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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값’ 위자료 산정이 제각각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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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60년 전 특별조치령-포고령 위반-국가보안법 적용해 위자료 산정



▲ 1950년 7월 초, 당시 미 정보장교가 촬영한 대전 산내 골령골 집단처형 현장
ⓒ 심규상 


6·25 전쟁직전 형을 받고 복역 중이던 재소자들이 있다. 국군과 경찰은 전쟁이 터지자 그들이 북한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살해했다. 뒤늦게 정부는 이들이 국가의 위법행위로 억울하게 희생됐다고 인정됐다. 그런데 법원이 이 희생자들의 ‘죗값’을 물어 배상액을 다른 희생자보다 적게 반영했다.


근래 서울고등법원 민사재판부가 6·25전쟁 때 국군과 경찰에 의해 사망한 민간인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관련 판결내용이다. 법원이 민간인 희생자 손해배상액을 산정하면서 60여 년 전 ‘죗값’을 적용, 배상액을 감액한 것이다.

서울고등법원 제 14민사부(재판장 정종관)는 지난 8월 말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당한 민간인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희생자들의 수감 경위와 범법행위 정도를 반영해 위자료를 감액하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군인과 경찰이 정당한 사유 없이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건 희생자들을 살해한 것은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 생명권,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침해한 것”이라며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이어 “희생자와 유족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 2007년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 심규상

재판부는 대상자 31명 중 14명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했다. 희생자의 경우 8천만 원, 배우자 4천만 원, 자녀 각 800만 원을 산정했다. 다른 사건의 경우에도 이와 동일한 위자료 지급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하지만 재판부는 14명을 제외한 12명에 대해서는 희생자 6천만 원(배우자 3천 500만 원, 부모자녀 각 700만 원)을 산정했다. 다른 희생자 3명에 대해서는 6천만 원(배우자 3천만 원, 부모자녀 각 600만 원), 나머지 희생자 2명에 대해서는 5천만 원(배우자 2500만 원, 부모자녀 각 500만 원)을 위자료로 정했다.

같은 시기 살해된 ‘목숨 값’이 이처럼 다른 이유에 대해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사건 희생자들이 수감된 경위, 그들이 저지른 범법행위 정도, 이 사건 희생자들의 유족 숫자 등 제반 사정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예를 들면 문아무개 희생자의 경우 위자료 산정액은 5천만 원이다. 1951년 1월 8일 판결문에 따르면 문씨는 ’50년 9·28 수복이후 고향에서 북한군에게 돈을 제공한 혐의’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로부터 63년 뒤에 현 법원이 위자료를 산정하면서 당시 부역혐의로 받은 형량을 감안한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사법살인’이자 ‘법률적 학살’


▲ 대전형무소 민간인희생자 사건 개요가 적힌 고등법원 판결문
ⓒ 심규상 


하지만 당시 부역혐의자들을 처벌한 법령은 긴급명령 1호인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1950년 6월 28일 공포)으로 이 법은 법조계 내에서도 “한국 현대사에서 만들어진 법령 중 가장 엄중한 형벌로 최소한의 인권보장을 어렵게 한 ‘사법살인’이자 ‘법률적 학살'”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인섭은 <한국전쟁과 형사법> 논문(서울대학교 법학 41권,2000년)을 통해 “특별조치령은 자의적으로 무한대로 법을 적용할 수 있었다”며 “즉 위협에 의해 협조한 사람들도 엄중 처벌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소 후 20일 이내에 공판을 열고 40일 이내에 판결을 언도하도록 한데다 증거설명을 생략할 수 있도록 했다”며 “가장 빠르게 졸속으로 증거 없이 판결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유족들도 문씨에 대해 “당시 처남과 장모에게 옷 보따리를 맡긴 후 고향에 없었고, 마을 사람들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함께 5천만 원의 위자료를 산정 받은 희생자 이아무개씨의 경우 전쟁이전인 1948년 태안에서 경찰에 체포돼 ‘폭발물취제벌칙 위반’ 등 혐의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의 유족들은 “해방직후인 1946년 대전에 있는 친일파의 집에 폭탄을 던진 사건에 연루돼 수배된 후 사찰계 형사들에게 쫓기다 붙잡힌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씨는 재판 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전쟁발발 직후 산내에서 군경에 의해 불법으로 살해됐다. 유족들의 진술대로라면 해방직후 친일파를 응징한 일이 위자료 산정에서 까지 ‘범법행위’로 반영된 셈이다.


광복직후 친일파 응징도 ‘범법행위’?


▲ 지난 2007년 대전 산내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 심규상

위자료 6천만 원을 산정 받은 오아무개씨는 전쟁직전 ‘포고령 제2호’ 위반 혐의로 3년 형(추정)을 받았다. 그는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전쟁발발 직후 산내에서 총살됐다. 포고령은 1946년 미군이 한반도에 입성했을 때 발표한 통치에 대한 포고문으로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도 불인정하여 한국인의 자주적 통치활동을 부정했다. 또한 친일파들을 대거 고용, 편입했다. 특히 ‘포고령 제2호’는 ‘미군에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 없이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희생자 윤아무개씨는 충남 논산에서 면서기를 하다 1949년 6월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3년형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 전쟁이 터지자 산내로 끌려가 살해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윤씨에 대해 좌익 활동 혐의로 수감된 경위 등을 감안해 위자료를 다른 사람의 8천만 원보다 적은 6천만 원으로 산정했다. 1948년 말 졸속으로 만들어져 ‘평상시의 계엄법’으로 지탄받던 당시 국가보안법이 현재까지 위력을 발휘한 셈이다. 

박아무개씨, 정아무개씨, 김아무개씨, 최아무개씨 등 6명은 여순사건에 연루돼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산내에서 살해됐다. 재판부는 이들에 대해 7000만 원을 위자료로 정했다. 역시 당시 범법행위를 적용한 것으로 재판부가 ‘여순사건’을 여전히 ‘여순반란사건’으로 보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희생자 유족들 “누명 벗겨달라 했더니 오히려 ‘빨갱이’ 낙인”


▲ 눈물흘리고 있는 대전형무소 산내 희생자 유족들
ⓒ 심규상

(사)대전산내희생자유족회의 한 관계자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산내에 끌려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누명을 벗어달라 했더니 법원이 오히려 64년 전 반인권적인 엉터리 법 규정으로 아버지를 죄인으로, 빨갱이로 낙인을 찍고 있다”고 말했다. 

희생자유족들은 변호인단과 협의해 조만간 대법원에 이에 대한 상소이유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 대법원은 지난 7월, 한국전쟁 직후 군·경에 의해 집단 희생된 공주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의 피해자 김모씨의 유족들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다른 유사한 사건 피해자들이 지급받은 액수와 형평성이 있어야 한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되돌려 보낸 바 있다. 서울고법은 희생자 본인에게 2000만 원, 아내에게 1000만 원, 자녀에게 각 2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었다.


이와는 반대로 대법원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정부의 배상 책임을 희생자 1인당 8천만 원 내외로 제한하는 판결을 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배상을 명한 과거 판결들이 잇따라 파기되고 있다. 이 때문에 억울하게 가족을 잃고 64년간 숨죽여야 했던 유족들의 아픔에 걸맞지 않은 액수라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2014-11-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목숨값’ 위자료 산정이 제각각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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