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471>
1955년 4월2일 미국 국무부가 애국가의 내력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문교부는 작사자를 안창호로 기재한 자료를 미국에 전달하려 했다. 그러자 애국가는 안창호가 작사하지 않았다는 반박이 잇따랐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작사자 조사위원회를 결성한 이유다.
위원회 13인의 조사결과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위원이 11명이었다.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핑계로 애국가는 작사자 ‘미상’ 상태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다들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7월 15, 16일 2회에 걸친 ‘애국가 작사자 판정의 시비’라는 보도가 확인됐다. “현재 작사자 판정을 주저하는 큰 이유는 불건전하고 감정적인 선입견이 개재해있기 때문에 계속 조사의 필요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첫 회합에서 작사자가 판명되기도 전 편찬위원 간에 ‘윤치호가 작사자라면 애국가는 개작돼야 한다’는 무모한 망언을 했었다고 한다. 이것은 조사위원의 상황 한계를 벗어난 지나친 불평이며 또한 윤치호씨는 친일한 사람이므로 작사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 고의적으로 작사자 판명에 무형의 압력을 가한 오류를 범한 일이라 하겠다.”
애국가작사자 조사자료집을 발행하며 ‘작사자 미상’을 언급한 5월13일 첫 위원회 회의 때부터 ‘윤치호 배제론’이 팽배했는데, 그런 인식은 작사자 규명이 목적인 조사위원회의 정체성을 무시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윤치호 작사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친일의 잣대를 바로 들이대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단지 그가 왜정 말엽 일본의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는 것 만으로 개작의 이유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제 말엽 국내에 있던 인사로서, 더욱 총독의 타살을 기도했다는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서 복역한 윤치호씨가 그들의 강압에 순응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보다 중요한 이유는 구한말 독립협회 당시의 애국심이 애국가를 작사케 한 것이지 일제 말엽 참의를 지낼 때 작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후에 친일한 흔적이 있다 해서 친일적인 구절이 아무 것도 없는 애국가를 비난할 수 없는 일이다.”
윤치호는 1911년 9월 ‘105인 사건’에 연루됐다. 1913년 7월 대구복심법원은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임치정·옥관빈에게 징역 5∼6년형을 선고했다. 윤치호의 친일은 이후부터다.
7월28일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3차 회의가 열렸다. 30일자 신문들은 “최종회의를 개최하고 무기명 투표를 한 결과”(한국일보), “희미한 최종결정을 지었다”(서울신문), “최종회합에서 격론 끝에”(경향신문), “결론으로 완결지었다”(동아일보)고 썼다. 이 마지막 회의에서 논의된 것이 결론이며, 공신력이 있음을 강조하는 문구들이다.
‘작사자 미상’은 1차 회의 과정의 발언이었을뿐이다. 작사자를 윤치호로 결정하는 것을 미룬다는 ‘작사자 윤치호 미결’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11대 2’라는 표결 결과도 ‘작사자로 윤치호가 유력하다’(11명)는 의미다. ‘작사자 미상’(2명)이 아니다.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에 의해 ‘윤치호씨 작사설이 가장 유력하다’는 최종 결론으로 완결지었다.”(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 유력하다고 낙착. 동아일보)
“무기명 투표를 한 결과 11대 2로 현재까지 수집된 사료 중 ‘윤치호설이 가장 유력하다는 판정’을 짓고 작사자 조사문제의 일단락을 지었다.”(윤치호씨가 유력, 애국가 작사자 조사 일단락.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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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대상자로 김인식씨가 생존하고 있으면서 자기 작사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윤치호를 작사자로 단정할 수 없으니 ‘윤씨가 가장 유력하다’는 결론···.”(석달 열흘 만에 희미한 결론, 윤씨가 유력하다로 애국가 작사자 규명 일단락. 서울신문)
“격론 끝에 ‘윤치호씨가 작사자로 가장 유력하다’는 결정으로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못한 채 애매한 결론을 내리고 동 조사위원회는 해체되고 말았다.”(확증 없어 무결론, 애국가 작사자조사위원회 해체, 윤치호설 유력할뿐. 경향신문)
작사자로 거명되는 인물들 중 김인식의 주장 때문에 윤치호 작사를 단정할 수 없어 ‘윤치호가 작사자로 유력하다’는 결론 아닌 결론을 내리게 됐다는 얘기다. 이 결론은 그러나 권위를 부여받지 못했다. 위원회가 “앞으로 교과서와 창가책에 기재되는 애국가에도 작사자 성명은 종전대로 약(略)하기로”한 탓이다. ‘작곡자 안익태’만 표기하고 ‘윤치호 작사 유력’은 아예 표기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이렇게 애국가 작사자는 미상으로 굳은 지 60년을 바라보고 있다.
윤치호의 친일행적은 뜨거운 감자 이상이었다. “회의에서 이병도 위원이 ‘윤치호씨가 가장 유력하다고 지적하고 작사자로 결정할 것을 제의’했으나 반론이 있었던 데는 ‘애국가 개작’이 대두되는 것을 우려해 ‘윤씨 작사로 결론짓는 것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서울신문)
최종 대상자는 윤치호·안창호·김인식·최병헌·김규식·이상준·남궁억 등 7인이었다. 민영환은 대상에 없었다. 표결 위원 13인은 이병도·백낙준·감상기·권상로·현철·김영환·서정주·이상협·김동성·주요한·성결린·김양선·김도태였다.
위원회는 윤치호와 달리 안창호 등 나머지 대상자들이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근거는 없다고 밝혔다. 1945년 9월 윤치호 자필 ‘가사지’와 윤치호 작사 표기 ‘국민가’(애국가와 동일가사)를 물적 증거로 인정했다. 연세대 총장 백낙준 외 8인의 증언도 채택했다.
‘가사지’ 원본은 4월12일 윤치호의 5남 윤기선이 제시했다. 주요한과 황의돈이 비판적으로 감정한 부분은 사위 정광현 등의 정정으로 해명됐다. “국립과학수사소 치안국 감식과의 감정 결과 윤씨의 필적에 틀림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1910년 9월21일자 신한민보에 실린 윤치호 작사 ‘국민가’도 증거로 수용했다.
1955년 4월2일부터 7월30일까지 각 신문과 잡지들을 추적한 애국가 연구의 권위인 김연갑 상임이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는 “‘애국가=윤치호 작사’라는 사실을 공표하지 못한 위원회는 ‘자료가 수집되는대로 계속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약속했다(7월30일 경향신문)”면서 “지난 9월23일 ‘애국가, 계관시인 윤치호 작사…서재필 증언 최초발굴’(신동립 잡기노트. 뉴시스)에 이어 빼도 박도 못할 명징이 추가됐다. ‘자료가 수집’된 것이다. 따라서 국사편찬위원회는 다시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온라인편집부장 reap@newsis.com
<2014-11-6>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