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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4) 반민특위 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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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불기소, 병보석, 무죄, 반민법 폐지… 이렇게 허망하고 통탄할 일이 또 있을까

■ 이광수·최남선, 그들의 고백인즉

“성전(聖戰)의 용사로 부름 받은 그대 조선의 학도여, 지원하였는가./ 학병을 그래 무엇으로 주저하는가, 부모 때문인가./ 충 없는 효 어데 있으리. 나라 없이 부모 어데 있으리. 그대 처자 때문에 주저하는가./ 자손의 영광과 번창이 이 싸움 안 이기고 어데서 나리.”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으로 이름난 소설가 춘원 이광수. 상해 임시정부 활동에도 참여하고 <흙>과 <민족개조론>을 썼는가 하면, 도산 안창호와 함께 옥고도 ?치른 그가 어떻게 조선 젊은이들에게 일본의 학병에 나가라는 이런 시(?)를 썼을까?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어 일본을 오가며 학병 권유 연설을 했던 그는 해방이 되자 “내가 친일을 한 것은 민족을 위해서 부득이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가 수감된 후 감방에서 한 주일 동안 밤새워 썼다는 ‘나의 고백’도 참회하는 말은 별로 없고 시종 친일행각의 합리화에 급급해 보였다. 그는 구속된 지 채 한 달이 되기 전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오등은 자에…’로 시작되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쓴 당대의 명문장가 육당 최남선. 그가 일제 협력자로 변절하자 위당 정인보는 육당의 집 대문 앞에 술을 부어놓고 “이제 우리 최남선은 죽고야 말았다”며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본시 그는 3·1운동에도 참가하고 그 일로 34개월이나 복역한 문화계의 지사였으나 나중엔 일본의 중추원 참의와 만주 건국대학의 교수를 맡는 등 친일 지식인의 상징으로 변모한다. 그는 반민특위 조사관의 체포에 응하면서 “시대적 현실을 역행할 수 없다”고 사학자다운 한마디를 했으며, 마포형무소 수감 중에 쓴 장문의 ‘자열서(自列書)’에서 “다시 무슨 구설을 늘려 감히 문과식비(文過飾非·허물도 꾸미고 잘못도 꾸민다)의 죄를 거듭하랴”라는 유식한 참회록을 남겼다.

 ▲일러스트 | 박건웅

■ 친일 경찰 노덕술의 석방을 요구한 이승만

일본 경찰 출신의 노덕술. 반민특위 검찰관(서성달)의 기소장에 의하면, 그는 보통학교 3년 중퇴 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상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일본 경찰의 순사(순경)가 된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사법주임, 보안과장 등 요직을 거치는 27년 동안 고등경찰의 사상관계 사건을 많이 다루어 일본 정부의 훈장까지 받은 대표적 친일 경찰이었다. 그는 많은 민족운동가, 독립지사 그리고 반일 학생 등을 검거 고문한 ‘악질’로 유명했다. 해방 후에도 경찰에 남아 서울시경 수사과장으로 있으면서 잔혹한 고문치사사건, 반민특위 요인 암살음모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수배된 중에도 시내를 활보하고 고관 집을 무상출입하는 등 위세를 과시했다.

그가 특경대에 검거 구속되자 일경 출신 현직 경찰 간부들의 집단 반발로 특위 활동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으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1949년 1월25일 노덕술이 반민 특경대에 의하여 체포된 데 이어 역시 일제 경찰 출신인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검거되었다. 묘하게도 이들은 국회에서 반민법 제정에 앞장섰던 소장파 의원들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소위 국회프락치 사건을 수사하고 있던 터여서 특위와 경찰 간의 불화가 격화되었다. 이승만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특위 위원들을 불러 ‘대공 수사의 기술자인 노덕술’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고, 이에 불응하는 특위 위원들과 노기 띤 언쟁까지 벌였다.

■ 소장파 의원의 구속과 경찰의 특경대 습격

그해 5월18일 국회 소장파 의원의 리더격인 이문원 의원이 구속되고, 뒤이어 최태규·이구수 두 의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가 하면, 6월21일에는 노일환 등 의원 6명, 25일에는 김약수 국회부의장까지 구속되어(8월까지 구속 의원은 모두 15명으로 확대) 반민특위의 활동에 큰 충격을 미쳤다. 여기에는 그들 대부분이 외군 철수와 한미협정 반대를 주장했다는 점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이례적으로 헌병사령부에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당시 헌병사령관 전봉덕과 수사정보과장 김정채 두 사람은 반민특위가 친일파로 지목된 자들이어서 한층 더 의혹을 샀다(이 대량 검거 사건은 세칭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이 연재의 다음 차례에서 살피고자 한다).

사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부 친일 동조세력과 경찰의 반민특위에 대한 저항은 급기야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으로 절정에 이른다. 특위는 경찰의 압박이 날로 가중되자 서울시경 최운하 사찰과장을 구속했는데, 이에 격한 감정을 품게 된 경찰이 특위 본부를 습격하여 특경대를 강제 해산시키는 최악의 사태를 조성하고 말았다. 즉 국회와 정부 그리고 경찰 사이에 크고 작은 시비 공방이 되풀이되던 끝에 6월6일 아침 서울 중부서 경찰관 40명이 특위 청사 안팎에 포진하고 있다가 출근하는 특위 요원들(35명)을 강제 연행하여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하는 불법을 자행하였다. 경찰은 이들의 비행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무차별적인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신익희 국회의장 등 의원 대표가 경무대를 항의 방문했을 때 이승만은 “특경대 해산은 내가 지시한 것”이라고 숨김없는 고자세를 보였다.

▲반민특위요원 암살음모사건 공판이 열렸던 서소문 4호 법정.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반민특위의 좌절, 그 허망한 끝장

그 후 막후교섭으로 경찰과 특위 요원 쌍방의 석방이 이루어지고 이승만이 국회에 출석, 유화적인 자세를 보임으로써 사태는 완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로서는 반대세력의 도전과 무력 행사로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또 특위 내부의 갈등, 일부 재판관의 사퇴 등으로 동요가 심상치 않았던 데다 반민법의 공소시효를 단축(1950년 6월20일인 만료일을 1949년 8월31일까지로)하는 것으로 법이 개정되자 특위 활동은 완연히 파장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특위가 잔무처리 과정을 거친 뒤 같은 해 9월22일 국회가 반민특위법의 폐지를 의결함으로써 역사적 과제였던 반민자 처벌은 허망하게 흐지부지 끝나고 만다. 미제사건의 처리는 대법원과 대검찰청으로 이관되었으나 거의 무죄나 가벼운 처벌로 결말이 났다.

반민특위의 활동을 수치상으로 집계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총 취급건수 688건, 체포 305건, 자수 61건, 검찰 송치 559건, 기소 221건. 그러나 재판 종결은 겨우 38건에 불과했다. 입건된 반민 피의자의 0.6%만 법정에 선 셈이었다. 판결 선고형별로 보면 사형과 무기징역이 각 1명뿐이고, 징역형은 고작 1년 내지 2년6월 선고를 다 합쳐야 12명(그중 집행유예가 5명이므로 실형을 선고받은 자는 단 7명), 공민권 정지 18명, 무죄 6명 등이다. 검거 제1호라고 주목을 받았던 박흥식도 무죄, 도지사를 지낸 김대우도 무죄, 이광수도 불기소, 한때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태석(일본 고등계 경시 출신)도 재심에서 석방,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덕기(임정 요인 체포의 유공자)도 재심에서 석방, 이런 식이었다. 노덕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권력층 또는 유력자들이 병보석으로 풀려난 것부터가 특위의 한계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마침내 반민법 폐지법률 부칙에 따라 반민법에 의한 공소가 계속 중인 사건(미결사건)은 공소가 취소된 것으로 보고 반민법에 의한 판결도 모두 효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참으로 허망하고 통탄할 일이었다. 결국 반민족행위를 한 친일분자들에게 법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준 셈이 되었고, 그 후 이 나라 각계에서 그들이 기득권세력으로 승승장구하는 반역사적 행태를 부추긴 결과가 되었다.

■ 특위 무력화의 원인, 인프라 없는 ‘민족정기’

반민특위가 당초의 사명과 기대를 이처럼 저버리게 된 이유 또는 사정을 잠시 살펴보면 대충 이러하다. 첫째 특위가 반민법이라는 역사적 특별법을 제대로 운용하여 소기의 실효를 거둘 수 있을 만큼 조직·인력·전문성 등의 인프라를 갖추지 못했다. 둘째 이승만과 친일 경찰 출신을 비롯한 친일파 비호세력의 방해와 저항을 들 수 있겠다. 셋째 반민법 시행 당시 남한 사회가 이미 친일파와 그 동조세력에 의해서 장악되고 있었던 점, 넷째 그들에 의해 친일파 숙청문제가 정치적 이념 또는 용공문제로 왜곡되거나 친일 불가피론으로 오도되어 버린 점, 다섯째 반민법 위반의 유력자일수록 변호사는 물론 각계 거물급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등(신용욱에 대해서는 이승만의 ‘추천서’까지 등장) 법정 안팎의 공세가 다양했던 반면 특위 측은 인력과 시간 그리고 전문성의 부족으로 유죄 입증이 어려웠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아무리 숭고한 민족정기도 거창하고 애국적인 뜻만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런 역사적 과제를 수행할 만한 현실적 담보와 역량 그리고 인프라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요체를 우리는 반민특위의 실패에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2014-11-02>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4) 반민특위 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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