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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모 1·2심’ 각각 1년 안팎 걸렸는데…대법에선 3년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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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서울 서린동 사무실에서 열린 현판식에서 강만길 초대 위원장(현판 왼쪽) 등이 박수를 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월요리포트] ‘친일 언론사주’ 재판

“나는 이번 전쟁에 있어 황군(皇軍)이 가는 곳 어데고 대적이 있으리요마는 하늘이 벌하는 것이기 때문에 승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있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2월1일 방응모(1884년생·1950년 납북) <조선일보> 사장은 자신이 만든 잡지 <조광>의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 특집에 ‘타도 동양의 원구자(원수)’라는 글을 직접 썼다. 1935년 창간된 <조광>은 40년부터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동조하고 내선(일본-조선)일체를 강조하며,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논설과 문예물을 싣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방응모는 1944년 군수회사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주주와 감사를 지냈다. 1941년 임전대책협력회 준비위원으로 서울 종로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전쟁 협력 필요성을 강조하며 전시채권을 팔았다.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관변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과 평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와 선전부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방응모는 이런 활동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친일진상규명위)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결정을 받았다. 이에 손자인 방우영(82)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2010년 1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냈다.

1·2심 모두 친일행위 판결했지만

군수회사·총독부 관변단체 활동

규명위 판단근거 일부 인정 안해

상고 이후 선고 늦어지자 의구심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만 남아”

“대법원, 언론권력의 힘 신경 쓰나”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재판장 서태환)는 그해 12월 친일진상규명위가 근거로 제시한 세 가지 행위 가운데 <조광>을 발행하고 일제침략에 동조하는 글을 쓴 행위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평의원 활동을 친일행위로 인정했다. 그러나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발기인·감사로 일한 것은 “의사 결정에 관여해 회사를 ‘운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친일행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1년 남짓 지난 2012년 1월 서울고법 행정7부(재판장 곽종훈)도 1심처럼 <조광> 발행을 친일행위로 판단했다. 1심이 인정하지 않은 군수회사 감사 활동을 친일행위로 인정한 대신, 총독부 관변단체 간부로 활동한 것은 “구체적 협력행위를 입증할 자료가 없다”며 친일행위에서 제외했다.


정부와 방 명예회장은 상고했고, 사건은 대법원 1부(주심 김용덕 대법관)에 배당됐다. 양쪽은 상고이유서와 답변서 및 상고이유보충서를 한차례 더 주고받았지만 대법원은 3년이 다 되도록 판단을 내놓지 않고 있다. 대법원은 “사건 수가 워낙 많아 2년 이상 선고하지 않은 장기미제 사건이 쌓이는 것일 뿐, 정치적 고려 때문에 선고를 미루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전 친일진상규명위 김민철 기획총괄과장(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방응모는 총독부 관변단체 간부로 활동하면서 이를 충실히 실현하기 위해 태평양전쟁 찬양, 징병 선동 글을 잡지 <조광>에 실었다. 친일단체는 물론 관변단체의 간부로서 다양한 친일행위를 했는데 항소심 재판부가 인정하지 않았다”며 “다른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경우는 대법원이 관변단체 간부로 활동한 것만으로도 친일로 판단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읽히는 사건만 대법원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법원의 침묵은 여러 말들을 낳고 있다. ‘언론권력’의 힘을 신경쓰는 게 아니냐는 게 한 시각이다. 한 법조인은 “법원이 가지고 있는 사건은 법원의 캐피탈(자본)”이라고 말했다. 선고를 미루는 게 법원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방편이라는 해석이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2014-11-3> 한겨레

☞기사원문: ‘방응모 1·2심’ 각각 1년 안팎 걸렸는데…대법에선 3년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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