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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사에 이순신 장군 모신 듯한 착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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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이 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 본 전각 가운데 닫집에 걸려 있다. 닫집의 형태가 마치 임금의 그것과 비슷해 충신이 되고자 했던 이순신 장군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이순신 장군 영정 또한 친일 논란에 있는 장우성 화백의 것이라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아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현충사를 가다

 

▶ 영화 <명량>의 흥행으로 현충사 방문객 수가 크게 늘었습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이번달 방문객이 세배 가량 늘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고 싶은 이들이 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현충사에 가면 이순신 장군과 충혼의 얼을 잘 느끼고 돌아올 수 있을까요. 일부 시민들은 현충사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직접 살펴보러 갔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고작 열두척의 배로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당대의 임금인 선조로부터 핍박을 받던 장군이기도 했다. 나라를 구한 자이지만 백성에게 임금의 무능을 실감케 하는 존재이기도 한 탓이다. 이순신의 공이 조정으로부터 제대로 인정받기까지는 100여년이 흘러야 했다.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짓는 것이요, 역사 이외에 딴 목적을 위하여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선조 시대의 과오를 반복하고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충남 아산의 현충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논란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뒤죽박죽 엉킨 여러 고민의 실타래를 안고 현충사를 찾았다.

 

20일 오전 1145분 버스를 타고 충남 아산시 온양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평야에서 푸르게 익어가고 있는 곡식과 아산시를 에둘러 돌아가는 잔잔한 곡교천에 잠시 눈길을 주다 보면 15분 만에 도착하는 곳이 현충사다. 낡은 시내버스는 현충사 앞 너른 주차장에 몇 안 되는 승객들을 토해낸 뒤 어딘가로 유유히 사라졌다.

 

기념관 천장 낮아 거북선 돛대

펼 수 없고 돛은 온데간데없어

친일 화가가 그린 이순신 영정에

제대로 고증 안된 이순신 관복

이순신 검 분실은 숨기기 급급

 

박정희 때 성역화한 현충사

일제 때 조선총독부 관련 나무

심겨 있고 일본식 정원 조성

박정희의 의중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무지함에서 비롯된듯

 

거북선 돛대를 세울 수 없는 이유

 

현충사는 1706(숙종 32) 아산 지역 유생들이 세운 사당이다. 영웅 이순신이 선조의 미움을 산 탓에 제대로 된 사당 하나 없었던 게 유생들은 안타까웠다. 다행히 숙종은 100년 전 임금과 달리 유생들의 뜻을 이해했다. 사당 건립을 허락하고 친히 현충사 현판을 써 사당에 내렸다. 1967년 박정희 정부는 본래의 현충사 터에 큰 전각을 새로 짓고 사당의 경내를 16만평(528925)으로 확대했다.

 

현충사 입구에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200m를 걸었을까. 흡사 고분처럼 보이는 낮은 구릉이 눈에 띄었다. ‘현충사로 이순신 묘역이 옮겨오기라도 한것일까.’ 혼잣말을 하며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기는데 구릉 중간을 칼로 쩍 하고 갈라낸 것 같은 모양새로 구릉 사이에 작은 광장이 나타났다. 구릉이 고분이 아니라 건물임을 그제야 알아챘다.

 

이 건물은 2011년 새로 지은 이순신기념관이다. 건축가 이종호씨는조용히 숨어서 존재하는 외양으로 기념관을 설계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윗사람에게 아첨할 줄 모르고 묵묵히 나라를 지키는 데에만 집중하느라 높은 벼슬자리가 늘 위태로웠던 인물이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이곳이 기념관인 것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순신의 삶을 깊이 통찰한 건축가의 안목 덕분일 거라 추측한다.

 

교육관이라고 써 있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홀에 설치된 거북선의 모형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조선 수군의 비밀병기 거북선.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주요 전술은 배 위에 올라타 칼을 휘둘러 적을 죽이는 것인데 거북선의 지붕에 송곳처럼 뾰족한 창이 박혀 있어 도저히 배에 오를 수 없었다. 거북선은 왜군 진영에 맹렬히 돌진해 왜선들을 부쉈다.

 

“우와, 배에 가시가 있네.” 네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거북선의 독특한 모양이 신기한 듯 소리를 질렀다. 아이의 엄마는나쁜 놈들이 배에 못 올라타게 하려고 등에 가시를 심었어라고 설명했다. 아이 눈높이에 맞춘 엄마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데 거북선의 돛대가 눈에 들어왔다. 돛대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고 돛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거북선 모형은 비록 실물의 6분의 1 크기로 제작된 것이지만 천장이 높지 않은 실내에서 전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돛을 세웠다가는 천장에 부딪힐 게 뻔했다. 배의 핵심인 돛대를 똑바로 세우지 않고 전시하는 이유를 관리자에게 물으니 그는원래 기념관을 지을 때 이곳에 거북선을 전시할 계획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냥 아이들이 사진이라도 찍기 위해 전시하고 있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아이들이 거북선은 원래 돛을 비스듬히 세우는 배라고 오해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이어 전시실로 발길을 옮겼다. 2전시실 초입에는 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 모조품이 관객을 맞도록 돼 있었다. 이순신 표준 영정은 최근 들어 다시 그려야 한다는 주장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무관인 이순신의 얼굴을 너무 문관의 외모처럼 그렸고 가슴에 달린 흉배(직급을 나타내는 관복 중앙의 표장)의 두마리 호랑이가 고증이 잘못됐다는 지적이 나오면서다.

 

존재하지도 않는 흉배가 달린 옷을 입힌 채 버젓이 수십년간 이순신 표준 영정이라고 지정해 놓았으니 이는 바로잡는 게 옳아 보인다. 영정을 그린 장우성 화백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된 인물이라는 점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순신 표준 영정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아이들이, 이순신이다!” 하고 소리를 내며 전시실로 몰려들어 왔다.

 

현충사 전각 바로 앞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보낸 금송 한그루가 자라고 있다. 나무 앞에는박정희 대통령 각하 헌수 1970.12.6’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놓여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현충사 전각 바로 앞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보낸 금송 한그루가 자라고 있다. 나무 앞에는박정희 대통령 각하 헌수 1970.12.6’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놓여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내 검의 분실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

 

2전시실을 나와 한층 계단을 내려가면 기획전시실로 연결된다. 이곳에서는겨레를 살린 두자루 칼 충무공 장검이라는 이름으로 특별 전시가 진행중이었다. 길이가 65(195.33)에 이르는 장검 두점이 유리관에서 방문객에게 위용을 뽑내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검은 현충사에 두점, 경남 통영 충렬사에 네점 등 총 여섯점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칼들은 모두 의전용, 지휘용으로 실전에서 사용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실전에서 사용한 칼은 어디에 있을까. ‘쌍룡검이라고 불리는 칼이한산섬 달 밝은 밤 수루에 홀로 앉아 시름하던장군과 함께한 그 칼이다. 1910년까지 조선 왕실 궁내부 박물관에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이 칼은 어느 순간 행방이 묘연해졌다. 한국전쟁 때 분실된 것인지 일제가 어딘가로 빼돌린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더욱 황당한 것은 1984년 이종학이라는 이순신 연구가가 쌍룡검의 존재를 문서를 통해 발견할 때까지 분실 사실조차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특별전시실 바깥의 외벽에 걸린 안내판에는 일제가 이순신 장검을 탈취해 가려다 실패했던 일화를 설명해놓았다. 장검을 지켜낸 자랑스런 이야기는 알리고, 정작잃어버려서도 안 되지만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쌍룡검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물건처럼 아무런 설명이 없어 씁쓸했다. 쌍룡검의 분실은 온 국민이 알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검의 행방을 좇는 일은 소수의 학자들에게만 맡겨져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착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이순신기념관을 나와 현충사 본 전각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는 길 중간에는 이순신 장군이 20대 때 지냈던 옛집을 만날 수 있다. 1545년 한성의 건천동(현 서울 인현동)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아산의상주 방씨’(방연화)와 결혼하여 이곳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무예를 연마하던 이순신은 31살 때인 1576년 무과 병과에 합격했다.

 

이순신의 옛집에는 그의 후손들이 최근까지 살아왔고 지금의 현충사 터는 백암리라는 이름의 마을이었다. 1931 523일 춘원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쓴 글(충무공 유적 순례)을 보면 100가구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뒷산의 소나무숲에서 맑은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리던 그런 마을이었다.

 

이순신은 이곳에 머물며 나라의 인재가 되기 위해 문무를 수양했을 것이다. 또한 툇마루에 앉아 아름다운 고향의 자연을 마음속 깊이 수채화를 그리듯 담아 나갔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조선의 터전이 왜구의 침입으로 불타 재가 되어갔을 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순신 옛집 앞의 샘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편에 작은 바가지가 놓여 있어 지나가던 객들이 목을 축일 수 있다. 한움큼 떠서 목 안으로 넘기자 복잡한 심사가 가슴속에서 시원하게 쓸려 내려가는 것만 같다. 이순신 장군이 즐겨 먹었을 물이라 생각하니 이 샘물도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현충사 본 전각으로 올라가는 돌길에는 양옆으로 아름답게 가지를 뻗은 십수그루의 소나무가 보인다. 재미있는 건 소나무들의 자라는 모양새다. 나무 기둥이 하늘로 곧게 뻗지 못하고 옆으로 뻗어 나무들이 마치 절을 하듯 누워 자라고 있다. 볕을 잘 받으려고 이리저리 몸을 비튼 것이겠으나, 이곳이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다 보니 나무들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라고 상상하게 된다.

 

현충사 본 전각에 도착했다. 전각 문 앞에는 관리 직원이 걸상을 갖다 놓고 앉아 있었다. 문 앞에 놓인 향로의 향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직원일 테다.

 

직원의 양해를 얻어 전각 내부에 들어가보았다. 장우성 화백이 그린 이순신 표준 영정이 마치 임금의 그것과 같은 닫집(궁궐 안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에 놓여 있었다. 당대의 임금 선조보다 이순신 장군이 후손에게 더 존경받는 것은 사실이나 마치 그를 왕처럼 사당에 모신 것은 좀 부적절해 보였다.

 

전각 안쪽 벽에는 이순신 일생 중 특기할 만한 사건 열가지를 묘사한 십경도라는 그림이 붙어 있었다. 서울대 미대 정창섭·문학진 교수의 작품이라 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림의 모든 장면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허나 착각이었다. 빗방울처럼 보였던 것은 실은 전각 천장에서 떨어진 석회 가루 흔적이었다. 참배객이 전각에 발을 들이는 것을 제한하는 것은 좋으나 직원들조차도 들어와 살펴보지 않는 것일까. 관리 상태가 영 부실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헌수한 나무라서

 

전각을 나오는데 한 중년 남성(49)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금송이 있다는데 그게 뭔가요?”라고 관리원에게 묻는 소리가 들린다. “(전각을 등지고) 저 아래 오른쪽에 보이는 게 그거예요. 일본 황실과 사무라이(무사)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해서 말이 많지만 어쨌든 그냥 두기로 결론이 났습니다.” 관리원이 익숙한 질문을 들은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금송과 얽힌 사연은 이렇다. 박정희 대통령은 현충사를 성역화하면서 현충사 전각 앞에 금송을 심었다. 금송은 일본이 원산지이고 일본 신사에 많이 심는 상록침엽수종이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의 대표 혜문 스님은 금송이 현충사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이전 요청을 했지만 문화재청은 2010 12박정희 대통령이 헌수한 기념 식수목으로 시대성과 역사성 등을 나타내 그대로 존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정했다.

 

금송이 일본의 황실과 사무라이를 상징하는지는 꼼꼼한 확인이 필요하다. 다만, 금송이 아키히토 일왕의 아들 아키시노노미야가 낳은 손주 히사히토(8·왕위 계승 서열 3)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지정된 것은 사실이다. 또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금송은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에 심겨 있던 나무에서돌려심기로 파생시킨 묘목이다.

 

금송의 의미를 과대 해석할 필요도 없지만 굳이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나무라고 해서 현충사에 존치해야 할 이유 또한 있을까. 현충사 전각 앞에 세워졌던 일본식 석등은 1991년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철거됐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금송의 처리 문제도 답이 보인다.

 

현충사 경내 정원의 호수 정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 호수도 일본식 정원 양식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다. 연못 사이를 가로질러 아치형 돌다리가 놓여 있고 연못 중심부에 섬을 만들어놓았다. 섬과 연못 주위를 돌아다니며 감상하는 전형적인 일본의회유임천식 정원이다. 호안에는 커다란 돌을 불규칙하게 눕히거나 세워 멀리서 보면 물이 넘쳐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역시 일본의 양식인데 호수 주변을 걷다 보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일본 교토의 니노마루 정원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연못 중간의 돌다리에 오르자 비단잉어 수십마리가 물밖으로 입을 뻐끔거리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방문객들은 먹이를 던지며 잉어들과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있었다. 비단잉어는 일본 니가타현의 특산물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현충사 연못에 잉어가 뛰어놀면 좋겠다고 해 현충사 정원을 설계한 오휘영 전 청와대 비서관이 이를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우리나라 근대 조경 태동기의 숨은 이야기’, <환경과 조경>, 2000)

 

여러 증언과 자료를 살펴보았을 때 현충사에 왜색이 짙은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의중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시대 정원의 양식이 어떠했는지 연구도 부족했고 일본의 사당 양식을 베껴오는 것에 별 문제의식이 없던 시대였다. 무지함도 문제지만 그 무지함에 몇십년이 지나도록 무감각한 것은 더 큰 문제다. 비판이 거세지자 문화재청은 정원을 한국식으로 고쳐 짓기로 결정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기자가 취재 온 것을 알고 현충사 관리 직원들이 인사를 나왔다. 가을 국정감사를 앞두고 기자가 찾아오자 무엇을 지적받을 것인지 우려하는 눈치였다. 직원이요즘 영화 덕분에 방문객 수가 많이 늘었습니다. 부디 좋은 쪽으로 기사 좀 써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어찌 관리 직원들의 무능함만 탓하겠는가. 우리 사회 전체가 고민이 부족한 탓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현충사 운영에 도움이 되는 기사를 쓸 겁니다라고 직원에게 설명했다. 직원은 그제야 안심하는 눈치였다.

 

직원들은 현충사 정문 앞까지 기자를 배웅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째르르 째르르 하는 매미 울음소리가 한가로운 저녁의 공기를 요란하게 갈랐다.

 

아산/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취재자문 혜문 스님

 

<2014-08-22> 한겨레

☞기사원문: 일본 신사에 이순신 장군 모신 듯한 착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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