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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성곽길에서 느끼는 친일노래와 70년대 말 전쟁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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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3) 홍난파 가옥, 사직터널

▲ 서울 성곽길 : 돈의문~사직터널 구간 [자료-유영호]

<홍난파 가옥>, 애절함과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곳


돈의문 터와 경교장을 지나 성곽길을 걸으면 바로 서울시교육청이 나오고 이를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면 붉은색 벽돌로 건축된 고풍스런 양옥집이 하나 있다. 이곳은 작곡가 홍난파가 일제말기 거주하다 숨진 곳으로, 일명 <홍난파 가옥>으로 소개되고 있다. 정원에는 이곳에 대한 안내판과 그의 흉상이 설치되어 누구나 쉽게 이곳을 찾을 수 있으며, 가옥 내부에는 그의 작품과 그의 삶에 대한 여러 전시물들이 설치되어 있는 등 누구나 한번쯤을 가볼 만한 곳이다.


홍난파,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아마도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일 것이다.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봄> 등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노래를 만든 사람이다. 특히 3.1운동 직후 창작된 <봉선화>는 “울밑에선 봉선화야 내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하며 당시 망국노가 된 우리 민족의 감정을 애절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어릴 적 나의 아버지도 술 한잔 하시면 어린 나의 손을 잡고 즐겁게 불러주시던 노래가 바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이었기에 나로써는 더욱 뜻 깊은 곳이었다.

▲ 종로구 홍파동에 위치한 <홍난파 가옥>, 박물관으로 꾸며져 일반인들의 출입이 가능하다. [사진 유영호]

그런데 이처럼 우리 민족 구성원이라면 누구에게나 정겹고 따듯하게 다가올 홍난파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유망한 청년음악가가 있었으니 관심을 끈다. 그는 지난 2013년 한국의 작곡가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 할 만큼 권위 있는 ‘난파음악상’을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친일파 음악인 이름으로 상을 받기 싫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친일반민족의 문제가 사회 깊숙이 살아 숨쉬며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름 우리 민족 망국의 현실을 노래함으로써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 홍난파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의 황민화를 위하여 설립한 <조선문예회>에 가입함으로써 많은 친일가요를 창작하였다. 이리하여 홍난파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음악인 중의 한 명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친일인사들 보면 1937년대 중일전쟁 이후 적극적인 친일행동에 나섰다. 되돌아 보면, 당시 미래를 알 수야 없었겠지만 해방이 10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조국의 미래를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에 기대어 이들은 ‘조국에 대한 양심’을 팔아 버린 것이다. 참 아쉬운 대목이다.


참고로 홍난파가 이곳에 거주한 시기는 1935년부터 1941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였으니 홍난파가 이 집에서 창작된 음악은 대부분 일본의 황민화정책에 충실한 것들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 친일청산에 대한 논쟁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휴전선 이북이 떠오른다. 북은 해방 이후 항일무장세력이 집권함으로써 나름 철저한 친일청산을 이루었기에 그 이후 더 이상 친일청산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오히려 과거청산을 이룬 북이 친일세력에 대하여 더 포용적이다. 남쪽에서는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친일파로 낙인 찍힌 조선 최고의 무용수 최승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월북 뒤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그 뒤 인민배우 및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했으니 말이다. 홍난파 역시 북에서는 그의 “세계관의 제한성”을 이야기하지만 나름대로 “민족적정서가 짙고 인민들의 애국적인 사상감정을 소박하게 체현하고 있는 것으로 하여 그의 작품은 당시의 청소년학생들과 인민들을 반일애국사상으로 불러일으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남측이다. 남북의 중요한 차이는 ‘한쪽은 ‘과거청산’을 이룩했고, 다른 한쪽은 ‘과거존속’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과거청산의 문제는 우리사회가 발전하는 길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청산(淸算)’의 사전적 의미는 ‘과거의 부정적 요소를 깨끗이 씻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정적 요소’를 그의 ‘긍정적 요소’속에 감춰버리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최근 뉴라이트세력이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지난 날 여러 음악가들이 《친일인명사전》에도 오를 만큼 적극적이었던 그들의 반민족적 행위를 감춘 채 그들의 노래를 부르며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애국가>와 <선구자>를 부르면서, 그 가사의 숭고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이를 창작한 안익태와 조두남의 조국애를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봉선화>의 애절함과 <나의 고향>의 애틋함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성곽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 1945년 7월경 윤치호가 자신의 셋째 딸 윤문희에게 전해준 애국가 필사본 [사진-위키피디아]

참고로 홍난파 가옥이 있는 이곳의 동명은 홍파동(紅把洞)이다. 마치 홍난파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것과는 무관하다. 이곳 홍파동은 예전에 여러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홍문동(紅門洞)과 파발동(把撥洞) 두 마을의 첫 글자를 따서 홍파동이 된 것이다.


<사직터널> 위에서 상상하는 1970년대 말 전쟁위기


홍난파 가옥을 지나 북쪽으로 조금 걸으면 이내 사직터널이 나오고 그 위로 걸어갈 수 있다. 지난 조선시대 이 위로 성곽이 놓여있었고, 도성이 처음 완성되었을 600년 전에는 앞서 표석으로 본 <돈의문>이 처음 이곳에 건설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밀조밀 가옥들이 들어선 무척 오래된 동네이다.

이곳은 인왕산 자락이기 때문에 터널이 뚫리기 전 걸어서 넘기에는 나름 꽤 높은 곳이다. 그리하여 1967년 사직터널이 뚫렸는데 이 터널은 서울시에서 가장 먼저 생긴 터널이다. 길이 136미터로 지금에 와서 보면 작은 터널이지만 당시로서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든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기했을까?’를 생각해본다. 아마도 서울사람들의 커다란 구경거리였으며,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 한번쯤 이 터널을 지나가보았다면 주변사람들에게는 꽤 자랑거리였을 것 같다.

▲1967년 뚫린 서울 최초의 터널인 사직터널. 현재는 교통원활을 위해 그 옆에 또 하나의 터널을 뚫어 두 개가 나란히 개통되어 있다. [사진-유영호]

한편, 사직터널 위에서 바라보면 성곽 밖으로는 고가도로로 금화터널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고가도로 아래 <독립문>이 위치해 있었는데, 이 고가도로 건설공사로 인하여 독립문은 원래 위치를 떠나 서북쪽으로 약 70미터 옮겨져 현재의 독립공원 입구로 옮겨진 것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었을까?


하지만 당시 박정희정권은 북에 대하여 크게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1975년 호지민에 의하여 베트남이 공산국으로 통일되면서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박정희는 최악의 상태를 대비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이에 청와대에서 김포공항까지 최단거리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고, 이 때문에 청와대 -사직터널-금화터널- 성산대교-김포공항을 잇는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금화터널과 성산대교는 1977년 4월 동시에 착공하게 된 것이다. 즉 권력자의 안전을 위하여 독립문은 자기의 위치를 잃어 버린 것이다.

▲1970년대 말,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도 청와대에서 김포공항에 이르는 길은 여전히 사직터널-금화터널-성산대교를 거쳐 공항로를 이용하는 방식이 가장 빠른 길이다.[그림-유영호]

그런데 정작 박정희가 죽은 곳은 김포공항 쪽이 아니라 청와대 바로 옆에 붙어 있던 궁정동 안가에서 젊은 여대생을 옆에 끼고, 양주 ‘시바스 리갈(CHIVAS REGAL)’을 마시며, 그것도 인민군이 아닌 최측근 김재규에게 암살 당하였다. 사람운명도 그렇고, 문화재 운명도 그렇고 정말 기구하기 짝이 없다.


* <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은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연재됩니다.

<통일뉴스> 2014-10-23

기사원문: 서대문 성곽길에서 느끼는 친일노래와 70년대 말 전쟁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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