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일본에 그렇게 당하고도 동남아에 밀린 한국, 왜?

581

body,table,td,input,select,textarea{font-family : verdana,굴림;font-size :9pt;line-height : 140%;}img{border : 0;}A:link {text-decoration:none; color:black;}A:visited {text-decoration:none; color:black;}A:hover { text-decoration:none; color:#3E8FFC;}P{margin-top:2px;margin-bottom:2px;}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1> 한일협정, 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일협정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한국과 일본이 1965년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맺은 조약과 여러 협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청구권 협정(‘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이다. 이것 역시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서중석 : 한 연구자는 “청구권 협정이 청구권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포기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청구권 협정을 보면 이런 주장이 먹혀들 수 있는 요소가 있다. 당시 한국 측은 ‘청구권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한다’고 아주 강하게 주장했다. 일본 측 표현에 의하면 ‘매달렸다’고도 한다. 협정 명칭에 재산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도, 그것도 청구권보다 앞에 있는 것도 흥미롭다. 이건 일본 측이 강하게 넣자고 한 것 같은데, 나중에 문제가 있을 때 대응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한때 역(逆)청구권이라는 것을 주장하지 않았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한국에서 가졌던 재산은 해방 후 귀속 재산이 된다. 그런데 일본 쪽에서는 그것에 대한 청구권이 자신들에게 있다며 한일 회담 과정에서 이 문제를 거듭 제기했다. 어쨌건 재산, 청구권과 함께 이 협정 명칭에 경제 협력이라는 말도 집어넣었다.


청구권이라는 말이 들어간 건 다행이라고 볼 수 있지만 본문을 읽어보면 제1조, 제2조, 제3조가 쭉 나오는데 어떤 데에도 청구권과 관련해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예컨대 강제 징용된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일본 측이 우편 저금 같은 것을 시켰으면서도 그걸 안 돌려줬다는 것도 청구권의 한 내용으로 협의가 됐을 터인데, 본문에는 청구권과 관련해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다. 오로지 ‘무상으로 얼마를, 장기 처리 차관으로 얼마를 일본 정부에서 제공한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돼야 한다’, 이렇게만 돼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제2조에 들어 있다.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 포함) 간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과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니까 청구권 협정에는 청구권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이 경제 협력으로 경제 발전을 위해 얼마를 제공한다는 것만 들어 있고, 그러면서 이제 양국 국민 사이에서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식으로 돼 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굉장히 큰 논란이 돼왔던 것이다.


치명적인 독소 조항 “청구권 문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


프레시안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이라는 제2조가 독소 조항임은 분명하지만, 맥락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일 회담 마지막 단계까지도 일본은 해당 자금이 “청구권의 대가”도, “일본의 일방적인 의무에 입각해 제공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1965년 5월 한일 회담 회의록). ‘경제 협력 자금’ 혹은 ‘독립 축하금’이라는 것이 일본의 기본적인 자세였다. 이와 관련, 김창록 부산대 교수의 지적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담고 있다. 김 교수는 ‘한일 청구권 협정 관련 문서 공개의 의미'(<역사비평>, 2005년 봄호)에서, 35년간의 한반도 지배가 합법적인 것이었다고 여기는 일본 정부는 그 지배와 관련해 대가를 지불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으며 따라서 한국인 개인의 권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적어도 한국인 피해자 개개인에 대해 법적으로 종결됐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청구권 액수도 오랫동안 논란거리다. 금액에도 문제가 많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와 달리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부쯤 되니까 일본에서 그 정도 받아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중석 : 청구권과 관련해 몇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준다, 2억 달러를 장기 저리 차관으로 준다, 상업 차관 3억 달러를 알선한다고 해서 보통 3·2·3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준(準)배상에 해당하는 것은 3억 달러라고 할 수 있다. 이 3억 달러도 그렇고 다른 돈도 그런데, 이것들은 플랜트 구입 등 실물 배상과 서비스 제공 형태로 주게 돼 있었다. 현금으로 주는 게 아니라 일본의 플랜트를 구입하는 데 주로 사용하게끔 돼 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자금을 사용하는 데에서 한국이 얼마만큼 자유로웠는가를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또 3억 달러가 적정한 액수냐, 이것도 계속 논란이 돼왔다. 한국 정부가 1949년에 73억 달러를 일본에 요구하는데, 그 금액을 왜 요구하는지가 자세히 나와 있다. 1949년 한국 정부가 조사, 작성한 건데 1993년 8월 20일 <세계일보>에 난 내용을 보자.


1949년 9월 이승만 정부에서 배상 요구 조서를 만들어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부에 냈다. 거기에는 여러 항목이 있는데, 징용 노무자 10만5151명과 사망자 1만2603명에 한해 일제가 관련 법규 또는 회사 규정상 지급했어야 할 사망 조위금, 장례비와 각종 수당 등을 산정한 부분도 들어가 있다. 강제 연행과 관련해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는 부분이다. 아울러 태평양전쟁 등으로 인한 피해액, 우편 저금 같은 체신 관계 채권 등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게 들어 있다. 한마디로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 사항들, 그러니까 강제 연행 노무자들이 받지 못한 미수금, 태평양전쟁 중 강제 저축으로 빼앗긴 저금 등 미불 임금 등에 대해서도 당시 피해자 신고, 저금통장, 원부 등을 통해 피해액을 상당 부분 집계해 반환을 청구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1965년 한일협정이 얼마나 졸속으로 이뤄졌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배상 요구 조서는 한국 정부가 처음에는 일본에 청구권 방식이 아니라 배상을 요구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 조서에는 일제 강점기 전 기간 동안 일본이 조선은행을 통해 반출한 금과 은의 양이 기록돼 있다. 일본에 뺏긴 미술품, 골동품, 고서적 등의 현황도 담겨 있다. 반환을 요구하는 근거 자료를 갖췄다는 말이다. 징용 노무자 10만5151명과 사망자 1만2603명이라는 수치는 1946년 3월 1일부터 7개월 동안 미 군정청 보건후생부가 신고를 받은 인원이다. 이와 관련, 배상 요구 조서에는 “미 군정청이 조사한 징용 노무자 등록자 수는 실제 해당자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으며 1946년 10월 이후 귀국한 동포도 엄청난 인원에 달해 정부가 철저한 재조사를 고려 중이나 예산 관계로 아직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돼 있다. 아울러 “인적, 물적 피해에 대해서는 36년 동안 입은 피해의 배상을 요구할 수도 있으나 대일 배상 요구 기본 정신에 입각, 이를 불문에 부치고 다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직접 전쟁으로 인한 피해만을 조사, 그 배상을 요구한다”는 내용도 있다. 한편 73억 달러는 일제가 반출한 금과 은 등 현물은 제외한 액수다. ‘편집자’)


박정희 정부는 이런 명부 문제를 일일이 따지지 않았다. 그런데 1949년 이때는 자기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료를 최대한 활용해 하나하나 따져서 73억 달러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건 그렇다 치더라도, 장면 정부가 고사카 젠타로 외상이 내한했을 때 6억 달러를 요구했다고 하는데 (박정희 정부의 3억 달러는) 이것보다도 적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애버렐 해리먼 미국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가 1962년 3월 이케다 하야토 수상과 만났을 때 ‘한 4억 달러를 청구권 금액으로 합의하면 될 것 아니냐’, 이렇게 얘기한 것보다도 적다. 같은 해 9월에는 딘 러스크 국무부 장관이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을 만나 ‘무상 공여액을 3억 달러로 하면 결론이 날지 모른다’는 뜻을 전했다. 무상 공여액이라는 건 경제 협력 자금을 말한다. 결국 1962년 9월의 이런 얘기가 1965년까지 계속된 건데, 1962년 9월 이때의 달러 수준이라든가 일본 정부의 지출 능력과 결부해서 보면 1965년에 3억 달러를 받은 것을 결코 많이 받았다고 보기가 어렵다. 미국 측이 본 것보다도 결코 많다고 하기가 어렵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점령 기간이 4년에 못 미치는 동남아보다도 못한 취급 받은 한국


프레시안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동남아시아도 침략했다. 1945년 패전 후 일본은 독립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배상한다. 그런데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청구권 액수는 일본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배상한 금액과 비교해도 많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이 강점한 기간(한국 35년, 동남아시아는 4년 미만)과 그 강도의 차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서중석 : 일본이 1950년대에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지불한 것보다도 한국은 적게 받았다. 그보다도 더 적다는 점에서도 한국 정부가 많이 받았다고 하기 어렵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승전국으로 돼 있었기 때문에 배상금을 받았다. 예컨대 버마의 경우 두 차례에 걸쳐 배상금을 받았다. 1954년에 배상금으로 2억 달러, 차관으로 5000만 달러를 받았다. 1963년에는 1억4000만 달러를 추가 배상금으로 받았고 차관으로 3000만 달러를 받았다. 배상 금액을 합치면 3억4000만 달러니까, (준배상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3억 달러를 받은) 한국보다 배상 금액이 더 많다. 필리핀은 1956년에 5억5000만 달러를 배상금으로, 2억5000만 달러를 차관으로 받았다. 인도네시아는 1958년에 배상금으로 2억2300만 달러를, 차관으로 4억 달러를 받았다.


(동남아시아 국가 중 배상금을 받은 건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이렇게 네 나라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와 협정을 맺을 때, 1억7000여만 달러의 채권도 포기했다. 베트남은 1959년 3900만 달러를 받았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일본에 대한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고 경제 협력 형태로 지원을 받았다. ‘편집자’)

 

이런 것과 비교할 때 한국이 많이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일본이 이런 나라들에 지불한 시기가 대부분 1950년대였다. 1960년대에는 일본 경제가 훨씬 거대한 규모가 되고 호황이지 않았나. ‘그런 상황에서 3억 달러밖에 못 받았다. 장기 저리 차관 2억 달러를 합쳐도 5억 달러밖에 안 되지 않느냐’, 이런 얘기는 할 수 있겠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일본에서 받아낸 돈마저 온전히 받지 못한 피해자들


프레시안 : 청구권 자금을 받은 방식과 그 사용처도 논란이다. 한국 정부는 피해자들이 받아야 할 금액을 일본으로부터 일괄 수령하는 방안을 관철했고, 그렇게 받은 금액을 피해자들에게 온전히 전하는 대신 기간 시설 건설 등에 상당 부분 사용했다. 한일 회담 회의록 등을 보면, 박정희 정부가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에 이미 피해자 보상이 아니라 경제 분야에 그 자금을 집중 투입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제 건설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다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았고 피해자 몫이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서중석 : 정부에서는 청구권 문제에 대해 처음부터 일괄 타결을 하겠다고 나섰다. 사실 국제 선례에도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에서조차 처음에는 ‘그건 개인별로 사례를 갖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왔다. 왜냐하면 청구권이라는 건 개인들이 피해나 재산상 손실을 본 것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독에서 유대인이나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이웃 나라 사람들에게 보상할 때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국가한테 돈을 안 줬다. 하나하나 개인을 찾아내 개인한테 돈을 주려 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개인한테 주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정부에서 이 돈을 쓰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게 참 문제가 많고 이래서 되겠는가 하는 비판도 있는데, 하여튼 간에 그래서 일괄 타결을 강구했고 일본이 조금 있다가 그걸 들어주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그럴 경우 그 개인에 대해 그래도 자료는 제대로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정부에서 73억 달러 배상을 요구한 1949년 수준의 노력을 5.16쿠데타 직후 군사 정권이나 민정 이양 후의 박정희 정부가 했나? 이런 게 참 문제다. 강제 징용 노무자들의 인적 사항, 사망 혹은 현지에서 부상 여부 등을 어느 정도 조사했나? 이런 걸 제대로 조사했다고 하는 자료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또 청구권의 가장 큰 근거가 될 수 있는 부분, 예를 들면 강제 노동에서 미불 임금, 그리고 강제 저축으로 뺏긴 우편 저금 같은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히 조사한 게 있나? 일본 정부에 자료를 요구하면서 이런 사항을 구체적으로 조사했어야 하는 것인데, 그 부분에 관해서도 참 문제가 많다. (한국 정부의 부실한 대응과 더불어 일본 정부의 비인도적이고 오만한 태도도 문제였다. 일본은 강제 동원 피해자 명단,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 등에 대해 제대로 된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다. ‘편집자’)


5.16쿠데타 직후 군사 정권 및 민정 이양 이후 박정희 정부의 청구권에 대한 태도를 보면, 대표적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말해주듯이 한일 회담은 사실상 청구권 회담이 돼 버렸다. 돈을 얼마 줄 것인가를 둘러싼 교섭이라고 할까, 흥정이 돼버렸다. 그런데 일본 측으로부터 자금을 더 받아내기 위해서라도 자료 수집 등을 제대로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핵심 중의 핵심 문제가 된 건데,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외상과 일대일로 만나서 막말로 ‘쇼부’ 치는 식으로 처리해서 되는 것인가.


2001년 12월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징용·징병자 37만여 명의 명단을 일본 정부에서 넘겨받았으나 우리 정부가 유가족한테 관련 사실을 개별 통보한 사실이 없다고 돼 있다. 물론 명단을 건넨 시기가 1971년에서 1993년까지이기 때문에 1965년 이전은 아니지만, 정부에서 이런 명부를 진작 일본 측에 요구해가지고 처리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1971년 10월, 1991년 3월, 1992년 12월, 1993년 10월에 군인·군속 전사자 명단, 생사 구분이 없는 단순 징용·징병자 명단 등 모두 37만3602명의 명단을 한국 정부에 건넸다. 정부에서 이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탓에, 강제 징병돼 숨진 부친의 제사를 수십 년간 엉뚱한 날에 모시는 일도 있었다. ‘편집자’)


하여튼 이 청구권 자금은 개인들이 피해를 본 것, 재산상 손실을 입은 것에 대해 일본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그런 개인들에게 보상을 해줬어야 하는데 그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970년대에 부분적인 보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다고 볼 수밖에 없다. (1975∼1977년 정부는 사망자 8552명에게 30만 원씩을 지급하고, 7만4967명에게 1엔당 30원을 기준으로 재산 보상을 실시했다. 이들에게 총 91억여 원을 지급하는 선에서 개인 보상을 마무리했다. 이에 대해 1990년 8월 14일 자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청구권) 협정과 그에 따른 국내법은 터무니없이 축소·조작돼 군인·군속 사망자 2만1919명만을 보상 대상으로 삼았다. 부상자나 그 부상으로 사망한 직접적인 피해자들까지도 보상 대상에서 제외했다. 또 보상 대상 기간을 1945년 8월 15일 이전으로 한정함으로써 한국인 전범과 미귀환 군인·군속, ‘정신대’ 등에 대한 보상도 외면했다. 한국 정부는 이 협정에 따라 1975년 보상 대상 사망자 2만1919명 중 까다로운 신고 절차를 마친 9000명에게만 1인당 30만 원씩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로써 끝이었다.” ‘편집자’)

▲ 나눔의 집에 있는 소녀상. ⓒ프레시안(최형락)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프레시안 :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문구는 두고두고 피해자들의 발목을 잡았다. 이와 관련해 하나 더 생각할 문제는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원폭 피해자, 사할린으로 끌려갔다가 그곳이 옛 소련 땅이 되면서 돌아올 길이 막막해진 이들 등의 문제는 한일 회담 과정에서 논의되지도 않았다. 이렇게 버림받은 사람들의 문제는 한일 국교 정상화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서중석 : 한국에는 청구권 협정으로 알려져 있는데 청구권과 관련해 구체적인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은 희한한 협정이라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이 협정으로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고 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모든 당사자의 권리가, 그러니까 개인의 피해까지 이것으로 영구히 소멸하는 건가? 예컨대 일본군 ‘위안부’처럼 나중에 가서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한일 회담 전 과정에서 아예 얘기가 된 바가 없다. 피해 보상을 해준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이런 것에 대해 피해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노무현 정부에서 한때 들고나오자 일본 쪽에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딱 윽박지르는 일도 있었다. (2005년 3.1절 기념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강제 징용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제 36년 동안 수천, 수만 배의 고통을 당한 우리 국민의 분노를 이해해야 할 것”이라며 일본의 배상 책임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치권은 ‘한국 국내 정치용 발언’으로 몰아가거나 “청구권 협정으로 이미 끝난 문제”, “언제까지 사죄를 요구할 건가”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편집자’)


하여튼 이렇게 (권리가) 영구히 소멸됐다고 해가지고 개인이 본 피해까지 보상을 요구할 수 없는 것으로 일본 재판소에서 계속 판결이 나온다. 물론 하급심에서는 아주 드물게 승소하는 경우도 있지만, 최고재판소에서는 예외 없이 이 청구권 협정에 근거를 두고 ‘안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다가 우리 대법원에서 2012년 5월 24일에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까지 소멸된 건 아니라고 판결했다.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에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며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더라. 이런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마무리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 독도(2012년 10월 28일). ⓒ연합뉴스


애물단지로 여겨진 독도…결론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프레시안 : 한일 국교 정상화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독도 문제다. 2012년 대선에서도 이 문제가 논란이 됐다.


서중석 : 독도 문제와 관련해 2012년 선거 운동이 한창일 때 박정희 대통령의 독도 폭파 발언 진위가 화제가 됐다. 그해 8월, 야당의 문재인 후보가 박 전 대통령의 독도 폭파 발언을 소개하면서 역사의식 결여를 비판했다. 그러자 박근혜 후보 쪽에서 반박하고 나섰다. “문 후보는 명백한 허위 사실 유포와 거짓말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박 후보 캠프 조윤선 대변인이 보도 자료를 통해 주장했다. “외교 문서에 따르면 이 발언은 일본 쪽에서 한 것으로 돼 있다”고 하면서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문 후보 쪽이 2004년에 공개돼 국내 언론에도 소개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국무부 대화 비망록을 근거로 역공을 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 수교 한 달 전인 1965년 5월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딘 러스크 미국 국무부 장관과 여러 문제를 논의했다. 5월 27일 딘 러스크 국무부 장관과 만나 “수교 협상에서 비록 작은 것이지만 짜증스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 문제다. (…)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섬을 폭파해 없애버리고 싶다”고 했다. 김종필도 이런 식의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영토 문제에 대해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지 않았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1962년 11월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을 만나고 나서 기자들에게 “농담으로는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고 했다. 이런 발언들을 볼 때 납득하기 어렵지 않느냐는 것이다. (1996년 이 발언이 논란이 되자 김종필은 일본 측이 독도를 자신들 땅이라고 우기기에 ‘너희에게 줄 수는 없다’는 뜻에서 폭파 발언을 했다고 해명했다. 한편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측은 1962년 9월 한일 회담 과정에서 이세키 유지로 일본 외무성 국장이 ‘독도 폭발’ 발언을 한 것을 반박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일본 측이 그런 문제 발언을 했다고 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도 폭파’ 발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편집자’)


프레시안 :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두 나라는 애매하게 처리했다.


서중석 : 독도 문제는 공식 회의에서는 거론하지 않도록 하자는, 서로 여러 차례 거론하면서도 또 ‘(공식 회의에서) 이 부분은 거론하지 말자’는 양해가 되어 있었다. 공식 회의에서는 그렇게 심한 논쟁을 겪지 않았다.


몇 년 전 밝혀진 것이지만 독도 밀약이라는 게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공식 라인을 통해 한국 측과 일본 측이 합의한 것이다. 1965년 1월 13일 김종필의 형인 김종락이 박정희 대통령한테 재가를 받았다고 돼 있다. 김종락은 한일은행 상무로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문서는 중요한 걸 시사하고 있다. 이 문서에는 이렇게 돼 있었다고 한다. “독도·다케시마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첫 번째로 “양국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것에 반론하는 것에 이론이 없다”, 이런 식으로 돼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그렇지만 이 문서는 지금 남아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문서가 어떤 식으로 효력을 발휘했다고 이야기하기가 어렵게 돼 있다. 죽은 문서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노 다니엘이 지은 <독도 밀약>에 따르면, 이 밀약의 2∼4번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장래 어업 구역을 설정할 경우, 쌍방 모두 독도·다케시마를 자국령으로 해 선을 긋고,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한국은 현 상태를 유지하며, 경비원의 증원과 시설의 신설·증설을 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이후로도 계승해간다.” ‘편집자’)


그런데 독도 문제는 막판에 와서 문제가 됐다. 한일협정이 조인되는 1965년 6월 22일 새벽까지 논란이 됐다가 가까스로 합의를 본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이 합의라는 게 정말 합의인가. 한일기본조약처럼 애매하게 돼 있다. 이동원 장관과 사토 에이사쿠 수상의 회담에서 6월 22일 최종 타협이 이뤄졌다고 하는데, 한국은 일본이 요구한 “양국 간의 분쟁”을 수용하는 대신 일본은 한국이 요구한 “조정”이라는 문구를 받아들였다. 한일 정부가 각자 유리한 대로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일협정 조인을 앞두고 교환 공문에 독도 문제를 포함시키느냐를 두고 다툼이 있었던 것인데, 이런 식으로 타협을 본 것이다. 이동원의 표현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었다.


교환 공문은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면 “양국 정부는 별도의 합의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도록 하며 이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에 의해 해결을 도모한다”, 이렇게 돼 있다. 이걸 놓고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고 이게 독도 밀약서의 배경이 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일흔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2014-10-31> 프레시안

기사원문: 일본에 그렇게 당하고도 동남아에 밀린 한국, 왜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