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나라의 소중함을 생각해야“
[월요신문 김영 기자] 월요신문에서는 지난 날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현재 시각으로 되짚어 돌아보는 특별기획 ‘그날’을 연중 게재한다. 그 두 번째 시간으로는 지난 1910년 8월 29일 반포된 한일병합조약 104주년을 맞아 당시 부당했던 조약 체결과 광복 이후로도 끝나지 않고 있는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봤다.
▲ 경술국치 이후 일본에 대한 항쟁 의사를 몸으로 보여준 조선의병
불법·부당했던 조약체결, 36년 간 암흑기 가져와
광복 직후 무산된 친일파 청산, 여전히 제자리걸음
1910년 8월
순종 4년째이던 지난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은 제3대 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게와 형식적인 회의를 거친 후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을 조인했고 일주일 뒤인 8월 29일 이를 반포했다.
1905년 불법적으로 자행된 을사조약(을사늑약)을 통해 자주국으로서 지위를 사실상 상실했던 대한제국은 한일병탄조약을 통해 그 이름마저 잃고 일제강점기란 암흑기를 맞고 말았다.
앞서 일본제국은 패권·침략주의 노선을 본격화하며 대한제국에 대해서도 완전한 소유권을 인정받으려는 요량으로 한국병탄을 추진했던 것으로, 이를 위한 실행부대로서 자국 내 극우조직 및 이들과 부화뇌동하던 한국과 일본 거주 친일인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과 송병준은 일본왕과 일본제국에 대한 충성경쟁 및 매국 세일즈에 나서기도 했으며, 민족배반의 공로로 일본 작위 및 막대한 이권을 거머쥐었다.
반면 다수의 조선인들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날의 치욕을 국권피탈(國權被奪)·경술국치(庚戌國恥)라 부르며 자결로서 이에 항거했다.
또한 경술국치가 첫해에만 14만 명의 일반 백성이 의병으로 궐기했으며, 이후 30여 년 동안 한반도는 물론 중국 대륙에서도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이 지속됐다.
그런가 하면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 맺어진 한일병합조약에 대해 한일 양국 간 평가는 오랫동안 대치상태를 이어왔다.
한국 내에서는 절차가 무시된 상황에서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 정황이 분명하고 정작 조약서에 순종의 서명 날인이 빠져 있다는 점을 근거 조약 체결의 불법·부당을 줄기차게 강조했다. 반면, 일본 내 상당수 법학자들은 조약 체결의 형식적 문제를 언급하며 ‘국제법상 문제없는 조약’이라 발뺌해 왔다.
한편 경술국치 100주년이던 지난 2010년 5월에는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 109명과 일본 지식인 105명은 각각 서울과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일 병합은 원천무효’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통해 해당 조약의 불법·부당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도 했다.
조약 체결에 대해 이들은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라며 “조약의 전문(前文)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라고 밝혔다.
또한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보이고 있으며, 한국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하듯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라고 지적했다.
▲ 경술국치를 잊지 말자 만세 운동에 나선 광복회 회원들. <사진제공= 뉴시스>
2014년 8월
경술국치 이후 100여년의 시간이 지났으나 앞서 언급했듯 일본에서는 한일병합조약의 불법·부당성에 대해 공식적인 인정이나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또한 그들은 이후 펼쳐진 일제강점기 동안 만행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인 상태다.
경술국치의 아픔이 해소되지 않은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 안에 있다. 일본인을 대신해 조약 체결에 앞장섰으며 이후 일본인보다 더욱 조선인들을 학대했던 친일파들에 대해 광복 이후 70여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처분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는 친일파 청산에 대한 요구가 빗발쳤다. 남한에서는 반민족행자에 대한 특별위원회 이른바 ‘반민특위’가 결성됐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정치부장 및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을 지냈던 김승학은 친일 인사 263명에 대한 명단을 작성하기도 했다.
김승학이 작성한 명단은 일제강점기 당시 정·관계와 실업계 및 대중예술계 문학계 그리고 종교계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던 대표적 친일인사들에 대해 그 이름과 행적을 나열한 것인데 이는 1948년 출판된 ‘친일파 군상’ 이란 책의 초고로도 활용됐다.
그러나 남한 내 친일파 청산은 사회안정을 바라던 미군정 측의 이해관계와 엇갈리며 별다른 소득 없이 마무리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군정의 보호아래 반공의 기치를 내건 친일파세력은 이후 우리사회 기득권세력으로 성장했다.
때를 놓친 친일파 청산이 지금까지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그들에 대한 친일행적 진상조사 역시 상당기간 멈춰있었다.
친일파 연구가 본격적으로 재개된 것은 2000년대 들어와서다.
지난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회장 김희선)에서는 주요 친일 인사 708명에 관한 명단을 공개했다. 김승학 자료에 비해 2.5 배가량 많은 친일인사 명단이 확인된 것으로 이는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근거해 작성됐다.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1990년대부터 친일파 분류작업 계획을 수립했으며 2001년 친일파 행적 연구 및 그에 따른 친일파 명단 작성에 돌입했다. 경술국치 95주년이던 2005년 8월 29일에는 친일파 3090명에 대한 1차 명단을 공개했으며, 2009년 11월 8일 친일파 4776명이 포함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기도 했다.
우리정부에서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2004년 3월 공포, 특별법을 근거로 위원회를 운영해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명단을 2006년(106명)과 2007년(195명) 그리고 2009년(704명)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해당 명단들에는 이완용과 송병준 민영휘 등 대표적 친일파 정치인은 물론 김성수 동아일보 창업주와 방음모 전 조선일보 사장 그리고 이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 등이 포함돼 사회적 논란을 낳기도 했다.
한편 독립투사 후손들로 이뤄진 광복회 안흥순 부회장은 경술국치와 8월에 대해 “6월이 호국보훈의 달로 정해져 있으나, 진정 나라를 생각해야 할 달은 8월”이라며 “15일 광복절은 물론 29일 경술국치를 생각한다면 8월 한 달이 진정 나라의 소중함을 생각하기에 적절할 시기”라 말했다.
<2014-08-29> 일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