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분석] 유신 긴급조치에 면죄부 준 대법원 판결에 대해
며칠 전 대법원은 과거 유신헌법하 긴급조치로 인한 사법 피해자들이 당시 수사기관에서 행해졌던 고문 등 가혹행위를 이유로 하는 국가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국가배상 책임의 인정 요건을 제한하는 판단 부분이 포함된 판결을 내렸다. 민변은 바로 성명서를 발표해 ‘유신에게 면죄부를 준 반역사적 판결’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핵심은 유신헌법하 긴급조치가 이후 위헌 무효로 선언되고서 긴급조치가 적용됐던 유죄 판결이 재심을 통해 설령 무죄 판결로 번복되었다 하더라도 형사보상은 마땅히 있겠지만, 이로써 당연히 국가배상 책임이 발생하지는 않으며, 고문 내지 가혹행위와 같이 국가배상법에서 정하는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가 별도로 전제돼야 한다고 밝히면서 국가배상 책임의 인정 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한 데 있다. 긴급조치가 위헌 무효여도 긴급조치에 근거한 수사나 재판 자체는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수년 전에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무효로 판단된 유신헌법하 긴급조치의 법집행과 법적용을 맡았던 수사기관이나 법관의 직무행위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고 주장되는 대목이다. 심지어는 사법부가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줬다고 비판 받는 대목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위헌 무효’ 선언해놓고
이제 와서 반성과 책임 별개라는 건
과거 청산 의지도 역사성도 없이
자기정당화하는 형식논리일 뿐
대법원 판결이 전하는 메시지는
뭐든 시키는 대로 따르라는 것
국가배상 책임의 요건을 제한하는 이같은 대법원의 법리에는 나름 타당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형사법령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는 경우에 예외적으로 소급효가 인정되기 때문에 재심 사유가 되고 무죄 판결에 기한 형사보상청구 내지 국가배상 청구가 문제시된다. 법령의 사후적 위헌 무효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애당초 제정 시점부터 위헌 무효인 법규범이 있는가 하면, 제정 당시에는 비록 합헌이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가치관 내지 사회적 공감대가 변화함에 따라서 사후적으로 위헌 무효가 되는 법규범이 그러하다. 예컨대 헌재는 2009년에 형법상의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긴급조치와 같이 처음부터 위헌 무효인 법령과 이에 따른 국가행위에 대한 평가는 이와는 달라야 한다. 문제는 긴급조치 시대로 상징되는 과거 유신헌법하에서의 ‘국가불법’상황에서의 사법피해자들에게 국가가 행한 불법 그 자체가 아니라 개별 공무원의 불법행위가 별도로 입증되어야만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하겠다는 논리에 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유신헌법에서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위헌적 법령이라 하더라도 이를 그대로 따라서 법집행과 법적용을 한 행위는 국가배상 청구권 행사 대상이 되는 공무원의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궁색한 변명을 앞세우고 있다. 이로써 수년 전 긴급조치를 위헌 무효라고 판단했던 대법원의 입장대로라면 처음부터 법률로서의 실질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서 국민의 기본권을 과잉 제한하는 위헌적 명령에 불과한 긴급조치의 시행과 함께 빚어졌던 수많은 강압수사와 인권침해 그리고 사법부의 ‘권력형 오심’은 불법행위가 아닌 셈이 된다.
2008년에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은 ‘사법 60주년’ 기념식에서 권력형 오심으로 점철했던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사에 대해 사법부 수장으로서 진솔한 사과를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반성과 책임은 별개라는 논리이다. 그 사이에 과연 뭐가 달라졌을까 싶다. 누구의 표현대로 ‘유신의 심장’이었던 분의 딸이 대통령이 됐고, 더욱이 그는 대선후보 시절 인혁당사건의 재심 무죄 판결과 관련해서 두 개의 판결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만큼 과거사 반성에 소극적이었다. 최근에 할아버지의 친일행적과 관련해서 “내 조부가 친일이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라고 강변하는 <한국방송>(KBS) 신임 이사장 이인호씨의 몰가치적이고 빈곤한 역사인식 또한 결코 공교로운 우연만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문제시되는 금번 대법원 판결에는 이처럼 과거 청산 의지와 역사성이 철저히 배제되어있다. 일제강점에 그대로 순응했고, 위헌 무효인 법령에 따라서 법을 집행하고 재판했을 뿐이라는 자기정당화적인 형식논리일 따름이다. 그리고서는 불법국가와 악법 그리고 소극적 법집행자들은 태연하게 멀찌감치 뒤로 물러서 있다. 수많은 유대인들의 죽음에 과연 히틀러만이 책임이 있을까? 아이히만과 같이 한나 아렌트의 표현대로 지극히 평범하기만 했던 법집행자들의 조력이 없이 과연 그 수많은 억울한 죽음이 가능했겠는가? 이와는 달리 금번 대법원 판결이 전하는 메시지는 뭐든 시키는 대로 그저 따르는 게 순리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과거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래서 다시 한번 반문한다. 국가는 정녕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14-11-02> 한겨레
☞기사원문: 정녕 국가는 아무런 책임 없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