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리포트] ‘친일 언론사주’ 재판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1891~1955) 사건은 ‘재판을 미뤄 봐주는’ 사법부 행태의 전형을 보여준다. 재판부는 수시로 교체됐고, 기일은 띄엄띄엄 잡혔다. 그 결과 항소심 재판은 4년째 계속 ‘심리중’이다. 변론 횟수보다 기일 변경이 더 많을 정도인데, 이쯤 되면 재판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친일진상규명위)는 2009년 11월 ‘3차 진상규명 보고서’를 내고 김성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다. 규명위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근거는 △징병제 축하대회 참석 및 학도병 권유문 기고 △조선총독부 외곽단체 간부로 참여 △시국강연회·라디오방송을 통한 태평양전쟁 협력 강조 세 가지다. 이듬해 1월21일 김성수의 증손자인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과 인촌기념회는 이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친일진상규명위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2010년 7월1일 첫 변론이 열렸고, 이후 5차례 기일 변경과 8차례 변론을 거쳐 2011년 10월20일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재판장 조일영)는 “김성수의 활동이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으로 이름만 올린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그 활동 내역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며 세 가지 가운데 두 가지가 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그러자 양쪽이 모두 항소해 사건은 서울고법으로 넘어갔다. 서울고법은 사건을 행정6부(재판장 임종헌)→행정3부(재판장 이대경)→행정5부(재판장 김문석)→행정7부(재판장 조용호)로 연달아 재배당하면서 10개월을 흘려보냈다. 심리 중간에 법관 정기인사로 재판부 구성이 바뀌기도 했다. 2013년 2월 민중기 부장판사가 서울고법 행정7부장으로 옮겨오면서 5번째 재판장이 됐고, 한달 뒤에는 주심을 포함한 배석 판사들이 바뀌었다. 4차례 변론이 진행됐고 12월5일 변론이 종결됐다.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은 이때 “친일반민족 행위자 결정 처분 행정소송을 낸 당사자로서 심리중에 있는 사건에 대해 의견을 드리는 것이 사리에 맞는지 저어된다”면서도 증조할아버지(김성수)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담은 탄원서를 법원에 내기도 했다.
재판을 마무리하고도 선고기일을 잡지 않던 재판부는 4개월 뒤(올해 3월4일) 갑자기 심리가 더 필요하다며 변론재개를 결정했다. 그사이 판결문을 집필하는 주심 판사는 또 바뀌었다. 원고 쪽 변호인단에 엘케이비(LKB)앤파트너스가 합류하면서 변론 방향도 수정됐다. 기존의 방어 논리가 “일제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이 소극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던 반면, 5월22일과 10월16일 2차례 변론에서는 “이 정도 친일행적은 당시 저명인사들한테 일반적인 일이었다. 왜 김성수만 유독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했냐”며 공세적 논리를 폈다.
▲2009년 11월9일 <동아일보> 사설.
동아일보 쪽은 친일진상규명위 조사 대상이었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지 않은 이들과 비교해야 한다며 장면 전 총리, 무용가 최승희 등에 대한 규명위의 조사·심의 자료 열람·복사를 요청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국가기록원에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조사 대상자의 친일반민족행위와 관련한 위원회 조사 내용을 공개하지 못하도록 돼 있지만, 국가기록원은 ‘당사자 외에는 조사 기록을 내줄 수 없다’는 내부 규정까지 바꿔가며 자료를 내줬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김성수 친일’ 재판은 행정재판 항소심 평균 재판일(231.5일·<2014 사법연감>)을 훌쩍 뛰어넘어 1000일이 넘도록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서울고법은 “(사건 재배당이 거듭된 것은) 법관 인사에 따라 재판부가 바뀐 경우도 있었고, 재판장이 스스로 재판을 회피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재판 자체가 길어지는 것은 사실로 보이나 구체적 재판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항소심 다음 재판은 12월11일에 열린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2014-11-02>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