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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1년만에 승소한 근로정신대 피해자 “공부하러 갔다가 위안부 낙인…결국 이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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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나이 12살 때였어요. 일본인이었던 담임 선생님이 일본에 가면 (1년 먼저 근로정신대에 갔던) 언니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죠. 또 중학교, 고등학교 공부도 할 수 있고 언니와 한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할 수도 있을 거라고 했어요. 어린 마음에 언니도 보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어서 일본으로 가겠다고 했죠.”


30일 오후, 1940년대 일본 군수기업 후지코시에 강제동원됐던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정주(84) 할머니는 벌써 70년이 넘게 지난 일이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시 김 할머니에게는 한 살 터울의 언니가 있었다. 김 할머니의 언니도 그가 일본으로 가기 1년 전 ‘일본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고 나고야에 있는 미쓰비시 중공업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 할머니는 언니가 일본으로 공부하러 간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후지코시, 미쓰비시 여자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김정주 할머니가 발언하고 있는 모습ⓒ뉴시스


“공부시켜 준다고 속여 데려가더니 일만시켜…


명이라도 정해진 일 못하면 밥도 안줘 풀까지 뜯어 먹었다”


“여수, 순천, 벌교 등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 1천여명이 함께 갔어요. 그땐 일본에 도착만 하면 먼저간 언니가 마중 나와 함께 할 수 있을 줄 알았죠. 막상 도착해보니 언니는 없었고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더라고요. 군부대 막사 같은 곳이었는데 사방에 철조망이 쳐져 도망갈 수도 없는 곳이었죠. 상하의로 이뤄진 국방색 군복 한 벌과 신발주머니 크기의 하얀색 위생주머니 하나만을 받고 일주일 간 훈련을 받았어요.”


일본에 도착한 김 할머니는 영문도 모른 채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라고 해봐야 일본 천왕을 찬양하는 노래와 군가, 공장에서 하는 일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애초에 공부를 시켜줄 것이라는 말과 달리 일본 군수기업인 후지코시의 도야마 공장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을 당했다는 것이 김 할머니의 설명이다.

“당시 제가 했던 일은 지름 10cm 정도의 쇳덩어리는 깎는 일이었죠. 보통 개인당 하루에 25~30개 정도 씩을 깎아야 했는데 키가 너무 작았던 저는 사과상자 정도 크기의 나무를 두 개 쌓아놓고 올라서서 일해야 했어요. 자칫 다칠뻔했던 적도 많았죠. 일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정말 힘든 건 못 먹고 못 자는 것이었어요.”


김 할머니가 말하는 당시 기억은 참혹했다. 강제동원된 12~18세의 어린 소녀들에게 하루 10~12시간씩의 노동을 강요한 것은 물론 제대로 된 끼니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특히 한 명이라도 하루에 할당된 일을 마치지 못할 경우 소대, 중대 단위로 생활하던 이들 모두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침 밥은 어린아이 주먹 크기의 밥과 아무것도 넣지 않은 된장국이었고 점심은 식빵 절반 크기의 빵뿐이었죠. 일을 다 끝낸 뒤 주는 저녁도 단무지 세 조각에 밥 조금뿐이었어요. 그나마 저녁은 모든 인원이 일을 다 마쳤을 때만 먹을 수 있었죠.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풀이라는 풀은 다 뜯어먹었어요. 그래서 병에 걸리기도 했고 머리가 다 빠지는 경우도 허다했어요.”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식사는 물론 강제동원된 이들에게는 잠조차 쉽지 않았다. 2차대전 중이었기에 밤마다 공습을 위한 미군 비행기가 떴고 이들은 공습 때마다 얇은 국방색 이불 하나만을 두르고 산길을 이동해야만 했다.

“우린 잠을 잘 때도 신발을 벗지 못했어요. 공습경보가 울리면 살기 위해서라도 뛰어나가야 했죠. 불빛조차 없는 산길을 앞사람만 보고 걸어갔어요. 그렇게 피했다가도 날이 밝으면 다시 공장으로 끌려가야만 했죠. 밤에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강제동원돼 일하던 이들은 1945년 해방된 후에도 해방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그해 11월까지 일을 하고 나서야 해방 사실을 알았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에서 비행기 날개를 자르는 일에 동원됐던 언니는 기계에 손가락이 딸려 들어가면서 잘린 채 돌아왔다.



원의 판결을 확인하기 위해 법원으로 향하는 일본 근로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뉴시스


일본으로 끌려간 근로정신대 피해자들,


돌아와서도 위안부 낙인… 폭언 폭행에 끝내 이혼까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고통은 고국인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멈추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일본에 갔다 온 여성들은 전부 위안부로 낙인찍혔어요. 아무 데도 말할 곳이 없었죠. 친어머니는 돌아가시고 계모 밑에서 살고 있었던 저는 가족들에게 조차 말을 하지 못했어요. 그저 속으로 삭혀야 했죠.”


김 할머니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물론 가족들에게조차 손가락질 당하던 상황을 회상하자 다 말라버렸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 쏟아졌다.


“전 이혼까지 해야 했어요. 19살에 결혼을 했는데 제가 33살이 될 때쯤 남편이 그 (근로정신대) 사실을 알게 됐죠. 어떤 말도 믿지 않았고 결국 이혼해야 했어요. 어린 나이에 일본에 끌려갔다가 돌아와서도 내내 고통이었죠. 잊으려고 해도 주변이 기억하는 거예요.”



법원의 판결을 확인하기 위해 법원으로 향하는 일본 근로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뉴시스


재판부 “일본의 반인도적 불법행위 인정, 8천만~1억원 배상하라”


이처럼 고통스러운 삶은 살아오던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일본 군수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 첫 소송을 시작한지로부터 11년 6개월만인 30일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7부(홍동기 부장판사)는 김 할머니 등 근로정신대 피해자 13명과 사망한 피해자의 유족 18명이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해자 1인당 8천만원~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총 배상금은 15억원이다.

재판부는 “피고가 거짓말로 나이 어린 여학생들을 속여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도록 하거나 강제징용해 위험한 노동에 종사하게 한 것은 일본의 불법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 불법행위”라며 “이로 인해 원고들이 받았을 고통을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후지코시 측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동일한 소송을 내 패소한 바 있기 때문에 같은 소송을 두 번 할 수 없고,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됐으며, 소멸시효도 완성됐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같은 판결에 대해 김 할머니는 “우리나라 재판부에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면서도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상을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걱정이 앞선다”고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실제 일본기업들이 잇따른 배상 판결에도 소송전으로 버티는 사이 피해자들은 한 명 두 명씩 생을 달리하고 있다. 히로시마 징용공 피해자들의 소송은 지난 2013년 부산고등법원에서 배상 판결을 받았지만 소송이 길어지는 그 사이 원고 5명이 모두 숨졌다 또, 같은해 서울고등법원에서 배상 판결을 받은 신일본제철 피해자들의 소송 또한 원고 4명 중 2명이 최근 사망했다. 현재 이들 재판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2014-10-30>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인터뷰] 11년만에 승소한 근로정신대 피해자 “공부하러 갔다가 위안부 낙인…결국 이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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