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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망언한 일본…한국 정부는 왜 덮는 데 급급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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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9> 한일협정, 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일협정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프레시안 : 1965년 새해가 밝으면서 한일 회담은 마무리 국면에 접어든다. 그러나 일본 측이 성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검은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마지막까지 한일 회담은 고비를 맞는다.


서중석 : 1965년에 들어와 한일 회담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조인과 비준 과정이 남아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한일 회담은 다카스기 망언이라는 게 나옴으로써 굉장히 큰 위기에 봉착할 뻔했다.


1월 7일 한일 회담 일본 측 수석대표 다카스기 신이치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건 좋은 일을 하려고, 조선을 더 낫게 하려고 한 일이었다. 20년쯤 더 일본과 한 몸이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건 나무가 별로 없어 산이 헐벗은 것을 가리킨 것이다. “일본의 노력은 결국 전쟁으로 좌절됐지만 20년쯤 더 조선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일본이 사과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타당한 말이 아니다. 창씨개명만 해도 그것은 조선인을 동화시켜 일본인과 같이 대하려고 취한 조치로 나쁜 것이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이렇게 얘기해버렸다. (일본 기자들과 함께한 이 자리에서 다카스기 신이치는 “일본은 차제에 형이 된 기분으로 한국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의 일을 들춰내 한국 측이 주장하고 싶은 것이 많겠지만 일본 측에도 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편집자’)


이건 1950년대 구보타 망언보다 더 심한 것이었다. 한국 측 수석대표 김동조는 이 내용을 알고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서 바로 일본 측에 연락해 ‘이 발언을 한 걸 다 부인해라’, 이렇게 했다. 어떻게든 한일 회담을 끝내려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동아일보>에 다카스기 망언 전체가 보도돼버렸다. 1월 19일에 1면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한다. 이렇게 되니 또 뒤집어졌다. 그러니 한국 측에서 공식 해명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측이 ‘이런 일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걸로 이 일을 끝맺었다. 최종 단계에 와 있었기 때문에 이런 큰 망언, 있을 수 없는 엄청난 망언을 했는데도 한일 양쪽에서 서로 덮었던 것이다.


(다카스기 신이치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미쓰비시 재벌에서 오랫동안 일한 일본 재계의 거물이었다. 박정희 정권 이래 역대 한국 정부가 일본 극우 인사 12명에게 훈장을 준 사실이 2013년에 드러나면서 논란이 됐는데, 다카스기 신이치도 그중 하나였다. 다카스기 신이치는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시이나 에쓰사부로, 고다마 요시오 등과 더불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편집자’)


망언 서둘러 덮은 한일 야합, 뒤이어 과거사 얼버무린 일본


프레시안 :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두 나라 모두 색깔론을 들고나온 것도 눈길을 끈다. 다카스기 신이치는 1월 18일, 도쿄에 있던 한국 기자들에게 이례적으로 회견을 자청해 자신의 발언에 대해 해명했다. 이 자리에서 “내가 공산당이 좋아할 이야기를 하겠나? (…) 내가 말했다는 그 보도는 어디서 나온 말인지 나도 모르겠다”며 딱 잡아뗐다. 일본공산당 기관지인 <아카하타>가 자신의 발언을 보도하고 북한의 <노동신문>이 이를 인용해 비판한 것을 가리키며 색깔 공세를 편 것이다. 그러나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다수 일본 언론이 이 망언을 보도하지 않은 건 다카스기 신이치의 비(非)보도 요청을 받아들여 생긴 일일 뿐이다. 아울러 한국 기자들을 불러 무조건 부인하라고 한국 측에서 방법까지 알려줬다는 기록도 있다.


흥미로운 건 한국 정부도 다카스기 신이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다. 1월 19일 윤찬 외무부 대변인은 다카스기 발언을 보도한 매체를 언급하며 “한일 회담을 깨뜨리려는 음모를 가지고 다카스기 신이치 씨 발언을 조작·유포한 것”, “그런 발언을 할 사람이 한일 회담 수석대표로 취임할 리도 없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다카스기 망언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 시기 한일 관계를 잘 보여주는 풍경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가운데, 그다음 달 한국에 오는 일본 외상도 과거사 문제를 얼버무린다.


서중석 : 시이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하러 한국에 오게 됐다. 2월 17일 공항에 도착해서 한일 회담 전 과정을 통해 딱 한 번 식민 통치와 관련된 (유감 표명) 발언을 하게 된다. 이때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한일 양국의 오랜 역사 가운데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서 깊이 반성하는 바이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도대체 일제의 강점, 35년간의 식민 지배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불행한 기간”이라고만 이야기했다. 그것도 일본이 한국에 불행을 안겼다는 것에 대해서조차 밝히지 않았다. 그냥 ‘불행한 기간이 있었다. 이게 참 유감스럽다. 그걸 반성한다’, 이렇게만 이야기한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 피해를 줬다는 이야기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고, 또 사과한 것도 아니다. 유감이나 반성이라는 건 사과와 아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나.


사실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이 발언을 하는 데 이르기까지도 여러 절차를 밟았다. 처음에는 아예 이런 “반성” 같은 것도 전혀 들어 있지 않았는데, 밑에 있던 외무성 관리들이 ‘이건 꼭 넣어야 한다’고 주장해 (시이나 에쓰사부로가) 언급을 안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이런 발언을 했던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은 한국인이 피해를 봤다는 것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사과나 사죄를 한 것도 전혀 아니다. 다만 불행한 관계가 있어서 유감으로 생각하고 반성한다, 이것이었다.


프레시안 : 이는 일본이 1972년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할 때 취한 태도와도 다르다.


서중석 : 1972년 중일 공동 성명에서 “중국 국민에게 중대한 손해를 끼친 것에 책임을 통감한다”고 하면서 일본이 손해를 끼친 것, 일본이 전쟁 책임과 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1965년 한국에 취한 태도와 아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시이나 에쓰사부로가 이렇게 한 것도 한국 측 태도와 관련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한국 측이 이때까지 얼마만큼 일본에 사죄와 사과를 요구하고 피해가 있었다는 걸 주장했나 하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답사로서 이야기한 내용도 ‘어떻게 한국인 외무부 장관이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느냐’, 그렇게 볼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한다. “과거의 어느 기간에 양 국민에게 불행한 관계가 있었을 뿐 아니라 아직도 국교 정상화가 안 된 것은 심히 불행한 일이다.” 도대체 우리나라 외무부 장관이면서, 일제 강점 35년이라는 엄연한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기간”이라고 했다.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처럼 아주 애매하게 시기를 이야기했다. 또 억압과 수탈로 점철됐고 한국인이 엄청난 피해를 봤으며 일제의 만행도 적지 않았는데 “불행한”이라고만 표현했다. 그것도 “양 국민에게 불행”하다고 했다. 아, 한국인이 불행했고 피해를 봤던 것이지 어떻게 양 국민한테 불행했다고 할 수 있나.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양국에 불행한 기간이라고 말했지만, 이동원은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니었나. 그런데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는 것이 도대체가 있을 수가 있는 건가. 이런 식의 한국 측 대표한테 왜 일본 측이 사과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하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그래도 유일하게, 1964년과 1965년 전 기간에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해 표현한 게 있다면 시이나 에쓰사부로 발언 정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침략에 대한 사죄와 성찰은 찾아볼 수 없는 한일기본조약


프레시안 : 2월 20일, 두 나라는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한다. 그런데 그 내용에 문제가 많았다는 지적이 오늘날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서중석 : 우선 한일기본조약 전문에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한마디도 없다. 제1조에는 외교 관계를 연다고 돼 있고. 제2조에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already)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돼 있다. 이것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을사조약이건 병합조약이건 무효인 것이다’, 이런 주장을 나중에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것(무효 시점)은 일본 패전 이후 한국 정부가 들어선 다음이다’라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고, 문맥으로 봐도 그렇게 해석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이 1905년 및 1910년 당시부터 원천 무효이자 불법이라는 것이 한국 측의 기본 생각이다. 그러나 일본 측은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이 체결 당시에는 합법이었고, 자국이 패전한 후 비로소 무효가 됐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식민지 지배가 합법이었다는 주장이다. ‘편집자’)


지난번부터 거듭 이야기하지만, 한국 정부가 을사조약, 병합조약의 체결 과정에 대해 얼마만큼 연구를 했는가. 나는 별로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연구했다는 자료가 안 나온다. 사실 그 이후,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이 무효라는 것을 학문적으로 상당히 깊이 있게 연구한 것들이 나온다. 이게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상당히 많은 연구를 해야 이런 것들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이지 않나.


그런데 박정희 정부는 과연 을사조약, 병합조약이 무효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이것도 조금 의아심을 갖게 하는 점이 없지 않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3월 16일 기자들과 한 서면 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 “과거 한일 간의 조약은”, 이건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미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써 모든 것이 무효화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며”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건 더 늦은 것이다. 해방 직후도, 독립 정부가 들어선 이후도 아니고, 1951년 이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건 일본 측이 그전에 주장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것에 이어 “따라서 이번 국교 정상화 문제에 새삼스럽게 그 불명예스런 조약들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참 딱하다고 해야 하려나, 이런 문제의 중요성을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 일본 측과 한국 측이 어려운 점은 있었다. 뭐냐 하면 1945년 이전의 군인으로서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부정하는 생각을 갖기 어려웠다는 점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또 하나는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일본 측이 옛날에 어떤 쪽이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로서는 강하게 나가기가 쉽지 않은 측면이 있었던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되는 측면이 있다.


제3조를 보면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총회의 결의 제195(Ⅲ)호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한다”, 이렇게 돼 있다. 이건 전에도 내가 상세하게 얘기했는데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 주권이 한반도 전체에 미친다’, 이것을 명시하려고 노력했다. 일본 측에서 ‘그렇지 않지 않느냐’라고 해서 결국 ‘국제연합 결의에 명시된 바’라는 걸 분명히 밝힌 것이다. 1948년 5.10선거가 치러진 지역에 관할권을 갖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뜻이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사토 에이사쿠 수상이 한일협정 가조인 6일 후인 1965년 2월 26일 이렇게 이야기했다. “청구권 토의 대상은 남한에 국한되고 있다.” 앞으로 청구권 문제 등을 북한과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맺어졌는데, 이 부분도 한국 정부의 설명과 일본 측 설명이 달랐다.


한일기본조약 서명자들이 걸어온 길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덮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그러나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라도 지난날의 잘못을 명확히 정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과거사 문제를 얼버무린 것은 한일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왜 이런 상황이 생겼는지 여러모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서중석 : 앞에서 시이나 에쓰사부로와 이동원의 과거사 발언과 관련해 얘기했는데,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몇 가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중 하나가 비준서를 교환할 때 양측에서 서명한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나 하는 것이다. 한국 측으로는 박정희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 이동원 외무부 장관, 김동조 한일 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가 있다. 김동조 수석대표는 한일 국교 정상화 후 주일 대사를 맡는 사람이다. 일본 측으로는 히로히토 천황,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 수상을 했다고 하는 사토 에이사쿠 수상,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 다카스기 신이치가 있다. 이 사람들의 과거 행적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5년 패전을 계기로 일본 천황의 헌법상 지위는 바뀌었다. 패전 이전, 천황은 일본의 최고 통치권자이자 신성한 존재로 헌법에 규정돼 있었다. 그러나 패전 후 천황은 인간 선언을 해야 했다. 새 헌법은 천황을 일본 국가의 상징적 존재로 규정했다. 천황이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한은 갖지 않는다고 정한 것이다. 헌법이 정한 ‘국사 행위’는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 외교 문서 인증 등의 의례적 역할을 가리킨다. 이러한 천황이 국가원수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린다. 아베 신조를 비롯한 일본 우익은 천황을 국가원수로 명기하고 싶어 한다.


천황의 지위는 패전 이전에도 논란을 일으킨 사안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30년대에 발생한 천황 기관설 사건이다. 천황 기관설은 헌법학자 미노베 다쓰키치가 주장한 학설이다. 천황이 통치권의 주체라는 기존 학설과 달리, 통치권은 국가에 속하며 천황은 그 최고 기관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할 뿐이라는 것이 그 골자였다. 천황의 권력이 헌법에 따라 제한을 받는다는 이런 주장은 1920년대 정당 정치 시대에 확산된다. 그러나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달은 1930년대에 천황 기관설은 국체에 반하는 주장으로 몰리고 미노베 다쓰키치는 우익의 거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편집자’)


이동원은 5.16쿠데타 전에 국방대학원에서 강의한 것으로 군인들과 연줄이 닿았고 그러면서 1962년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청와대 비서실장이 되는 사람이다. 외교 경험이라는 건 잠깐 태국 대사를 한 것,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이 ‘밀어붙이는 데 적합한 사람이다’라고 봐서 이 사람을 썼다는 것을 빼고는 별다른 것을 찾기 어렵다. 김동조는 1943년 규슈제국대학 재학 중에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 일본 정부 후생성에서 근무했다.


정일권 총리는, 잘 알려져 있듯이 봉천군관학교,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충성심을 인정받아서 관동군 사령관의 전속 부관이 됐고 출세가 보장되는 만주군 육군대학에 다녔다. 연변대학의 박창옥 교수한테 예전에 얘기를 들으니, (일제가) 만주인으로는 만주국 황제 부의의 동생 부걸을 제일 내세웠고 한국인으로는 내세운 사람이 바로 정일권이라고 하더라. 하여튼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사람 중에서 이력이 가장 찬란한 사람이었다.


비준서를 교환할 때 일본 측 서명자인 히로히토는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 침략 전쟁 그러니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고 책임자다. 그런데 맥아더 의중이 작용해, 전범 재판을 받기는커녕 천황으로 계속 남았다.


사토 에이사쿠는 알다시피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인데, 통산 장관이었던 1962년 팔굉일우(八紘一宇)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팔굉일우가 침략주의의 다른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세계 일가나 인류애 사상과 연결되는 숭고한 생각이 아닌가 한다.” 일제 말 침략 전쟁을 수행하면서 이 팔굉일우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썼는데도 그렇게 얘기했다. (전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는 팔굉일우는 세계를 일본 천황의 지배 아래 두겠다는 뜻이다. ‘편집자’) 또 일본 국회의 한일기본조약 비준은 한국보다 늦었는데, 일본 비준 국회에서 사회당 의원이 “(1910년) 합병조약이 대등한 조약이냐”라고 물으니 사토 에이사쿠는 “대등한 관계에서 그리고 (한국인의) 자유의사의 토대에서 체결됐다”고 이야기했다.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 괴뢰국 산업부 총무처 차장일 때 그 밑에서 일했다. 그다음에 기시 노부스케가 (중국 침략을 확대하고 미국을 공격한)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군수 차관을 거쳐 통산성 대신이 됐을 때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차관을 했다. 기시 노부스케와 그야말로 한 묶음이 되는 만주 인맥의 핵심이었다. 시이나 에쓰사부로 이 사람은 1963년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고 만주에 오족협화(五族協和)의 꿈을 기탁한 것이 일본 제국주의라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족협화는 일본이 세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의 이념이다. 일본인, 조선인, 만주족, 한족, 몽골족의 화합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본질은 군국주의 일본의 침략 이데올로기였다. ‘편집자’)



▲ 1965년 12월 18일 서울에서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하는 두 나라 외상. ⓒ연합뉴스


일본의 반성과 제대로 된 배상을 가로막은 미국


프레시안 :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비뚤어진 태도는 미국이 전후에 취한 태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서중석 :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를 가지고 수십 년간 크게 논란을 벌이고 있고,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평화와 선린 관계를 맺는 데 큰 어려움을 주고 있다. 특히 아베 신조 정권이 등장한 후 과거사 문제에서 더욱더 후퇴하고 있고 극우적 행보, 전쟁하는 나라로서 강한 행보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들을 하지 않나. 그러면서 빠지지 않고 “아베 신조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다”, 이런 얘기를 하고 그런다.


아베 정부가 제일 극단적이지만, 아베 정부를 포함해 역대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이 왜 과거사에 대해 이렇게 이웃 나라를 불안하게 하고 분노케 하는 잘못된 태도를 보이고 있느냐. 이 부분에도 이승만 정부, 박정희 정부한테도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특히 한일 회담을 보면서 든다.


(물론) 일본인들, 그리고 일본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하지 않는 제일 큰 이유는 일본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냉전 심화와 더불어 크게 바뀌었다는 그 점에 있다. 1946년 1월 연합국 최고 사령부에서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이들을 대상으로) 공직 추방 지령을 내려 약 20만 명이 추방당했다. 그러면서 도쿄 재판에서 일본의 주요 전범들을 처단하는 재판을 진행했다. 이때도 미국과 영국에 대한 일본의 전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가장 큰 피해를 겪은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가해 책임을 충분히 묻지 않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있다. 또 하나는, 이때도 전쟁 지도자에 한정해 책임을 물었고 일본 국민한테도 전쟁 협력 책임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 재판에서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1948년 11월 12일 도쿄 재판에서는 도조 히데키 등 7명에게 사형 판결이, 16명한테 종신형이 내려져서 12월 23일 7명의 교수형 집행이 이뤄졌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 날 친한파 거두로 일컬어지는 기시 노부스케, 고다마 요시오 등 A급 전범 용의자 19명이 석방됐다.


요시다 시게루의 뒤를 이어 1954년부터 1956년에 걸쳐 수상을 맡은 하토야마 이치로, 그리고 하토야마 이치로의 뒤를 이어 1957년 2월까지 수상을 하는 이시바시 탄잔, 이 사람들도 군국주의 정권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연합국 최고 사령부에 의해 바람직하지 못한 인물로 낙인찍혀 숙청됐던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일본 수상이 됐다. 미국의 정책이 전환하면서,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한 사람들이 일본 수상이 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더 나아가 A급 전범으로 지목돼 3년 동안 형무소에 수감됐던, 그리고 1952년 4월까지 정치 활동을 금지 당했던 기시 노부스케가 이시바시 탄잔에 이어 두 차례에 걸쳐 수상이 됐다. 미국이 이런 식의 조치를 한 것은, 과거사 문제를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일본에 크게 심어주었다고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인도네시아, 필리핀 같은 나라들한테 (일본이) 배상을 할 때에도 일본이 평화적 생활을 유지하는 속에서 지불 가능한 액수를 요구하도록 권고하고, 승전국에 의한 일방 배상의 형태가 아니라 각각의 국가가 일본과 교섭해 총액과 내용을 결정하는 식으로 하도록 했다.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물으면서 배상하게 했더라면 그것 때문에라도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했을 수 있었을 터인데, 이런 조치를 미국이 권고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서도 그런 식의 조치를 취했다. 중국은 한국과 함께 제일 큰 피해를 본 나라 아닌가. 이 당시에 미국 등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이 아니라) 대만(자유중국)을 인정했고 자유중국이 국제 사회에서 대륙(중국)을 대표하고 있었는데, 자유중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할 때 자유중국으로 하여금 배상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제일 배상을 많이 받아야 할 나라가 한 푼도 배상을 못 받았다. 아, 7함대가 철수하겠다는데 어떻게 일본에 배상 요구를 하겠느냐, 이 말이다. (1949년 장제스 세력을 대륙에서 축출한 마오쩌둥 세력은 대만까지 무력으로 장악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 즉각 개입하는 한편 7함대를 타이완해협에 배치했다. 이는 마오쩌둥 세력이 대만 전면 공격 구상을 실행하는 것을 억제했다. ‘편집자’) 1972년 일본과 중국의 마오쩌둥 정부가 국교를 정상화할 때는 중국 정부가 아예 처음부터 배상을 일체 요구하지 않겠다고 해버렸다. 하여튼 이렇게 일본 측으로부터 배상을 받지 않은 것, 그것도 일본 측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우리가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 이런 생각을 갖게 하는 유력한 근거가 됐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기묘한 피해 의식과 한국·중국에 대한 멸시 의식의 부적절한 동거


프레시안 : 패전 후 일본 사회에서는 자신들로 인해 엄청난 아픔을 겪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일본인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기묘한 피해 의식을 더 강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중석 : (상당수) 일본인들이 아시아·태평양 침략, 이것을 영광의 역사로 여기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을 일본 교과서만이 아니라 여러 경로를 통해 알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에 갈 때마다 느꼈던 것이기도 한데, 야스쿠니 신사에 진열돼 있는 것들을 보면 영광의 전쟁, 즉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는가를 눈에 잘 보이게 하고 있다. 이런 것도 일본인한테는 야스쿠니 신사에 가볼 때마다 ‘우리가 억울하게 졌다’, 이런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고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일본의 전후 정권은 전전 체제를 이어받았다. 이렇게 전전 체제를 이어받은 정권에서 어떻게 과거사를 반성하겠는가. 또 <한겨레> 김효순 기자가 그렇게 썼던데, 일본인한테는 ‘뉘우친다’는 관념이 없다고 한다. ‘유감이다’, ‘부끄럽다’ 같은 표현은 있는데 ‘뉘우친다’는 관념이 없어서 사죄한다는 의식이 미약하다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한국인과 중국인에 대한 멸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사실은 지금까지 그대로 갖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구보타 망언이 있을 때나, 한일 회담 때 또 다른 망언이 있을 때나 일본인들 중에서 진보 세력(의 다수)까지도 그걸 망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걸 볼 수 있다. 극히 일부 세력만 ‘이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건데 구보타 망언 때는 그런 자료조차 찾기가 어렵다. 21세기 들어서도, 이시하라 신타로 그자 역시 망언을 거듭하는데도 도쿄도 지사에 계속 당선돼 4선까지 하지 않았나. 이렇게 한국과 중국을 멸시하는 의식을 많이 갖고 있는데, 일본인들은 메이지 유신으로 바뀔 무렵부터 신공왕후(진구황후)의 신라 정벌 설화에 대해 소학교 때부터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게 머릿속에 일본인이라면 다 박혀 있고, 임나일본부설이라든가 식민 사관 같은 것들에 의해 한국을 얕보는 사고가 그대로 들어 있다고 그런다. 이런 것 때문에도 한국과 중국에 대한 멸시감이 일본인 대다수한테 많이 남아 있다고 그러는데, 그게 과거사에 대한 태도에 소극적이랄까 오히려 반감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 일본 측의 잘못된 태도와 관련해 이승만 정부, 박정희 정부한테도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적을 앞에서 했다. 굴욕적 한일 회담이라는 비난을 자초한 대목 이외에도 더 짚을 지점이 있어 보인다.


서중석 : 일본인들이 과거사에 대해 그런 태도를 취하게 된 데에는 베트남 파병 같은 것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예컨대 일본인들이 과거에 한국인한테 저지른 만행을 애기하면, 일부 일본인들이 ‘너희는 베트남 가서 그런 짓 안 했느냐. 그리고 베트남에 다 미국 돈 받고 간 것 아니냐’는 식으로 얘기하면서 ‘한국인이 뭘 잘났다고 떠드느냐’고 하는 걸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일본인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게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정부를 보는 눈, 이것도 한국 정부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에 영향을 좀 준 것 같다. 예컨대 일본 정부나 일본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 운동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태도를 취하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일본의 새로운 군국주의자들이 공산국의 독재 군대와 합작할 것이다” 같은 주장이라든가 “일본이 친일하는 한인들과 반정부 한인들을 이용하여 다시 한반도를 병합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식의 주장 같은 건 일본인들이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서 “친일하는 한인들”, 이건 일본으로 망명한 반정부 한국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재일 교포 북송 사건이 있었을 때 이승만 정부에서 북송 반대 운동을 1959년 2월부터 그해 연말까지 거의 1년 내내 벌이지 않나.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벌이는데, ‘도대체 이승만 정부에서 재일 교포에 대해 뭔가 좋은 정책을 한 게 있느냐’, 이런 것도 이승만 정권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줬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또는 이승만의 반일 정책에 대해 ‘이건 너무나도 문제가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그것이 바로 한국인에 대한 태도로까지 나타난다. 아울러 한일 회담에 대한 박정희 정부의 태도 그리고 친일적인 면모, 이런 것들도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낮춰 보려는 생각을 하는 데 일조한 면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 지난날의 잘못을 제대로 성찰하지 않은 일본은 군사 대국의 길로 점점 나아가고 있다. 사진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오른쪽)가 2013년 10월 27일 일본 사이타마현에 있는 육상 자위대 아사카 훈련장에서 열린 관열식(열병식)에서 사열하는 모습. ⓒAP=연합뉴스


독일과는 너무도 다른 일본


프레시안 : 과거사에 대해 독일은 일본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유럽이 오늘날 역사 문제가 첨예한 국가 간 갈등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하는 동아시아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독일의 태도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중석 : 누구나 얘기하는 것이지만 보상과 과거사 사죄에서 독일과 일본이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난다. 간단하게 살펴보자. 1993년 8월 18일 자 일본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독일과 일본이 1988년까지 배상·보상한 액수를 국민 1인당 부담액으로 환산해 비교하면 독일이 일본의 무려 65배가 넘는다고 한다. 독일은 1988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부담했다. 2000년에 들어와서도 독일 정부는 나치 강제 노동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고자 100억 마르크를 마련하고, 일일이 주소를 수소문해 다 배상해주려 했다. (2000년 7월 독일과 미국, 이스라엘, 폴란드, 러시아, 체코, 우크라이나 등은 나치 강제 노동 배상에 관한 국제 협정에 서명했다. 강제 노동에 책임이 있는 독일 기업들과 독일 정부가 각각 절반씩 비용을 부담하고, 강제 노동 피해자들이 독일 기업들에 대한 개별 소송을 더 진행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편집자’) 독일은 희생자가 생존하는 한 배상한다는 원칙에 따라 1990년에는 나치 정권 피해자 배상법, 1992년에는 연금 형태의 배상법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동독에 거주하는 바람에 피해자들한테 배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다 배상했다.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지만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70년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헬무트 콜 총리도 거듭해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언급했고,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무슨 문제만 있으면 계속 과거사에 대해 사과했다. 폰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도 그랬다. 이렇게 계속 참회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나치에 협력한 자들을 최근까지도 체포해 계속 재판에 회부했다. 2013년에는 70년 전 학살에 관련된 나치 전범을 재조사하지 않았나.


이처럼 잘못한 사건이 났다 하면 재조사하고, 나치 전범은 시한에 관계없이 처단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 바로잡기 운동도 계속 벌여 독일은 프랑스와 공동 제작한 역사 교과서를 2006년부터 고등학교에서 교재로 쓰고 있고, 폴란드와도 공동 역사 교과서를 만들고자 오랫동안 노력했다. 바로 이런 것이 기반이 돼 (많은) 프랑스인들이 이제 독일을 침략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러면서 독일과 프랑스가 주축이 돼 유럽공동체(EC)에서 유럽연합(EU)으로까지 통합을 진전시켰다. 이런 것들은 일본과 너무나도 큰 태도 차이를 보여준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일흔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2014-10-22> 프레시안


기사원문: 또 망언한 일본…한국 정부는 왜 덮는 데 급급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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