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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있어라’, 95년 전 이완용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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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37> 러시아, 시베리아횡단철도를 건설하다

1896년 3월 29일 경인철도 부설권이 미국에 넘어가자 일본 정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일본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 정부에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와의 철도 부설 교섭을 하지 말라고 압박을 해온 터였다. 4월 4일 주한 일본 공사 고무라는 외무대신 이완용을 찾았다. 고무라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모양으로 이완용을 찾은 이유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상실감뿐만이 아니었다. 모스의 경인철도 부설권 확보에 이어 프랑스인 그릴르가 경부철도와 경의철도 부설 특허를 따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간 조선의 모든 철도노선을 서구 열강들에게 넘겨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일본을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게 했다. 화가 잔뜩 난 고무라 공사는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굳히던 1894년의 조일협정을 상기시켰다. 철도부설에 관해 조선과 협의한 ‘조일잠정합동조관’을 들어 미국으로 넘어간 경인철도 부설권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완용은 이에 대한 대답을 이미 준비한 터였다.

잠시 당시의 면담 상황을 가상으로 재구성해보자.

고무라 주한공사 : 외무대신 각하! 어째서 경인철도 부설 계약을 모스와 할 수 있습니까. 조선의 철도 부설은 이미 우리 일본과 조선이 조약으로 합의한 사안입니다. 모스와의 계약은 불법이고 무효이니 철회를 바랍니다.

이완용 외무대신 : 공사께서는 화를 가라앉히시지요. 금번 경인 철도 부설 계약은 주권국인 조선과 미국 사이에 합법적으로 협상을 해서 결정한 사항입니다. 귀국에서 간섭할 사안이 아니지요.

고무라 주한공사 : 지난 1894년의 조일잠정합동조관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미국과의 합의 이전에 이미 우리 일본국과 합의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째서 조선정부는 일본국을 차별하고 배제하려고 하십니까? 조선 정부는 국제적 신의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완용 외무대신 : 제가 알기에는 조일잠정합동조관은 조선과 귀국의 철도 부설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만 담았지, 얼마의 자본금으로 어떤 노선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공사께서 미국과의 협상 내용을 확인하시면 아시겠지만 모스 측과 우리 조선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 시급히 철도를 부설해야 하는 마당에 뜬구름 잡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조일조관이 실현되기를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지요.

고무라 주한공사 : 조일조관이 뜬구름 잡는 내용이라니요. 우리 일본이 일찍부터 조선 교통의 발전을 위하여 열과 성을 다했고 수시로 철도 부설에 나서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은 외무대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이완용 외무대신 : 물론 귀국의 철도 부설 노력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정도의 노력은 다른 나라들도 기울였지요. 어쨌든 경인철도 부설은 이미 조선정부와 계약이 끝난 것이므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모스의 철도가 한양과 인천을 달리게 될 겁니다.

3년을 경과하였는데도 일본이 아직 공사에 착수하지 못했으므로 조일잠정조관의 효력은 이미 소멸된 것으로 본다고 주장하는 이완용 앞에서, 고무라 공사는 이를 갈았다. 고종과 조선의 대신들은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러시아 공사관에 들어가 있는 현실이다. 러시아와 구미 열강들의 힘을 믿고 강경하게 나오는 이완용 앞에서 고무라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국철도의 초기 부설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조선교통사>(일본의 조선철도 근무 경험자들이 만든 단체인 선교회(鮮交會)가 한국철도 부설 당시부터 해방 때까지의 철도 관련 자료를 집대성해 발간한 책)에는 고무라 공사가 외무대신 이완용의 불성실한 태도에 화가 나 분개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3.1운동에 대한 이완용의 반응, ‘가만히 있어라’

친일파로 알려진 이완용이 일본공사를 분개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한국 사람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대표 매국노, 이완용이란 상징성은 뿔 달린 공산당과 맞닿아 있다. 아동용 만화에도 이완용의 캐릭터는 괴기하거나 무시무시한 악당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완용은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며 유학에 대한 학문적 깊이도 갖고 있었다. 효심이 지극하고 한국 최초의 근대적 국립 교육기관인 육영학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수재이다. 지금도 상장에 관용적으로 등장하는 “품행이 방정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우등생이었다.

1896년 창립된 독립협회의 위원장으로 선출, 2대 회장에 취임한 이완용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협회의 사업을 주도적으로 펼쳐나갔다. 독립협회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이완용이 추진하는 개화정책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에도 적극 관여했다. 현재 서대문 공원에 서 있는 독립문을 건설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한 이도 이완용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는 독립문에는 문 양쪽에 <독립문>이라는 석조 현판이 붙어 있다. 무악재 쪽의 문에는 한자로, 서울 시내 쪽의 문에는 한글로 써 있는 현판 글씨의 주인공은 이완용으로 알려져 있다. 이완용은 명필로도 유명하여 뒤에 일본의 다이쇼 천왕이 휘호를 부탁하기도 한다. 독립협회의 운영비 모금액 5분의 1을 분담하고 창립위원장에 2대 회장을 역임할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 누구나 인정하는 명필가 이완용. 독립문 현판의 글씨를 쓸 주인공으로서 이완용만큼 적임자는 없었으리라.

구한말 최고의 개화파 엘리트 이완용. 그는 왜 후대 만인의 악당이 되었을까? 이완용이 발을 딛고 선 바닥이 개인의 사욕이라는 협소한 발판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 역량이 뛰어날수록 사회와 개인 간의 관계와 역할에 대한 성찰이 삶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특히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되면 권력 행위의 공적 역할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이 몸에 배어야 한다. 자신의 성과를 오직 자기 스스로의 뛰어남과 노력의 결과로 간주하고 엘리트주의에 빠져들 때 독선의 함정에 빠진다. 힘없는 자들에겐 군림하고 더 큰 힘에 대해서는 무한한 복종을 다짐하게 된다. 이완용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미국과 일본을 돌아보고 그들의 문화와 생활상을 본 이후에 갖게 된 인식은 무식하고 무지한 조선 백성과 사회에 대한 원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발 디딘 사회와 자신을 끊임없이 분리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민중들을 미개한 집단으로 대상화시키고 스스로를 선각자로 규정하면서 권력을 행사하게 될 때 그 권력은 결국 사회의 독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완용은 그 비상한 머리로 국제관계 속 힘의 역학을 잘 분석해 친미파와 친러파를 거쳐 결국은 이토 히로부미의 품에 안겨 친일파가 된다. 이완용을 움직인 것은 공동체의 이상과 이익이 아니라 엘리트주의에 푹 빠진 개인의 사적 욕망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자리에 오른 사람들 대다수가 개천에서 용이 되었던 무용담 하나씩을 안고 있다. 지독한 가난을 극복했다든지, 과외 한 번 제대로 안 받고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든지, 고학생 시절 눈물 젖은 빵으로 고시를 준비했다든지 하는 경험담은, 종종 그들이 자신의 현재를 과거에 대한 보상으로 인식하게끔 한다. 자신감과 확신이 가득 찬 사람들이 젊은 시절부터 영감 소리를 들으며 대우받고 군림하는 것에 맛 들이면 안하무인이 된다. 관행과 특권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들을 보장하는 카르텔이나 더 큰 권력 앞에서는 얼마든지 충성을 맹세할 수 있다. 한국의 수많은 지배 집단들. 국회의원, 법률가, 언론인, 교수, 고위 공직자들이, 가진 자들과 자본의 이해를 실현하는데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단 한 번도 공화국의 가치, 공공성의 정신을 체화시키는 수련과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여러 정책들, 이를테면 철도나 의료의 민영화, 서민 증세, SNS 감시 같은 것들을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이들 ‘확신범’들의 모습 속에서 또 다른 수많은 이완용을 본다.

한나 아렌트가 유태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난 뒤 말한 “악의 평범성”은, 보편적 과학 법칙처럼 우리 사회에도 적용된다. 성실성, 인자함, 부단한 노력, 개인적 역량의 출중함, 투철한 애국심 같은, 위인전에 등장할 말들로 수식해도 모자랄 사람들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목격한다. 악은 지극히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결국 누가 진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인지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열강의 침탈 시기에는 민족적 자립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고, 지금은 벼랑 끝으로 몰린 이들을 위해 힘을 쏟는 사람들일 것이다. 실업자,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알바생, 장애인, 노인들은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로 표현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들은 공동체를 이루는 대다수다. 이런 다수의 삶은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기본적 생활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공공정책이다. 한국 사회가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되기는커녕, 아비규환의 지옥이 되어가고 있는 이유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줄기차게 공공성을 훼손하는데 앞장서 왔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해 전국적으로 조선 민중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이완용이 한 말의 핵심은 ‘조선 백성은 경거망동하지 말고…가만히 있어라’였다. 오늘날 많은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시민들에게 하는 말과 꼭 같은 말이다.

러시아가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에 착수한 배경은?

청일전쟁의 승자는 일본이었으나 전리품을 챙긴 쪽은 러시아였다.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으로부터 요동반도와 대만, 펑후제도를 얻고 배상금 2만 냥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주도한 3국간섭으로 요동반도의 일본 차지는 무산되었다. 청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러시아와 청의 관계는 밀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계획했던 일에 착수했다. 동청철도의 부설권을 청으로부터 확보하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동방으로의 진출 정책을 추진해왔으며 그 핵심 장치는 시베리아횡단철도였다. 1850년대부터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던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착공이 시작된 것은 1891년이었다. 그러나 9000킬로미터(Km)가 넘는 광대한 노선이 언제 완공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시베리아라는 극한의 환경에서 세계 최장거리 철도 노선을 건설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특히 바이칼호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지역에서의 철도 건설에 부담을 갖고 있었다. 시베리아 철도를 구상하는 러시아 사람들 중에 중국의 영토를 통과하는 안을 대안으로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시베리아의 남부이자 중국의 북부 지역인 만주를 관통하는 철도노선을 건설할 수 있다면 모스크바에서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과 운영에서 많은 이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만주를 통과함으로서 거리를 훨씬 단축시킬 수도 있었다. 이것은 공사기간의 단축, 건설비용의 절감뿐만 아니라 운영과정에서도 운행시간을 절감하게 되는데 그만큼 시베리아 철도의 효용성을 높여주게 된다. 러시아 재무상 비테(Witte)같은 이는 철도를 통한 제국주의 침략의 속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비테는 철도야말로 청을 평화적으로 정복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철도는 총만 들지 않았지 제국이 식민지를 꿰뚫으며 점령할 수 있는 침략 무기였다.

1896년 청은 러시아와 밀약을 맺어 동청철도 부설권을 러시아에게 넘겼다. 철도 부설권만이 아니었다. 철도 노선 30리 이내의 광산 개발에 대해서도 러시아의 독점적 권리로 인정했다. 러시아와 청은 일본에 대한 공동방위협정도 맺었다. 일본과의 전쟁에 패배한 청을 일본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러시아는 청일전쟁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을 압박하고 청을 지원한 대가로 숙원사업이었던 시베리아 철도의 지름길인 만주 관통노선을 얻게 되었다. 청은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났지만, 동청철도가 지나는 만주 곳곳에서는 새로 진주한 러시아 군대를 상전으로 모셔야 했다.

일본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폭발했으나 현실적 무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힘을 키워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각오가 여기저기서 표출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러시아를 주적으로 설정한다. 청일전쟁의 막을 내리는 손잡이가 러일전쟁의 서막을 올리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얻은 것은 동청철도 부설권만이 아니었다. 25년을 기한으로 요동반도 끝의 뤼순과 대련 항을 얻었다. 러시아의 숙원인,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했다. 동아시아와 태평양으로 러시아의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베이스캠프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동청철도와 요동반도의 두 항구를 잇는 남만 철도의 부설권도 한 묶음으로 러시아의 몫이 됐다. 일본이 얻으려고 했던 모든 것을 총알 한 발 안 쏜 러시아가 가져갔다. 일본의 상실감은 러시아에 대한 분노로 전이됐다.

동청철도노선은 러시아의 울란우데 지역, 정확히 만주리에서 시작되어 하얼빈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진다. 만주지역의 중앙을 관통하는 노선이다. 하얼빈에서는 남쪽으로 달려 장춘과 봉천(현재 선양)을 지나 대련과 뤼순에 이른다. 동청철도와 그 부속선 남만철도는 T자형을 이루어 중국 동북 지역의 주요 도시를 연결한다. 러시아의 힘이 그만큼 극동에 강력하게 작용하게 됨을 의미했다. 두 철도를 연결하는 하얼빈은 러시아의 동북아 전진기지가 된다. 유럽식 건축물이 속속 들어서는 등, 근대의 옷을 입은 하얼빈은 동방의 모스크바로 재탄생한다.

유럽과 극동의 교두보, 차가운 동토에서 모습을 드러내다

동청철도와 남만철도는 조선을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압록강과 두만강 위쪽 만주에서 러시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진 철길은, 조선을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심각한 위협이었다. 러시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한 일본이 전쟁을 대비할 수 있도록 조치할 실질적인 방법은, 조선에서 철도를 부설하는 일이었다. 철도가 없다면 전쟁을 수행할 대규모 군대와 물자를 전선으로 보내는 일이 불가능하다. 일본이 조선을 종단하는 철도 건설 계획을 전략적 목표로 삼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동청철도는 시베리아횡단철도의 동쪽 끝을 연결하는 노선이다. 동청철도의 완성은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과 같다. 시베리아횡단철도는 단순히 일본에 군사적 위협을 주는 장치만은 아니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제국주의 정책으로 누리는 이익 구조를 분쇄할 수 있는 시설이기도 했다. 팍스브리태니카(Pax Britanica)라는 견고한 구조에 균열을 가져오게 하는 망치가 철도노선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시베리아 철도는 실크로드의 재현이었다.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혁명적 재현이었다. 수년 걸리는 이동시간을 1주일 정도로 줄이는 일은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철도 등장 이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철도는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상공업을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주요 국가들과 연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첨병이 될 것으로 생각됐다. 당장 대영제국의 차 무역이 커다란 손실을 받게 될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 대부분 영국 배를 이용해 유럽에 수출되는 중국차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완성될 경우, 더 이상 바다를 건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남부로 향하는 카스피철도를 부설한 때가 1888년이었다. 투루크메니스탄에서 나는 면화를 수입해 방적업을 발전시키려는 목적이었는데, 경쟁 상대는 인도였다. 결국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인도의 방적산업과 중국의 차 산업은, 러시아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카스피 철도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타격을 받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해양 강국 영국을 무력화시킬 도구가 바로 영국이 개발한 철도였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프랑스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자본을 댄 것도 오랜 경쟁 상대인 영국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유럽과 극동을 연결하는 교두보.” 1900년 파리 박람회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선전하는 문구였다. 참빗과 담뱃대, 도자기 등이 출품되었던 대한제국관이 동방의 숨겨진 나라를 소개하는 공간이었다면, 러시아는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철마를 알리고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지나는 중앙 시베리아 지역에 크라스노야르스크라는 도시가 있다. 예니세이 강이 이 도시를 가로질러 북극해로 흐르는데 시베리아 철도가 이 강을 건넌다. 강을 건너기 위해 만든 예니세이 철교는 철골 구조물을 얹은 트러스교다. 한강철교의 초기 모습과 비슷하다. 이 예니세이 철교가 1900년 파리 박람회에서 디자인 부문 금메달을 받는다. 1891년 블라디보스토크를 기점으로 착공된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동과 서, 중앙을 여러 공구로 나누어 공사를 진행했다. 1900년대에는 만국 박람회에 존재를 부각시킬 정도로 형태를 갖추었다. 하지만 거대한 동토의 땅 시베리아는 건설 초기 “1년 반 만에 건설을 완료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건설 총책임자 비테의 장담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1916년 모든 노선이 완공될 때까지 걸린 기간은 25년. 건설과정부터 현재까지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품고 있는 사연들은 그 길이만큼이나 끝없이 이어진다.

<2014-10-05> 프레시안

기사원문: ‘가만있어라’, 95년 전 이완용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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