 있었다. (1963년 12월 27일 자 <경향신문>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7∼8월에 (…) 쌀 한 가마가 5000원으로 뛰고 밀가루조차 넉넉지 못해 굶주림의 아우성이 터져 ‘대만미(米)를 사들인다‘, ‘태국미를 사들인다‘, ‘미국에 식량 원조 교섭을 한다‘ 하고 소동이 났다.” <편집자>)
그런데 구원투수가 미국에서 왔다. 8월이 되면 소맥이 대량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걸 볼 수 있다. 이게 선거에서 영향력이 컸다.
프레시안 : 스스로 내세운 ‘혁명 공약‘, 그중에서도 민정 참여 문제를 놓고 보인 행태 등은 박정희의 발목을 잡는 요소였다.
서중석 : 박 후보가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면서 ‘참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인식이 퍼졌다. 또 4대 의혹 사건, 민주공화당 사전·이원 조직 같은 것이 ‘청신하기는커녕 정말 신악 아니냐‘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박 후보가 불리한 점도 있었다. 그 대신 박 후보 쪽은 막강한 조직을 갖고 있었다. 자금도 야당과 비교하면 100 대 1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또 중앙정보부가 방대한 관료 조직, 국영 기업체 등 관권이 미칠 수 있는 여러 조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야당은 거듭 얘기하지만 1월부터 8월까지 싸움만 벌인 것으로 돼 있다. 세상에 저렇게까지 싸울 수 있느냐고 얘기할 정도였다. 윤보선이 야당의 주요 대선 후보가 되는데, 윤보선은 한민당 골수 세력의 일원이고 참신성은 정말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윤보선은 허정, 김병로 등과 맺은 관계를 볼 때 ‘대통령 병에 걸린 사람 아니냐. 왜 이렇게 자기만 나가야 한다고 하는 건가‘라는 비난도 받았다. 제대로 된 조직도 물론 없었다. 옛날 신민당 일부 조직밖에 더 있었나. 자금도 없었다. 내세울 만한 정책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 야당은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여야 모두 내세울 정책은 별로 없으니까 무엇으로 붙었느냐 하면 이념이었다. 그러면서 이념 싸움이 된 것이다.
불운한 박정희? 그런 군인 계속 나오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박통‘
프레시안 : 대선 출마를 앞두고 박정희는 군복을 벗는다. 이때 눈물을 흘리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서중석 : 군사 정부 쪽에선 선거에 대비해 여러 조치를 했다. 그에 대해 숙의하는 것이 많이 나온다. 그러면서 8월 30일 박정희 의장의 전역식이 3부 요인, 외교 사절, 각계 인사 등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박정희는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의 의미가 뭔지 잘 알기가 어렵다. 강력한 영도자 통치를 바랐고 권력에 대한 집념이 대단히 강하지 않았나. 그래서 4대 의혹 사건까지 일으키면서 사전 조직해 민주공화당을 만들었는데, 뜻밖의 복병을 만나 1963년 초에 곤경에 처했다는 데서 비롯한 눈물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박 의장이 이날 얘기한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은 계속 나타나게 돼 있었다. 왜냐하면 박정희가 성공하는 걸 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쿠데타를 일으켜서 뭔가를 하자‘,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의 통치, 특히 유신 통치가 모델로까지 제시되면서 전두환 신군부 권력이 출현하는 것 아닌가. 더욱이 신군부는 박정희가 키워준 하나회가 주축을 이루지 않았나.
프레시안 : 박정희가 정말 “불운한 군인“이었는지 의문이지만, 그에 앞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눈물인지도 의문이다. 민주주의를 짓밟은 것에 더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에게 ‘제2의 학살‘을 한 것 등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마음에 피멍이 든 억울한 사람들에게 또다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인물이 자신이야말로 불운하다며 흘린 눈물에서 고통에 공감하는 진정성을 찾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세월호 참사 후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흘린 눈물도 그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5월 19일 박 대통령은 특별법을 만들고 필요하다면 특검을 해서라도 진상을 낱낱이 밝히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약속했지만, 그 후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박근혜 정부와 여당에 가로막혔다. 유가족들은 ‘제2의 학살‘에 못지않을 고통 속으로 내몰렸다. 진정성 없는 눈물이라는 점에서도 두 박 대통령이 빼닮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오면, 박정희 의장은 “불운한 군인” 운운하며 눈물을 보인 직후 대통령 후보로 나선다.
서중석 : 전역식 다음 날인 8월 31일, 민주공화당 전당 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박정희는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했다. 또 정구영이 총재에서 사퇴하고 박정희가 총재가 됐다. 이때부터 1979년 10.26사건이 날 때까지 민주공화당 총재를 하게 된다. ‘유신 체제는 범국민적이라고 하면서 왜 총재를 만드느냐‘, 유신 시절엔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어쨌든 외유 중인 김종필의 귀국 문제도 이 전당 대회에서 논의됐고, 김종필 조속 귀국 건의가 전당 대회 직후 이뤄진다.
9월 3일엔 자유민주당도 창당 대회를 했다. 범국민 정당이 바뀐 게 자유민주당이다. 창당 대회에서 자유민주당 대표 최고위원에 김준연, 최고위원엔 소선규, 송요찬, 김재춘, 김봉재가 추대됐다. 옛날 한민당 세력이 여기에도 버티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김준연, 소선규는 그쪽이지 않나.
그런데 장도영에 이어 1961년 7월 3일부터 1962년 6월 초까지 내각 수반을 했고 1963년 2월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한 송요찬은 8월 8일에도 ‘박정희 의장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내고 ‘박정희는 물러나라. 민정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그게 애국이다‘라는 얘기를 했다. 사흘 후인 8월 11일에 구속됐다. 중앙정보부에서 연행했는데, 혐의는 한국전쟁 시기와 4월혁명 때 송요찬이 살인 및 살인 교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참 무서운 세상이다. 자유민주당은 9월 5일 구속 중인 송요찬을 대통령 후보로 정했다.
김재춘은 창당 대회 나흘 후인 9월 7일에 자유민주당을 탈당하고 김종필, 박병권에 이어 세 번째로 외유를 떠난다. 김재춘은 일본 등을 거쳐 유럽으로 갔다. 이에 관한 김재춘 회고가 재미나다. 구속적부심에서 석방됐던 송요찬이 얼마 후 재구속되자, 김재춘은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해서 피신했고 그래서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수로 은신처가 발각돼 본의 아니게 3개월 외유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김재춘은 대선이 끝난 후인 1963년 12월 6일 귀국한다. <편집자>)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예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2014-08-17> 프레시안
☞기사원문: 두 ‘박통‘, 진정성 없는 눈물도 빼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