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청산 역행한 법관들
진실화해위 결론에도 ‘개별 심리’
친일 재산 국가 귀속 취소 판결도
프랑스는 1944년 나치 독일이 물러나자마자 과거 청산에 나섰다. 프랑스는 해방 뒤 10년 동안 나치 협력 혐의자 35만명 가운데 9만8000여명을 수감했고, 이 가운데 1500여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나치 협력을 주창하는 나팔수 노릇을 했던 문인·언론인 등이 특히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일제 식민지였던 한국에서는 해방 뒤 이승만 대통령 치하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좌초되고 60년 가까이 지난 2000년대에 들어선 뒤에야 과거사 청산 작업이 시도됐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친일진상규명위·2005년 5월31일 출범)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2005년 12월1일 출범)가 활동에 나선 것인데, 피해 구제와 역사적 사실 정리에 초점이 맞춰졌다.
처벌이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내리고 마는 미온적 수준의 과거사 청산 작업이었지만, 친일부역자 후손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잇따라 소송을 냈고, 일부 사건에서 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일제강점기 판사로 독립운동가 54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유영(1950년 사망)에 대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2010년 10월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김종필)는 유씨 후손이 국가를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 취소 소송에서 “항일운동 관련 사안을 재판했다는 것만으로는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고 볼 수 없다”며 후손의 손을 들어줬다. ‘법대로 재판했을 뿐인 판사에게 역사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이다. 하지만 2011년 11월 서울고법 행정7부(재판장 곽종훈)는 “대한민국 헌법은 일제시대 법령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다”며 원심을 뒤집었고, 대법원에서도 그대로 확정됐다. 친일부역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했던 1심 재판장은 변호사로 개업했다가 올해 초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발탁됐다.
진실화해위 조사보고서 등의 증거능력은 법원이 개별적으로 심리해야 한다는 지난해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도 논란이 됐다. 이인복 대법관 등 4명은 “수십년 동안 왜곡·은폐돼 내놓을 수 있는 증거에도 한계가 있다”며 “과거사위 결정의 증명력을 쉽게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의견을 냈지만, 대법관 다수는 진실화해위 결정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과거사 청산에 제동을 거는 쪽에 섰다.
당시 주심이었던 박병대 대법관(법원행정처장)은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있던 2010년 5월 일제 작위를 받은 조선 왕실 종친인 이해승의 손자가 낸 친일재산 국가귀속결정 취소 소송에서 1심을 뒤집고 국가 패소 판결하기도 했다. “작위 수여만으로 한일합병의 공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2005년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를 친일반민족 행위로 규정했는데, 당시 판결로 국회에서 ‘한일합병의 공으로’란 문구를 빼는 개정안이 통과된 뒤에야 재산 환수 작업이 재개될 수 있었다.
이해승의 후손은 ‘한일합병의 공으로’란 문구를 삭제한 개정된 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이 헌법에 위배되었다며 지난 3월 대법원에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해 놓은 상태이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2014-11-02> 한겨레
☞기사원문: 독립운동가 유죄 선고한 건 ‘친일’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