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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촌동 은행나무와 딜쿠샤(DILKUSHA)에 얽힌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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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곽길 : 돈의문~사직터널 구간 [자료-유영호]

<권율 집터>, 그의 최고 전투는 행주대첩이 아니라 이치전투였다.

홍난파 가옥에서 사직터널을 거쳐 약 100미터쯤 계속 직진하면 우측에는 커다란 은행나무와 좌측에는 붉은 벽돌의 고풍스러운 서양식 주택이 함께 있다. 400년을 넘게 이곳을 지키고 있는 저 은행나무 때문에 이곳 동명을 ‘행촌동(杏村洞)’이라 지은 것이다.

 

▲ 권율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진 은행나무. 이곳이 그의 집터임을 알릴 뿐 아니라 동명을 행촌동으로 짓게 한 바로 그 나무이다. [사진-유영호]

이 은행나무 밑에는 이곳에 권율의 집이 있었다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이 은행나무를 권율이 심었다고 하니 이 나무 한 그루를 통해 왠지 내가 조선시대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또 그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3만명의 왜군을 조선군 2천 3백 명과 마을 아낙네들의 힘으로 물리쳤다니 그 후손으로써 이 은행나무에 더욱 애정이 느껴진다. 또한 당시 함께 조국을 위해 싸웠다는 아낙네들의 전투장비로 행주치마가 전부였다니 그 동안 우리에게 ‘정겨운 어머니의 자태’로만 느껴지던 행주치마에 우리 조상들의 민족애와 자주성이 스며있음을 느껴본다.

이처럼 우리는 ‘권율’ 하면 바로 ‘행주대첩’이 떠오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권율 본인은 행주대첩을 자신의 최고 전공(戰功)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의 사위 이항복이 쓴 <백사집>에 의하면 권율은 이항복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원래 웅치와 이치의 싸움이 더 어려운 여건이었는데 내가 여기서 싸워 이겨 호남이 보존될 수 있었네. 그러나 행주 전투는 이미 적의 기세가 쇠한 상태였고 내가 공이 있던 상태에서 이뤄진 전투니 이것이 내가 쉽게 이길 수 있었던 이유이지. 하지만 나는 행주 싸움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 사람 일은 참 모를 일이구만.”


물론 이것이 권율의 의례적인 겸양의 말로도 보이지만 그렇다고 쳐도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 자신의 싸움은 행주산성에서의 전투가 아니라 ‘웅치-이치 전투’였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일본의 역사학계 역시 권율의 관점과 마찬가지이다. 역사학자가 아닌 나로서 이 이상 자세히 모르지만 어쨌든 이것은 ‘양(量)과 질(質)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인 듯하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웅치, 이치로 이동하는 일본군

참고로 이치전투(梨峙戰鬪)는 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이치(배고개)에서 1천여명의 조선군이 2천여명의 왜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궤멸시킨 것이다. 이 전투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편에서 연출되기도 했다.


어쨌든 권율은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절대적으로 압승한 전투, 즉 행주대첩보다 전쟁 전반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준 이치전투를 더 중요히 여겼단 점에서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래서 그런 것일까? 우리는 권율을 부를 때 항상 그 뒤에 ‘장군’을 함께 붙이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무관(武官)이 아닌 문관(文官)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앞서 성곽기행을 떠나며 서대문역 근처에서 처음으로 만난 김종서 역시 세종 때 여진족을 물리치고 6진을 개척함으로써 호랑이장군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역시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다는 것이다.


무관이 아닌 ‘문관출신 장군’, 이것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저 옛날 얘기로만 들리는 것이 현실이다. 해방 후 우리의 현실을 보면 문관출신이 아니어도 좋으니 제발 친일파나 그들의 후예들만은 장군으로 내세워 주지 말기를 바래야 하는 것이 현실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슬픈 군 역사를 아래에 표로 남기고 은행나무 옆 고풍스러운 서양식 주택으로 가보도록 하자.




▲ [정리-유영호]

<딜쿠샤(DILKUSHA)>, 행촌동의 붉은 벽돌집


인터넷지도로 검색해보면 서울 한복판에 힌두어 ‘딜쿠샤’가 나타난다. 가게 이름도 아닌 집 이름이 <딜쿠샤(DILKUSHA)>라니 신기할 따름이다.




▲ 종로구 행촌동 <딜쿠샤(DILKUSHA)>의 옛 모습(윗쪽). 사진 속 건물은 1920년대 지어진 모습이니 당시 서울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살고 싶었을 ‘동화 속 주택’이었음 직하다.(출처 메리 린리 테일러의 회고록, 《호박목걸이》) 아래는 현재의 딜쿠샤 모습.

이곳에 이런 집이 생기게 된 것을 알아보자. 도원수 권율이 이곳에 은행나무를 심고 약 300년이 지난 뒤 조선에서 신혼생활을 하던 미국인 테일러 부부가 1920년을 전후한 어느 봄날 성곽순례를 하였다. 성곽을 쭉 돌다 백악에서 인왕산 쪽으로 내려오다 성벽아래 우뚝 솟아 있는 이 은행나무와 이곳에서 펼쳐지는 전경에 아내는 매료되어 결국 그 뒤 이곳에 그들의 집을 지은 것이다.


딜쿠샤는 이제 그 이름 그대로 테일러 부부에게 ‘기쁜 마음의 궁전’이 된 것이다. 지금은 주변이 온통 주택으로 꽉 차고 딜쿠샤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당시 대부분 초가집이였던 시절, 언덕 위 끝없이 펼쳐진 1만 평의 잔디밭 위에 붉은 벽돌로 우뚝 솟아 있는 그들의 궁전은 그야말로 조선사람들에게는 신세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모양새는 아마도 중세 서양귀족의 집과 같았을 것이다. 약 100년 전의 집이지만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도 위의 사진 속 저런 집에 살고 싶은 꿈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런 곳에서의 신혼생활은 그야말로 ‘동화 속’과 같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런데, ‘이들 테일러 부부는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왜 태평양건너 미지의 조선까지 왔을까’라는 궁금증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이러한 궁금증을 참지 못해 약간의 조사를 해보았다.


테일러는 금광기술자인 아버지를 따라 ‘평소 들어보지도 못한 낯선 땅’ 조선에 왔으며, 아버지와 함께 운산금강을 운영했던 것이다.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운산금강은 평안북도에 있는 것인데 서울에 살았으니 경영층에 속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당시 조선의 경제권이 최초로 서양에 넘어가게 된 운산금광에 대하여 알아보고 망해가는 조선으로 잠시 들어가 보기로 하자.


당시 동양의 ‘엘도라도’라 불리는 운산금광은 아시아 최대의 금광이었다고 한다. 1884년 입국하여 고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알렌이 운산금광의 가치를 일찍이 알아보고 조선정부와 미국 사업가 모스(J. R. Morse)를 연결시켜 1895년 계약이 성립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것으로써 미국공사 실(J. M. Sill)의 말처럼 “미국은 차지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이권을 차지”했고, 알렌의 말처럼 “조선이 얻은 이익은 미국정부와 미국인이 조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런데 운산금광의 진가를 잘 몰랐던 모스가 사업을 바로 밀고 나가지 않자 알렌은 다시 헌트(L. S. Hunt)를 끌어들여 이것을 단돈 3만 달러에 인수시킨다. 이후 금광채굴이 시작되고 어마어마한 금이 쏟아지자 계약은 처음 무관세, 무세금에 그치지 않고, 고종황제에게 주었던 지분 25%마저 얼마 안 되는 돈에 넘겨받으며 계약기간은 1954년까지 연장된다. 이후 채굴 확대를 위하여 1905년 조선최초의 수력발전소인 운산수력도 건설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과의 계약은 이후 을사늑약과 한일합병에도 끄덕 없이 건재했던 것이다. 아마도 1905년에 체결된 미일간의 음모적인 조약 가쓰라-테프트 밀약 덕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당시 운산금광의 채굴량은 세계 3위였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공식적인 자료가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미국인 감독관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1897∼1915년 사이의 금 생산액만도 약 4,950만 원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한강철교공사에 든 비용이 약 40만원 이었고, 일본이 선언한 한일합병의 구실 가운데 하나가, 조선정부가 일본에 진 빚 4500만 원이었으니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얼마나 금이 많았는지 광산에서 조선인부들이 금을 캐면서 혹시 빼돌릴까 봐 자꾸 ‘노 터치(no touch)’라고 소리 친 것이 변해서 ‘노다지’라는 말이 생겼다니 과히 어마어마한 금광이었으리라 추측된다.


뿐만 아니다. 미국의 운산금광 채굴권 획득은 곧바로 영국, 독일,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중요한 경제이권들을 빼앗기는 구실이 되어 조선이 근대화로 가는데 힘이 되어야 할 국내자원은 그야 말로 누더기가 되고 만 것이다.


현실은 이러한데 개화파 서재필은 미국의 경인철도부설권과 운산금광채굴권에 대하여 ‘속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나라와 맺은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유리한 계약’ (《The Independent》1896. 4. 16)이라며 적극 환영하였다.


참고로 운산금광개발을 처음부터 기획한 의사 알렌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해준 것으로, 정변실패로 몰수한 홍영식의 집(현 헌법재판소 옆)을 고종이 하사하여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을 세운 사람이다. 이것이 지금의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이다. 여기서 세브란스라는 명칭은 그 후 병원이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큰 돈을 기부한 사람의 이름이지 설립자의 이름은 아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딜쿠샤 앞에 서서 테일러를 상상해 보기로 하자. 테일러는 처음 아버지를 따라 운산금광개발로 1917년 조선에 왔지만 1919년 고종이 승하했을 때 UPA통신(UPI 전신) 특파원으로 임명돼 고종장례식과 3.1운동을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3.1독립선언서를 입수해 전 세계에 알렸으며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을 최초로 취재해 보도하기도 했다. 그 후 테일러는 1941년 일제의 외국인 추방령에 저항하다 서대문감옥에서 6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1948년 심장마비로 숨졌지만 테일러 부자의 유해는 마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역에 안장됐다.


테일러 한 사람만 놓고 보면 이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 지 헷갈린다. 더 이상의 자세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뭐라 판단 내리기 쉽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금광채굴이라는 ‘국가의 행위’와 조선독립운동의 보도라는 ‘개인의 행위’는 분리시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현재 이곳 딜쿠샤는 테일러가 돌아 간 뒤 소유권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분명치 않은 상태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는 ‘귀신 나오는 집’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귀족 집 같은 이 공간은 저소득층의 삶의 터전으로 활용되어 이제는 여느 다세대주택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 무주택 서민들이 이 집을 쪽방으로 나눠 살며 지금은 ‘10여 가구의 삶의 터전’이 된 것이다. 이곳은 현재 국가소유로 되어 있지만 입주자들이 오랜 연고를 내세우며 이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건축물의 관리, 보호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못하고 있다.


한편, 테일러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추방된 뒤 딜쿠샤의 추억을 잊지 못해 그의 조선생활을 담은 회고록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2014)라는 책을 남겼다. 인간에게 있어서 ‘추억’이란 인종, 국적을 초월해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인간의 추억’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지만 이제 본격적인 성곽이 바로 옆에서 시작되니 인왕산을 오를 생각에 약간 겁이 난다. 그런데 서대문구의 커다란 역사유적지인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가 함께 있는 <독립공원>이 바로 아래에 있으니 그 핑계로 그곳에 잠시 들렸다 본격적으로 인왕산을 오르도록 잠시 숨을 골라보자.


<2014-10-25>통일뉴스


☞기사원문: 행촌동 은행나무와 딜쿠샤(DILKUSHA)에 얽힌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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