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2> 한일협정, 열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일협정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은 비판을 힘으로 누르고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다. 이때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과 하루 차이로 베트남전쟁 전투병 파병 동의안이 통과된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서중석 : 한일협정 비준 반대 운동이 각계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보수적인 세력, 군 장성까지도 놀라울 정도로 그런 태도를 보였다. 이 시기에 야당인 민중당에서는 계속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했다. 그러면서 1965년 7월 23일 민중당 중진인 김도연, 김준연, 서민호, 정일형 등 10명은 당 해체를 요구했다. 그래야 한일협정 비준 저지를 위한 국회의원 총사퇴가 제대로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원직 사퇴에 의견을 같이했던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게 되면서 윤보선이 7월 28일 탈당계를 냈다. 8월 9일 민중당은 의원 58명의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날 윤보선, 김도연, 서민호, 정일형 의원은 탈당 통고서를 제출해 의원직을 상실하게 됐다. 그러나 다른 의원들은 일부만 나중에 탈당하게 된다. 이처럼 민중당이 강경하게 투쟁해야 한다는 주장과 온건론이 계속 맞섰다. 그런 상황에서 민주공화당이 결국 단독으로 8월 13일에는 베트남전쟁 전투병 파병 동의안을, 14일에는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1965년 7월 14일 민주공화당은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베트남전쟁 전투병 파병 동의안과 함께 날치기로 발의했다. 그 직후 민중당에서는 탈당과 당 해체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와 이에 부정적인 온건파의 갈등이 고조됐다. 탈당과 당 해체는 곧 국회의원직 사퇴를 뜻했다. 이 당시 헌법에는 국회의원이 당적을 바꾸거나 소속 정당이 해산되면 국회의원직을 잃도록 규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당 강경파 의원들은 의원직 사퇴서와 더불어 탈당계를 냈지만 온건파 의원들은 사퇴서만 냈을 뿐 탈당에는 반대했다. ‘편집자’)
베트남 파병에 대해서는 나중에 경제 문제와 관련해 자세히 얘기할 것이니, 여기서는 한두 마디만 하고 넘어가자. 미국은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북베트남 폭격을 하게 된다. 바로 그 며칠 전(1964년 7월 30일) 국회 외무·국방위원회에서 이동 외과 병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의 해외 파견 동의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의 적극적인 베트남전 개입에 한국 정부도 공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후 규모가 더 커지는데, 1965년 5월이 되면 전투 부대 파병을 미국이 한국 측에 요구했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해 린든 존슨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했다. 이때 핵심 의제 중 하나가 베트남전쟁 전투병 파병 문제였다. 이에 앞서 1965년 1월, 공병대 등을 비롯한 비전투 병력 파병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비둘기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그해 2월 베트남 땅을 밟는다. ‘편집자’) 그와 함께 미국이 북폭을 넘어 지상군을 본격적으로 보내겠다는 쪽으로 가면서 월남전이 전면적으로 확대된다. 1965년 8월 13일에 1개 사단에 해당되는 병력, 이게 맹호·청룡부대로 불리는 건데, 이 부대를 파병하는 동의안이 통과돼 그해 파병된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8월 14일에 있었던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 통과에 비해 월남 파병 동의안 통과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었다. 별로 주목하지 않았는데, 이것도 아주 중요했다. 월남에 전투 부대를 파병한다는 것은 한일협정 비준과 함께 한미일 안보·경제 체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한국과 미국의 밀월이 최고조에 이르게 됐다는 걸 얘기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남방 삼각 체제에 비해 북방 삼각 체제는 굉장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미 1950년대 말부터 중국과 소련 사이에 심각한 이념 분쟁이 있었다. 그러면서 북한과 관련된 소련, 중국의 삼각 체제가 전면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남쪽의 삼각 체제가 안보·경제로 강력한 토대를 구축하게 되니까 북한은 이에 상응해 군비를 대폭 증강한다. 그러면서 이효순 같은 온건파가 물러나고 강경파가 득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68년에는 1.21 청와대 기습 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그해 가을이 되면 울진·삼척 무장 게릴라 사건이 일어난다. 북한에서는 이것을 남측의 월남전 파병에 대응하는 제2전선이라는 식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건 8월 13일 월남 전투병 파병 동의안 통과는 북한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 통과와 함께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더 짚을 필요가 있다.
그와 함께 일본에서 반대가 아주 치열했는데, 일본에서 전개된 1965년 한일협정 반대라고 할까, 한일 관계 반대에는 베트남 문제가 거의 항상 끼어 있다시피 했다. 그런데 월남 전투병 파병 동의안 통과로 베트남 문제가 더 강하게 부각되고, 파병 동의안 통과를 한일 회담 반대 논리와 연결해 더 강도 높게 얘기하는 걸 볼 수 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하루 차이로 통과된 한일협정 비준안과 베트남 전투병 파병안
프레시안 : 베트남 파병은 1950년대부터 거론된 사안이다. 이승만 정권이 파병 의사를 밝혔고, 박정희도 1961년 11월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을 때 파병을 제안했다. 이때까지는 미국이 베트남에 전면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병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한국군 파병이 이뤄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민주공화당 의원이던 심복 차지철을 불러 파병 반대론을 펴라고 지시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언론이나 야당에서 강하게 반대해야 한국 정부가 미국을 상대로 파병 조건을 교섭하는 데 유리한데, 상황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38선의 연장이 월남이고 동남아이므로 파병에 찬성한다”(민중당 조윤형 의원)는 식의 주장을 하며 파병에 동의하는 야당 의원들도 있었고, “자유 십자군”이라는 표현까지 쓰는 언론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지철은 “월남 특권층 자식들은 대부분 외국으로 도망가 있는 마당에 우리 청년들이 그들 대신 죽음 앞에 나서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하며 청와대의 특명을 나름대로 충실히 이행한다.
눈여겨볼 대목 중 하나는, 이때를 시작으로 1970년대까지 32만여 명의 군인을 베트남전쟁에 보낸 한국에서 정작 베트남전쟁 자체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일각에서 제기한 파병 반대론 혹은 신중론은 대개 ‘한반도 안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거나 ‘실익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식이었다. 베트남전쟁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일어난 반전 운동이 세계를 뒤흔든 1960년대 후반, 한국에선 반전 운동 대신 추가 파병이 이뤄지고 그에 더해 국민들에 대한 통제를 더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한국사의 시간과 세계사의 시간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다시 돌아오면,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 통과 후 다시 시위가 거세게 일어난다.
서중석 : 비준 동의안이 통과되자 이를 무효화하기 위한 시위가 대학가에서 일어났다. 이때는 요즘보다 대학가 개강이 빨랐다. 내가 대학 다닐 때도 8월 20일 전후에 개학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8월 17일 서울대 법대생들이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선언식을 하고 그다음 날에는 규탄 대회를 열었다. 그러면서 20일부터 시위가 격렬해졌다. 8월 23일, 이때는 대학들이 다 개강했을 때인데, 전국 14개 대학에서 1만여 학생들이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면서 시위가 점점 더 격화됐다.
정부는 어느 때보다도 강경한 태도를 이 시기에 보여줬다. 학생들의 반미 구호 같은 걸 크게 문제 삼고 그랬다. (이 시기 시위대의 핵심 구호는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매국 국회 해산”이었다. 그런 가운데, 소수이지만 일부에서 미국을 비판하는 구호도 나왔다. 8월 23일 전남대생 시위에서 나온 “한일협정 체결 주범은 미국”, “우리는 월남 사태에 양키들의 총알 방패가 될 수 없다”가 그것이다. 정부는 전남대생들의 구호와 함께, 같은 날 연세대생들이 외친 정권 타도 구호를 문제 삼았다. 박정희 정권 타도 구호는 1964년 6.3운동 후 잦아들었다가, 1년여가 지난 이때 다시 나왔다. ‘편집자’) 이렇게 박정희 정부가 강경하게 나왔지만, 8월 25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이 다시 시위에 나왔다. 그런데 8월 24일에 이미 집총한 무장 군인들이 학생 시위 현장에 나타났다. 25일에는 군인들이 시위 진압에 본격적으로 투입됐다. 이날 고려대에 난입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무장 군인 500여 명은 시위 가담 여부도 묻지 않고 학생들을 마구 구타하고 잡아갔다. 또 군인들이 고려대 신문사 문짝을 부수고 실험실, 도서관 기물도 파괴하면서 그전에 보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졌다.
(난입 사건 다음 날인 1965년 8월 26일 <경향신문>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게재했다.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전한 이들의 이야기 중 몇 대목을 옮긴다. “무장 군인들이 이학부 정문과 2층 연구실 방문을 모조리 부쉈다. 학생들 뒷머리를 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을 때리면서 끌고 갔다.”(이학부 대학원생) “군인들이 본관의 각 방을 뒤졌다. 303 강의실에서는 독일어 시험을 보고 있었는데 거기까지 침입, 시험 보는 학생을 끌어냈다. 시험 감독에 들어갔던 여러 교수들이 개탄에 못 이겨 울어버렸다.”(법대생) “군인들이 개머리판으로 도서관 출입문에 구멍을 내고 그리로 최루탄 5발을 터뜨렸다. 열람실에 있던 남학생들이 창문을 깨고 2층에서 뛰어내렸다. 군인들은 뛰어내린 학생들을 곡괭이 자루로 때리고, 엎어지자 군홧발로 짓이겼다.”(사학과 학생) “선배 언니가 블라우스를 찢기면서 열람실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군인들이 때리고 발길질을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다. 데려가더라도 때리지 말고 데려가라고 울부짖던 여학생들이 맞았다. 여학생들의 아우성이 통곡으로 변하자 군인들은 3발의 최루탄을 여학생관 바로 앞에 던졌다.”(행정학과 학생) ‘편집자’)
즉각 고려대 교수들이 “일제 때도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고 하면서 학원 난입을 규탄하고 정부의 공개 사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고려대 교수들은 8월 25일 오후 4시 전체 교수회의에서 항의문과 결의문을 채택했는데, 이런 내용이다. “해방 후 20년간은 물론 악랄한 일제하에서도 관헌이 학원에 대하여 이같이 잔학한 폭거를 자행한 것을 우리는 견문하지 못하였으며 전 세계 대학의 역사에 있어서 대학의 권위와 질서가 총검의 공포 아래 이와 같이 유린된 전례를 우리는 찾기 힘든 바이다.” 예비역 장성들, 그러니까 7월 14일에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성명을 냈던 김홍일, 박병권 등 11명도 같은 날(8월 25일)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투쟁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이 “군대까지 동원하여 강권으로 폭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편집자’) 그런데 이날 밤 박정희 대통령은 정부 각료 전원, 서울 시내 각 대학 총·학장, 군 수뇌부를 모두 배석시킨 가운데 대국민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야당과 교수, 학생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사회 공공질서를 파괴하는 데모 행위를 본직으로 알고 있는 일부 정치 학생의 버릇을 근절”하겠다고 강하게 이야기했다. 학교를 폐쇄하는 한이 있더라도 학생 시위를 뿌리 뽑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26일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6사단 병력이 다시 들어왔다. 사단장은 김재규였는데, 6사단은 1964년 계엄을 선포했을 때도 수도경비사령부 병력과 함께 서울에 들어왔던 부대다. 박 대통령이 가장 믿는 사람의 군대가 배치된 것이다.
▲ 1965년 8월 26일 선포된 위수령에 따라 대학 주변에 배치되고 있는 무장 군인들. ⓒ연합뉴스
군의 정치적 중립을 호소한 예비역 장성들, 구속으로 답한 청와대
프레시안 : 이러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가 14년 후인 1979년에는 10.26이 발생하는 관계로 변하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어쨌건 박정희 정권이 또 군대를 동원했음에도 반대 목소리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서중석 : 위수령이 선포됐는데도 학생 시위는 그치지 않고 계속 일어났다. 8월 26일에도 6개 대학, 2개 고교 6000여 명이 한일협정 비준 무효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했다. 고려대에서는 학생 2000여 명과 교수 60여 명이 무장 군인의 학원 난입·난동 규탄 대회를 열었다. (25일에 이어 26일에도 군인들은 고려대에 난입해 폭력을 휘둘렀다. 26일에는 연세대에도 군인들이 난입했다. 대학가가 군홧발에 짓밟히는 일이 거듭되자 ‘학원 방위’가 학생들의 주요 구호 중 하나로 등장하는 일도 생긴다. ‘편집자’)
예비역 장성 11명은 이때 참 잊기 어려운 발표를 한다. 위수령이 선포되자 이들은 8월 27일 오전 ‘국군 장병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대담하다면 대담하다고 볼 수 있는데, 군의 정치적 중립을 호소하고 위수령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자 예비역 장성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이 중에서 김홍일, 박병권, 김재춘, 박원빈 이 네 명은 구속됐다. 위수령에 즈음해 군의 정치적 중립을 이야기한 호소문이 박정희 대통령을 반국가적이고 이적 행위자라고 비난했다는 것이다. (호소문 발표 이틀 후인 8월 29일 검찰은 김홍일을 비롯한 4명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 훼손 혐의로 전격적으로 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기소장에서 이들이 “대통령 박정희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9월 7일 검찰은 이 4명에 대해 내란 선동 혐의로 추가 기소했다. ‘편집자’)
호소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국가에 불행을 불러일으키는 집권자들이야말로 이적 행위자이며 국민 단합을 파괴하는 반민족 행위자이며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반국가 행위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아주 강한 표현을 썼는데, 이것에 대해 구속으로 답한 것이다. 그러면서 변협 회장을 지낸 이병린 변호사 등 28명이 이들을 무료 변론하겠다고 나섰다.
정부는 학원에 대해 초강경 태도를 취했다. 윤천주 문교부 장관도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검사 출신인 권오병 법무부 차관을 신임 문교부 장관에 앉히고 서울대 총장에는 유기천 법대 학장을 앉혀 대량으로 학생들을 처벌하게 됐다. 이에 더해 문교부에서 이른바 정치 교수 명단이라는 걸 작성한 다음에 21명을 처벌하라고 각 학교에 지시하는데, 이것 때문에 또 파란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이 교수들의 상당수는 각 학교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저명한 사람들을 학교에서 그들보다 나이도 적은 사람들이 처벌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그랬다. 서울대 유기천 총장은 문교부에서 징계를 요구한 양호민, 황성모 교수 대신 다른 사람을 처벌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사건이 다시 일어나 재판을 받게 된다. 제2차 민비연 사건인데 정부는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 민비연 간부들이 학생들을 계속 조종·선동하고, 구국학생동맹 같은 걸 조직해 여러 시위를 감행했다고 발표했다. 정부를 전복한 후 총선거를 통해 새로 구성된 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 무효를 결의하도록 모의했다는 혐의를 씌우면서 내란죄로 처단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내란 음모 및 내란 선동은 무죄가 됐다. 다만 폭발물 사용 음모 및 반공법 위반에 대해서는 유죄가 인정돼 김중태에게 징역 2년, 나머지에게는 집행 유예나 무죄가 선고됐다. 항소심에 가서는 6명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학가, 언론, 야당 이런 쪽은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에서는 11월 12일 중의원에서 자민당이 단독으로 한일협정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자민당은 경찰을 동원해 중의원을 둘러싸고 단 6분 만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자민당 의원들과 야당인 사회당 의원들은 집단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편집자’) 12월 11일에는 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비준안이 참의원을 통과한다. 1965년 12월 18일 한일 양국이 비준서를 교환했다. 을사조약 60년이 지난 지 꼭 1개월하고 하루 더 된 날이어서 반대파에선 제2의 을사조약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랬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일본에서도 만만찮았던 한일협정 반대 운동…과거사 성찰은 드물었다
프레시안 :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군인의 본분을 저버린 정치 군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로 인한 악취는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도 군의 정치적 중립을 호소한 예비역 장성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제 일본에서 전개된 한일협정 반대 운동을 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일본에서는 제1야당인 사회당, 그리고 공산당,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 이 세 군데가 중심이 돼서 반대 운동을 했다. 총평은 사회당과 연관된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이었다.
반대 논리는 대개 이렇다. 한미일 군사 동맹, 나아가 미국의 군사 전략의 일환으로 이뤄지는 한일 조약이 일본의 안전과 평화를 위협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사토 에이사쿠 내각이 박정희 정권을 파국에서 구하고 한국에 대한 지배를 실현하려는 위험한 대외 팽창 정책의 의도를 깔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와 함께 많이 나온 주장이, 한일 조약 체결로 인한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 협력은 경제 침략을 기도할 기회를 일본 독점 자본에 준다는 것이었다. 한일 교섭이 한반도 분단을 고착시키고 남북 조선의 평화 통일 의지를 무너뜨려 통일을 저해할 것이라는 주장도 많이 나왔다. 그러니까 통일된 조선 정부와 국교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특히 1965년에 많이 나오는데, 사회당 등이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 주장을 아주 강하게 펴면서 어떤 건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보다) 이게 더 중심이 되는 것도 볼 수 있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한 미국의 태도와 연계해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반대 논리는 이와 비슷하긴 하지만 초점이 조금 다르다. 여기서는 ‘침략과 전쟁에 연결된 한일 회담에 반대하자. 미국 제국주의는 일본 군국주의 세력과 박정희 일당을 결탁시켜 조선의 분열을 고정화하고 남조선을 언제까지나 반공 최전선 기지로 확보하려고 기도하고 있다. 침략적인 동북아시아 군사 동맹을 엮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했다. 또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과 독점 자본이 미국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 전쟁에 가담해 대외 확장 야망을 실현하려 하고 있다’고 봤다.
민단 쪽에서도 청년들을 중심으로 반대 시위가 상당히 많았다. 굴욕적 저자세, 청구권 문제, 평화선 문제를 많이 들었고 그와 함께 한국 정부가 재일 교포에게 너무 신경을 안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 같은 단체도 생겼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재일 조선인의 생활과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일관되게 조선인을 적대시해서 억압 정책을 펴고 있고, 박정희 정부는 민족의 이익을 팔아넘기고 피도 눈물도 없는 기민(棄民)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비난했다. 기민 정책이라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도 1950년대에 반대 세력이 많이 썼던 말이다.
재일본 조선인의 교육 문제와 관련해 비판하는 성명이나 시위도 있었다. 교수, 과학자, 지식인, 학생, 노동자 이런 사람들도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도쿄도에 있는 대학의 교수들이 연합해서 대학 교수단 성명을 냈는데 여기에는 교수, 조교수, 강사 등이 포함돼 있었고 도쿄대를 비롯한 중요 대학이 다 들어 있었다. 1000명 정도나 서명했다.
프레시안 : 일본에서도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상당한 규모로 전개됐지만, 초점과 논리는 역시 한국과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서중석 : 일본에서도 반대 운동이 사실 만만치 않았다. 안보 투쟁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1960년대가 일본에서 시위 투쟁이 가장 많았던 때 같다. (안보 투쟁은 1959∼1960년 일본에서 일어난 대규모 평화 운동이다. 군사 동맹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미일상호방위조약을 개정하려는 것에 반대해 야당은 물론 수많은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기시 노부스케를 총리에서 물러나게 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조약 개정을 막지는 못했지만, 전후 일본 민주주의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편집자’) 1964년 12월부터 참의원에서 비준하는 1965년 12월까지 전국 각계 약 2815개에서 총 188만 명이 집회, 시위에 참여한 걸로 돼 있다. 그러니 적은 게 아니다. 그런데 과거사 문제를 언급한 시위는 적었다. 이 점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소수이지만 과거사 문제를 언급한 데가 있다. 일본조선민족교육문제협의회라는 일본인 단체에서 낸 성명서를 보면, 일제 교육 특히 황민 교육이라는 동화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인의 조선 인식을 왜곡하고 조선 민족 멸시 사상을 키워온 것이 황민 교육을 통해 오늘날 일본인한테 깊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일한 조약을 보면 재일 조선인 학교 교육을 동화 정책 강화 쪽으로 이끌어가려는 것 아니냐’, 이런 논리다.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일본에서 그렇게 거세게 일어났지만 과거사 문제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었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상당히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일본역사연구회위원회에서도 9월 11일 ‘일한 조약에 반대하는 역사가의 모임’을 열고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서도 그런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을 우리는 많이 생각해봐야 한다. 예컨대 “일본 국민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를 엄중하게 단죄하고 민족적 멸시감을 자기 자신 안에서 짜내버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조선 인민의 자주적, 민주적 지향을 압살하고 그들로부터 나라와 민족을 빼앗아버렸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몇 군데에서 이런 지적이 나왔다는 건 참 소중하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일본인들이, 진보 세력조차도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걸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일흔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2014-11-1> 프레시안
☞기사원문: ‘한국전쟁 과거사 정리 특별법’ 국회 토론회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