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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도 살아남은 독립문, 이런 사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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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부터 독립했다는 상징으로 제작… 이완용이 현판 글씨도 써



▲ 독립문 주변은 널찍한 공원으로 동네 주민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 김종성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서울시 서대문구 무악재 고개를 신나게 내려오다 보면 도로가에 널찍하게 자리한 독립문공원이 나타난다. 머리 위로 인왕산이 보이고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 나무들이 풍성해 잠시 쉬어가곤 하는 곳이다.

이 독립문 공원엔 명소가 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이외에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서재필 동상 등이 있다. 그 가운데 파리의 개선문을 닮은 이국적인 모양새로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독립문(사적 제32호)이다.


조선 말기 갑오개혁(1894~1896)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독립협회가 세운 19세기 말의 자주민권, 자강운동의 기념물이다.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독립’이란 이름 때문에 언뜻 보면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지어진 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반일(反日)의 상징이 아니라 반청(反淸)의 상징물이다. 조선이 더 이상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독립된 자주국임을 천명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의 주도 아래 고종의 동의를 얻어 진행했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 떠 만든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뜻 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조선의 ‘독립’을 원했던 일제의 검은 속셈


▲ 독립문 앞에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사진 아래)의 주춧돌이 서있다.
ⓒ 김종성. 자료사진

독립문은 그 취지대로 원래 있던 자리에 서 있었던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세워졌다. 영은문은 수백 년에 걸친 조선과 중국의 종속 관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영은문은 ‘은혜로운 이들을 맞이하는 문’이란 뜻의 문이다. 여기서 은혜로운 이들이란 중국 사신(당시엔 청나라)을 말한다. 영은문은 수백 년에 걸친 조선과 중국의 종속 관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독립문 바로 앞에 영은문 기둥을 받치던 밑돌인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아직도 있다.

조선이 오랫동안 취했던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의 상징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지을 수 있었던 건 당시 강화도로 쳐들어와 강제로 조약을 맺은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시대적 상황과 이어진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국제법상 확정된 후, 독립문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6년에 공사를 시작해 1897년 11월에 완공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 후 청나라와 맺은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는 이렇다.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자주독립에 해가 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

일본은 단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국 지위를 무력화하고 아무런 간섭 없이 조선을 삼키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명시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독립문은 ‘독립’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일제 강점기하에서 무사히 존속했다. 독립문은 사대의 상징을 허물고 지은 또 다른 식민지배의 상징이 됐다. 그런 독립문의 운명은 현판 글씨에서 이미 운명지어진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독립문은 중앙에 아치형의 홍예문이 있고, 홍예문의 중앙 이맛돌에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이화(李花, 오얏꽃) 무늬가 방패 모양의 문양판에 새겨져 있다. 이맛돌 상단 앞뒤에 가로쓰기로 ‘독립문’과 ‘獨立門’이라 각각 쓰여있고, 그 양옆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역사의 아픔과 모순 서린 독립문


▲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매국노 이완용이 썼다는 독립문 이맛돌의 현판글씨.
ⓒ 김종성

1924년 7월 15일 <동아일보>의 ‘내 동리 명물’이라는 연재기사에 나오는 내용에 따르면 독립문의 현판 글씨는 당시 명필로 유명했던 조선 귀족 후작 각하가 쓴 것이라 나온다. 그는 바로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고 부귀영화를 누린 매국노 이완용이다. 그가 독립문의 현판글씨를 쓸 수 있었던 건, <독립신문>의 가장 큰 경제적 후원자이자 독립협회 주요 요인으로써 독립협회를 이끌었기 때문이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는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의 주춧돌을 놓는 정초식에 모인 수천 명의 동포 앞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연설까지 했다.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해치려고 한다면 구라파에 있는 폴란드란 나라처럼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등 ‘독립’ 두 글자만 들어가도 순사들이 눈알을 부라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런 시절에도 독립문은 ‘독립’ 두 글자를 달고도 온전히 살아남았다. 탄압은커녕 오히려 당국의 보호와 배려를 받았다. 일본은 항일 운동가들을 서대문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탄압하면서도 바로 옆 독립문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고적 제58호로 지정해 보호했다.

<2014-10-2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제시대에도 살아남은 독립문, 이런 사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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