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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과 식민지배, 독재에 상처받은 인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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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6) 필운대·사직공원·국사당



▲ 인왕산 성곽(사직동~창의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인왕산 성곽(사직동 ~ 창의문 구간)

<필운대(弼雲臺)>, 권율의 사위가 된 개구장이 소년 이항복

<서대문독립공원>에서 다시 성곽 길로 돌아오며 성곽 안쪽으로 사직공원과 배화여고가 보인다. 배화여고는 필운대라는 곳으로 사직공원 보다 좀 멀리 있지만 도원수 권율과 관련된 것이니 먼저 가보도록 해보자.

배화여고 뒤뜰에 큰 암벽이 있는데 이 암벽에는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이항복의 집터이다. ‘필운’은 임진왜란을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이항복의 호이다. 그런데 본래 이 집은 권율의 집이었다. 바로 옆집에 살던 사위 이항복에게 이 집을 주고 자신은 앞서 보았던 성밖 행운동으로 옮긴 것이다.

여기 암벽에 쓰여진 ‘필운대’라는 글자는 이항복의 글씨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그의 후손 이유원의 글씨라고도 한다. 분명한 것은 ‘필운대’라는 글씨 옆에 이곳을 설명하는 글은 분명 이유원이 쓴 것이다. 여기에 그는 필운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할아버지 옛날 살던 집에 손님이 찾아왔는데 푸른 돌벽에는 흰구름이 깊이 잡겼도다.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오래 전했으니, 옛 조상들의 의복과 모자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弼雲臺(필운대)’각자. 백사 이항복이 처가인 권율장군의 집에 얹혀 살던 시절에 바위에 새긴 글이라 한다. 사진의 가운데 부분은 이항복의 후손이며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이 쓴 글로 필운대를 설명하는 글이다. [사진-유영호]

우리는 ‘이항복’하면 어려서 이웃에 살던 죽마고우 이덕형과의 ‘오성과 한음’을 먼저 떠올린다. 이런 이항복은 9세때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어린 시절에는 놀기를 좋아하여 동네 불량배의 우두머리로 세월을 보냈었으나, 후에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정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16세에 어머니마저 잃었다. 이런 성장과정을 거쳤지만 당시 영의정까지 지낸 권철(권율의 아버지)은 이항복의 영특함을 개구쟁이 어린 시절부터 알아 차렸으니 역시 대단하다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이항복의 집 감나무 가지가 옆에 살던 권철의 집으로 넘어 갔는데 나무 가지에 달린 감을 그 집 하인들이 따먹자, 소년 이항복이 이를 알고 꾸짖었다. 하지만 하인들은 주인의 권세를 배경으로 오히려 그 감이 담을 넘어 왔으니 자신의 것이라 우겼다. 이에 어느 날 이항복은 권철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의 주먹입니까?”라고 물었다. 이때 이미 자기 하인들이 이항복 집의 감을 훔쳐먹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권철은 하인들을 단속하였고, 이항복의 영특함을 깨달아 아들 권율에게 장차 이항복을 사위로 삼을 것을 권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결국 이항복은 권율의 무남동녀 외동딸을 자기의 아내로 삼게 된 것이다.

이것 외에도 이항복이 권율의 사위가 된 뒤에 벌어지는 재미난 일화들이 상당히 많다. 이항복은 ‘농담의 천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우스개를 즐겼는데, 그의 장인 권율과 마주앉아 틈만 나면 함께 빈정대고 희롱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어느 여름 날 장인이 버선을 신지 않고 입궐하게 한 뒤 임금 앞에서 신을 벗겨 맨발로 만든 사건이며, 또 사위 이항복이 여자 하인과 잠자리 하는 것을 권율이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놀려주자, 이에 뒤질새라 이항복 역시 장인도 비슷한 경우에 곤경에 빠진 것을 놀려주는 등 어릴 적 개구쟁이 기질은 나이를 먹어서도 그대로였다. 이런 이항복이 있어서 그런지 여기 필운대일대는 조선후기 중인문화가 꽃을 피운 인왕산 자락 중에서도 그 중심공간이었다. 권율은 점차 늙어가며 이처럼 장난기 심한 사위와 옆에 살며 골탕 먹는 것이 힘들어서 자기집을 사위에게 주고 성밖으로 갔을 지도 모르겠다는 짓궂은 상상을 해본다.

한편 ‘필운대’라는 글씨로 인해서 배화여고가 있는 이 일대의 동명를 ‘필운동’이라고 정한 것이며, 주변 길이름도 ‘필운로’라 부르고 있다.

<사직공원>을 통해 본 조선궁궐의 배치도,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

필운대에서 다시 성곽 쪽으로 조금 오면 바로 <사직공원>이 있다. 우리가 흔히 사극을 보다 보면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는 말이 무척 자주 나오는데 바로 그 종묘사직의 한 축인 ‘사직’이 바로 이곳이다.

“오로지 왕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때에는 왼쪽에 종묘를 두고 오른쪽에 사직을 설치해야 한다”(좌묘우사, 左廟右社)는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따라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宗廟)를, 오른쪽에 사직단(社稷壇)이 들어 선 것이다.

종묘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지는 곳이며, 사직단은 국가에서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처럼 종묘사직은 유교국가인 조선의 ‘왕실과 나라의 상징’이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궁궐과 함께 종묘와 사직단을 가장 먼저 세웠다.

그런데 《설문(說文)》에는 “도(都)는 역대 천자의 종묘가 있는 곳”이며, 《좌천(左傳)》에서는 “선대의 신주를 모신 종묘가 있는 곳이면 도(都)이고, 없으면 읍(邑)”이라고 하였으니, 한양은 도성, 지방도시는 읍성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종묘는 도읍에만 존재하는 것이지만, 사직은 지방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궁궐을 지으면서 《주례》 ‘고공기’에 따르면 좌묘우사와 더불어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앞은 조정이 들어서고, 뒤에는 시장이 들어서야 한다. 따라서 조선궁궐인 경복궁 앞에는 육조거리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한양은 백악을 주산으로 하여 궁궐을 지었기 때문에 시장은 궁궐 뒤가 아닌 종로에 가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조선의 궁궐은 《주례》 ‘고공기’에 따라 맹목적으로 건설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점은 성곽의 모양에서도 나타난다. 《주례》에서 성곽은 원칙적으로 네모나 원을 지향하지만 조선의 성곽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조선의 성곽은 산을 기준으로 분지에 만드는 것이 원칙인데, 중국은 평지에 만들어 조선과 크게 다르다. 중국의 ‘자금성’을 보면 평지에 네모 반듯하게 쌓고, 그 뒤에 작은 인공산을 건설해 놓았다. 이처럼 같은 유교문화권 속에 있으면서도 조선은 자신의 환경과 조건에 맞는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성곽축조의 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도성이 이렇게 건축되었기에 조선왕조실록에도 《주례》 ‘고공기’를 참조해서 도성을 지었다는 말이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위상을 가진 사직단이 어떻게 훼손되어 왔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1923년 일제는 조선인들의 일체감을 해체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사직단’을 <사직공원>으로 격하시키며 제단을 해체하는 등 훼손해 들어갔다.

하지만 양적으로 훼손된 것은 일제시대보다 오히려 해방 이후 박정희정권 때이다. 속칭 불도저시장이라고 불렸던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다. 1967년 사직터널을 개통하면서 도로가 확장되어 사직단은 축소되었고, 이에 따라 정문의 위치도 14미터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이듬해 수영장이 들어서고, 종로도서관, 단군성전 등이 연이어 들어섰다. 또 1969년, 1970년 각각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동상이 세워졌다. 사직단이란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성스러운 공간인데 바로 그곳에 또 다른 귀신이 오도록 하였으니 귀신들끼리 싸움이 벌어질 판이다. 참으로 한심스러울 뿐이다. 최근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의 모습을 복원하는 등 일부 바뀌기는 하였지만 여타의 것들은 여전히 함께 존재하며 공원으로서의 느낌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내가 도성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제 우리는 조선이 한양에 도성을 건설할 때 갖고 있었던 원칙을 이 정도로 검토하고 오히려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와 지향하는 바에 대하여 상상해 보자.

종묘가 ‘왕실의 정통성’을 나타내며 나라의 ‘과거’를 보여주는 곳이라면, 사직은 ‘국가의 백성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기원하는 곳이다. 따라서 사직은 농업국가의 경제적 안정을 국왕이 책임진다는 것, 즉 국왕이 정치하는데 있어서 그 핵심은 백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 사직단에서 일년에 네 번 제사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날이 가물거나 비가 많이 올 때도 백성의 먹거리를 걱정하며 하늘에 대하여 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 앞서 말했듯이 사직은 종묘와 달리 도읍이 아닌 지방에도 얼마든지 설치 가능하게 하였다. 이것은 ‘백성의 식량에 대한 바람’은 누구의 독점권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을 뜻한다.

그런데 최근 신자유주의 경제질서 속에서 우리정부는 이러한 식량의 문제를 다른 상품들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쌀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하는 정부의 모습은 식량주권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보이기에 걱정이 앞선다. 조선시대는 종묘사직이 국체와 동일시 되었다면, 현재는 ‘종묘’만 의미 있을 뿐 ‘사직’은 서자취급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양도성>에 대한 기초지식

여기부터는 그야 말로 계속해서 성돌로 쌓여진 성곽을 따라 움직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경사도 역시 본격적으로 급격해지기에 숨가쁘게 걸어야 한다. 이제 흙을 밟으며, 성곽을 따라 본격적인 성곽기행을 하기로 하자. 그런데 성곽 안쪽으로 걸을 때와 성곽 바깥 쪽으로 걸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성곽안쪽으로 걸으며 도성 안을 보며 걷게 되면 시야가 확 트여 좋지만 최근 복원된 성곽의 윗부분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 느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성곽 밖으로 걸어 올라가면 조선시대 쌓았던 성돌의 모습과 최근 복원된 성돌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날 뿐만 아니라 전혀 서울같지 않은 산길을 걷는 느낌이 훨씬 커서 마치 등산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 성곽 밖에서 바라 본 인왕산 자락의 한양도성. 시대별 축성의 차이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사진-유영호]

어쨌든 이제 본격적인 성곽을 보며 걷게 되니 성곽 축조의 변화 및 용어 등에 대하여 간단히 학습하고 떠나도록 하자.

서울 성곽은 크게 조선왕조 전체를 통해 네 번에 걸쳐 축조되었다. 태조 때 처음 건설된 뒤 세종과 숙종 그리고 순조 때 크게 보수되었으며, 이러한 성곽은 일제시대 크게 파괴되었다. 그 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일부 복원이 이루어지지만 “박대통령 각하께서 국방업적인 서울 성곽의 성기(城基)를 전면 조사하여 복원 가능한 부분은 모두 복원하도록 분부”하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성곽 복원의 목적이 ‘국방적 관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 2000년대 이르러서야 서울성곽은 ‘역사적 관점’에서 복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 한양도성의 시대별 축성방법 차이 [자료제공-유영호]

성돌의 크기, 모양, 색깔 등을 보면 서로 달라 거기에 세월의 흔적과 시간의 차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태조 때의 것은 무정형의 작은 돌로 쌓아 올린 것이며, 세종 때는 직사각형 모양의 성돌로 쌓는 등 점차 세련된 축조기술의 발전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지난 2013년에 성돌을 육안으로 하나 하나 모두 조사한 결과 그 동안 가로, 세로 약 60cm크기의 정사각형 성돌은 그 동안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이던 오다쇼고의 주장에 의해 숙종 연간에 축조된 것이라는 것이 통설화되었지만 추적 조사결과 숙종 연간이 아닌 순조 연간으로 바꿔야 한다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였다고 한다.


▲ 숙종 이후의 성돌에는 공사에 대한 책임과 보수공사 등을 위하여 성돌에 공사책임자, 공사구간 등을 성돌에 새겨둠으로써 일종의 ‘공사실명제’를 실시하였다. [사진출처-서울시]

또 축성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는 성돌에 공사관련 기록을 새겨두었다. 속칭 이것을 <각자(刻字)성돌>이라 칭하는데, 도성을 견고하게 축성하고 제대로 보수하기 위해 공사구간의 성돌에 책임자 이름, 축성구간 등을 새겨놓도록 한 것이다. 일종의 ‘공사실명제’와 같은 것이다.

당시 한양도성을 97개 구간으로 나누어 각 지역별로 일정구간을 담당하게 하고, 각 구간마다 천자문 순서대로 순번을 정했다. 백악 동쪽의 제1구간부터 ‘하늘 천(天)’자로 시작해서 97구간은 ‘조문할 조(弔)’자로 끝났다.

다음으로 태조 때 도성을 쌓으면서 사대문과 사소문을 모두 만들었다. 이 가운데 <남소문>을 풍수상의 이유로 없애고 <광희문>으로 대체했으며, 도성기행 처음에서 본 것처럼 현재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돈의문>과 <소의문(서소문)>을 빼고는 모두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조선시대부터 있던 것은 대문으로는 최근 문루가 모두 불타고 홍예문을 이루는 돌만 남았으니 실질적으로는 <흥인지문>만 온전히 남은 셈이다. 그리고 소문으로는 영조 때 다시 세우고 1958년 크게 보수한 창의문이 유일하다. 나머지 <숙정문>, <광희문>, <혜화문> 등은 모두 1970년대 중반 새로 복원된 것들이다.


▲ 성곽 용어. [자료제공-유영호]

참고로 이후 도성에 대한 설명에서 관련 용어는 위 사진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성문은 성곽의 일부를 출입 가능하도록 아치형으로 만든 <홍예(虹霓)>와 그 위에 기둥과 지붕을 얹어 ‘루(樓)’를 만든 <문루>로 이루어져 있다. 또 <곡장(曲墻)>과 <치성(雉城)>은 방어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각각 산악과 평지에 쌓은 도성의 모양이다. 그리고 <암문(暗門)>은 성곽에 문루를 일부러 세우지 않고 뚫은 문을 말한다. 유사시에 외적이 주요한 문을 봉쇄했을 때, 적이 모르도록 비밀스럽게 물자를 이송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럼 이런 기초지식을 가지고 성곽을 따라 걸으며 직접 현장 속에서 확인해보도록 하자.

<국사당(國師堂)>, 일제에 의해 쫓겨나 아직도 못 돌아간 슬픈 사당

성곽을 따라 가볍게 산책하듯 조금 오르다 보면 암문이 하나 나온다. 성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다. 잠시 성밖으로 나가 보자. 앞으로 성곽을 걷다 보면 이런 암문을 통해 성곽 안쪽과 바깥쪽을 오가며 걷게 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성곽 밖으로 걷는 느낌은 안쪽으로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계곡도 그대로 나오기 때문에 자연과 역사를 동시에 느끼며 갈 수 있는 새로운 맛이다. 암문에서 나와 조금 가면 저 건너 <선바위(禪庵)>가 보인다. 이 선바위 아래 <국사당(國師堂)>이 위치해 있다.


▲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이 스님모양의 바위를 도성안에 넣느냐 마느냐로 논쟁을 하였고, 결국 정도전의 승리로 도성밖에 놓이게 된 ‘선바위’ [사진-유영호]

그런데 선바위의 기괴한 생김새에 국사당보다 이곳으로 발길이 자연스럽게 먼저 닿는다.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선(禪)’를 따서 선바위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바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데, 하나는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을 받고 천도할 곳을 찾다가 현재의 서울을 찾아냈으나 국운이 500년밖에 유지 못 할 것을 알게 되자 이 선바위에서 천일기도를 하였다고 하며 그 뒤부터 이 바위가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성곽을 쌓을 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넣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크게 논쟁했다고 한다. 무학대사는 부처를 형상하고 있는 선바위가 도성 안에 있어야 불교가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고, 반면 정도전은 도성 밖에 있어야 불교가 쇠하고 유교가 성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는 결론을 못 내리고 돌아와 잠을 자는데 꿈에 4월인데도 눈이 내려고 있었다. 밖을 내다 보니 선바위 안쪽으로 눈이 녹아버린 것이다. 태조는 이러한 현상이 하늘의 계시라 믿고 정도전의 뜻대로 선바위를 성밖에 두도록 결정하였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한양도성을 ‘설성(雪城)’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선바위가 성밖으로 밀려나게 되자 무학대사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탄하였다는 것이다.

선바위 뒤로 넓은 바위가 펼쳐져 있어 그곳에 오르면 맞은 편 안산(鞍山)이 자신의 풍모를 드러내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그 아래로는 앞서 가본 서대문형무소 등 <서대문독립공원>이 한눈에 들어 온다. 잠시 먼 경치를 바라보고 선바위 아래 있는 국사당(國師堂)을 둘러보도록 하자.



▲ 일제시대 남산에서 쫓겨나 인왕산 선바위 아래 위치한 국사당. [사진-유영호]

‘국사(國師)’라 하면 임금의 스승을 일컫는데 이는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자 조선 왕조의 개국공신이랄 수 있는 무학대사를 말한다. 태조는 무학대사의 도움으로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태평성대를 기원하기 위해 백악과 남산에 산신(山神)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 것이다. 즉 무학대사가 입적한 후 남산(목멱산)에 무학대사를 모시면서 국사당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무학대사의 화상(畵像)을 모셔 놓았다. 국사당은 이처럼 본래 남산 정상에 있었는데 지금 그곳에는 봉수대 옆에 그저 표석만 남아 있다.

그런데 왜 남산에서 인왕산 쪽 성 밖으로 옮긴 것일까? 이후 남산 성곽을 따라 걸으며 또 다시 살펴보겠지만 그것은 일본의 식민정책가운데 하나였다. 1925년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현 남산분수대 자리)을 건립하며 그 위에 있던 국사당을 이곳 인왕산 기슭으로 이전시킨 것이다. 일본귀신 위에 조선귀신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나라를 잃으니 귀신까지 천대받았다.

나는 외세에 의해 쫓겨난 우리의 국사당을 다시 남산으로 옮겨 놓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물론 기독교계에서 ‘나라에서 미신을 장려한다’고 크게 반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없지도 않다. 하지만 이러한 무속신앙은 일종의 민속신앙으로서 인간사회가 형성되면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에 미신이기 이전에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무(巫)’란, 글자의 모양 그대로 ‘땅 위의 사람들을 하늘로 연결시켜주는 거간꾼’이다. 기독교의 메시아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신과 사람의 중간에서 신의 지시를 사람에게 전하고 사람의 소원을 신에게 고하는 중개인이다.

참고로 국사당은 남산에 있을 때와 달리 지금은 무학대사는 물론이며 그 외 태조 이성계와 여러 호신신장(護身神將)을 모시고 있다.

<2014-10-30> 통일뉴스

☞기사원문: 외침과 식민지배, 독재에 상처받은 인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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