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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과 항일, 별장과 요정이 뒤섞인 부암동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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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9)무계원·현진건 집터·무계정사·석파정과 아소정



▲ 창의문 밖 부암동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창의문 밖 이야기 : 부암동


<무계원(武溪園)>(옛 오진암), 고급요정에서 전통문화공간으로 탈바꿈


창의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 부암동주민센터를 끼고 인왕산 쪽으로 언덕길을 올라가면 여러 역사적 장소들이 밀집해 있다. 그 가운데 제일먼저 만나는 곳이 <무계원(武溪園)>이다. 이곳은 종로 낙원상가 북쪽 익선동에 있던 유명 요정 <오진암(梧珍庵)>을 이리로 옮기며 전통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2014년 개관이라 아직 이곳에서 특별한 행사나 기억에 남을 만한 일화는 없어 여전히 ‘서울시 등록1호 식당’이며 ‘요정의 산실’로 더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일단 오진암이란 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알아보자.




▲ 종로구 낙원동에 있던 고급요정 <오진암>이 부암동으로 이전하면서 전통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였을 뿐 아니라 이름조차 <무계원>으로 바꾸었다. [사진-유영호]

오진암은 1900년대 초 지어진 것으로 해방될 때까지는 한옥으로 지어진 커다란 가정집이었다. 그런데 보통의 웬만한 가정집이 아니었다. 조선 말기 당대의 유명화가였던 이병직이 살던 집이요, 경기민요의 대가 안비취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후진을 키운 현장이다. 세상에 휩쓸려 가옥의 용도가 변했지만 그 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런 곳을 1953년 인수하여 주인이 그 이름을 ‘안마당에 멋진 오동나무가 있다’하여 오진암이라 지었다.


이렇게 시작된 요정으로써의 오진암은 당시 최고 권력자들이 드나드는 곳으로 그들의 권세를 함께 누린 ‘웃지 못 할 일화’도 있었다. 1972년, 단골이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먹다 남긴 양주를 한 직원이 기념으로 장롱에 보관했다가 영업정지를 당할 뻔 한 사건이다. 당시만 해도 외제품 판매규정상 마음대로 양주나 양담배를 소유하거나 판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주인이 단속 나온 이에게 “이후락 씨가 우리 집에 와서 ‘왜 문 닫았느냐’고 물으면 (당신이) 책임지라”고 하자 처벌이 벌금으로 낮아졌다고 한다.


이처럼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최고 권력가들을 손님으로 받으며 그들과 함께 권세를 누린 고급요정이었다. 하지만 권력의 끄나풀이 끊어졌을 때 그 추악한 모습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사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다가 결국 매춘으로 연명하다 노무현정권이 들어서 성매매 단속이 강화되면서 적발되어 2010년 문을 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오진암에서도 역사적인 일화는 있었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의 박성철 제2부수상이 바로 이곳 오진암에서 만나 7.4남북공동성명을 논의했던 것이다. 바로 대한민국 1호 요정인 이곳에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원칙에 대하여 논의했던 곳이기도 했다니 흥미롭다.


현재 우리정부는 더 이상 이 성명서의 내용을 꺼내려 하지 않지만 북에서는 이 성명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고려연방제>(1980),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1993)과 함께 조국통일3대헌장의 맨 첫 자리에 둘만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리하여 북은 끊임없이 남측정부에 대하여 7.4남북공동성명의 이행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평양 락랑구역 통일거리 입구에 위치한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으로 북에서는 7.4공동성명에서 발표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3대원칙’과 더불어 고려연방제(1980),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1993)을 조국통일3대헌장으로 기념하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빙허 현진건>, 식민지 조선의 슬픈 지식인


무계원에서 언덕 위로 약 50미터쯤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바로 그 삼거리 한 모퉁이 빈터 앞에는 의미 있는 표석이 하나 서있다. 바로 일제 강점기 김동인, 염상섭과 함께 한국단편소설의 모형을 확립한 작가로, 사실주의 문학의 개척자인 빙허 현진건의 집이 있었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집이 있었지만 역사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종로구는 2003년 이곳을 공용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헐어버리고 아직도 빈터로 남아 있다. 비록 아무런 흔적도 없이 빈터로 남아 있어 아쉽지만 이곳에 서서 잠시 빙허 현진건에 대하여 상상해보기로 했다.


▲ 종로구 부암동의 현진건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 이 집터에서 우측이 안평대군 이용의 별장 <무계정사 터>이며, 좌측 언덕 위로 조금 가면 친일파 반계윤웅렬의 별장이 있다. [사진-유영호]

대부분의 사전은 현진건에 대하여 ‘일제 강점기 소설가 겸 언론인’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3.1운동 직후인 1920년 문단에 등단하여 이듬해 자기 아내를 모티브로 쓴 《빈처》와 식민지 지식인의 슬픈 현실을 그린 《술 권하는 사회》 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1928년 현진건은 동아일보에 입사했는데 그 해 1월 그의 친형 현정건이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그 후 그의 형은 3년 옥살이를 마치고 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32년 그만 숨지고 만다. 또 그 이듬해는 형수 역시 자결하여 현진건에게 개인사적 비극이 잇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즈음 현진건은 동아일보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사회부장으로 승진되고, 이후 1936년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을 주도하였다. 당시 베를린올림픽에 일본대표로 출전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땄는데 그의 시상식장면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보도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투옥되어 1년간 감옥생활을 하여야 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현진건의 항일투쟁은 형의 투옥과 죽음 등에 의한 영향이 컸으리라 상상된다.


▲ 일장기가 말소된 사진이 실린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좌)와 그 후 일장기 말소사건의 여파로 손기정은 금메달을 땄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로부터 밧줄에 묶여 귀국해야만 했고, 노면전차를 이용하는 것도 감시를 받았다. [사진출처-엔하위키미러]

그런데 우리는 ‘일장기 말소사건=동아일보’라고 많이 생각하는데 사실은 좀 다르다. 본래 제일먼저 일장기를 말소한 채 보도한 곳은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1936.8.13일자)이다. 하지만 인쇄상태가 선명하지 않는 등으로 일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가 이로부터 12일 뒤 이를 본 딴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내보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조선중앙일보의 행위를 모방한 것이다. 물론 그것조차 의미 있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이에 총독부는 조선중앙일보 역시 무기한 정간처분을 내렸고, 당시 재정상태가 좋지 못한 상태에서 결국 폐간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일장기사건을 치른 현진건은 출옥 후 바로 이곳 부암동으로 이사를 왔다. 이때 그에게는 직장도 없어 경제적으로 곤란할 뿐만 아니라 정세는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 등으로 온 나라가 전시동원체제로 바뀌어 버린 가장 혹독한 시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그가 이곳에 와서 처음 한 일은 뜻밖에도 양계사업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또 1939년 말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흑치상지(黑齒常之)>를 연재하는데 이것 역시 총독부의 검열과 탄압으로 중단되고, 훨씬 전에 쓴 그의 작품집 <조선의 얼골>마저 금서로 지정되어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야말로 현진건은 이곳 부암동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40년 친구의 꾐에 빠져 사업에 뛰어 들었다가 몽땅 망하고, 고려대 정문 바로 앞 자그마한 초가집(동대문구 제기동 137-61)으로 이사했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서 1943년 그는 43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현진건의 부암동 생활은 그야말로 식민지 《술 권하는 사회》에서, 사랑하는 《빈처》와의 힘든 생활이었으며, 결국 《운수 좋은 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떠난 곳이다. 이런 식민지 조선의 슬픈 지식인 현진건은 비록 해방을 못보고 떠났다.


참고로 현진건의 몇 일화는 우리에게 그가 괜히 영웅심에 일장기를 지우지 않았음을 알게 해준다. 먼저, 《조선문단》에 함께 기고하던 염상섭, 나도향, 김동인, 양주동 등과 함께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한 뒤 저마다 “나는 조선의 괴테가 될 테니 자네는 톨스토이가 되게”, “나는 베르렌이 될 테니 너는 체홉이 되라” 등의 주정을 늘어놓으면 현진건은 이런 서구 중심적 사고에 찌든 그들에게 당장 “그 놈의 톨스토이, 괴테 좀 집어치우시오” 하고 큰소리치곤 했다고 한다. 또 1936년 대홍수로 수재의연금을 모으러 창의문 밖에서 가진 모임에서 “일본인한테 기대지 말고 우리끼리 자족자구(自足自求)하자고.”하고 기염을 토했을 만큼 빙허 현진건의 가슴에는 항상 ‘민족’이란 화두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계정사>, 안평대군의 무릉도원과 배신자 신숙주


현진건의 집터 바로 옆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 빈터와 함께 붙어 있는 낡은 한옥이 있다. 이곳이 바로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의 별장 <무계정사(武溪精舍)>가 있던 곳이다. 안평대군의 자택은 도성 안의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 수송동계곡 기린교 근처에 있었음을 앞서 보았다. 이곳은 그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아래 사진 속에 보이는 한옥은 비록 오래된 것이지만 안평대군과는 무관하다. 이곳에 안평대군이 정자를 세웠고, 그 정자 앞 바위에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글자를 새겨놨는데, 그 바위는 그대로 남아있다. 이것이 안평대군의 별장 터라는 증거이다.




▲ 현진건 집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안평대군 이용’의 별장인 <무계정사>는 일반인이 접근 못하게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다. 사진 속에 보이는 정각은 비록 오래된 건축물이지만 이것이 무계정사는 아니며 단지 그 뒤에 무계동(武溪洞)이란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음으로 안평대군의 별장 터임이 추정되는 곳이다. [사진-유영호]

안평대군 위의 두 형은 문종과 세조로 왕위에 올랐지만 안평대군은 둘째 형 세조에 의해 35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한양도성을 떠나며 처음으로 보고 상상한 것이 서대문역 농업박물관에 위치한 김종서의 집터에서의 <계유정난>이 아니었던가. 그 계유정난을 통해 안평대군은 사사된 것이다. 계유정난의 명분이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모반’을 꾀하려 한 것을 미리 손쓴 것이라지만 안평대군이 그랬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결국 형 수양대군의 앞길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제거된 것일 뿐이다.


한편, 안평대군은 그가 시서화(詩書畵)에 능숙했으며, 고서화 수집을 무척 많이 했다는 기록을 보면 여러 작품을 남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계유정난을 막지 못하고 수양대군에게 사사 받은 탓에 그의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고 오직 남은 것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붙인 발문(跋文)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일본에 가 있으니 저승에서 얼마나 억울해 하고 있을까를 상상해 본다.


그나마 한 때 친밀한 사이였다가 안평대군을 배신하고 권력의 부나방처럼 수양대군에게 붙은 신숙주가 자신의 문집에 안평대군이 수집했던 고서화 목록을 남기고 있다. 이 책을 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고서화수집가였는지 엿볼 수 있다. 당시 수집한 작품들은 그야말로 루브르박물관급이라 할 만큼 명품컬렉션이었다. 그런데 안평대군은 자신의 미래를 예견했던 것일까. 자신이 수집한 고서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신숙주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나는 이것(=서화)들을 좋아하는데, 이것 역시 병이오. 열심히 찾고 널리 찾기를 10여 년 한 후에 이만치 얻었소. 아하! 물건의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때가 있으며 모여지고 흩어짐이 운수가 있으니 대저 오늘의 이룸이 다시 내일의 무너짐이 되고, 그 모음과 흩어짐이 또한 어쩔 수 없게 될는지 어찌 알랴”(신숙주의 ‘보한재집(保閑齋集)’ 14권 ‘화기(畵記)’편)

 


▲ 안평대군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신숙주의 《보한재집(保閑齋集)》[사진출처-고려대학교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조선 초 젊은 나이에 명필로 이름 날렸던 안평대군이다. 중국 사신들조차 조선에 오면 그의 글을 받아가는 것이 희망이었고, 그렇게 전해진 그의 글을 보고 중국 황제 역시 “참으로 좋도다. 진정으로 이것은 조자앙(조맹부) 서체로다”라며 극찬할 정도였다. 안온(安)하고, 평안(平)하기를 꿈꿨던 안평대군이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되어 우리역사에서 그의 자리는 그저 전설처럼 전할 뿐이다. 마치 자신이 꿈꿨던 《몽유도원도》의 그곳처럼.

참고로 안평대군이 이곳 부암동에 별장을 짓게 된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해 본다. 안평대군이 29세 때 꿈속에서 본 무릉도원의 풍경이 하도 기이해서 그가 총애하던 화가 안견에게 자신이 꿨던 꿈을 전하며 그 것을 그리게 한 것이 《몽유도원도》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도성 밖 이 계곡 주변을 우연히 찾았던 안평대군은 깜짝 놀라고 만다. 꿈 속에서 본 무릉도원의 풍경과 너무나 흡사했던 것이다. 무계동이란 지명과 무계정사라는 정자의 이름의 내력은 박팽년의 시에 붙인 안평대군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정묘(1447)년 4월에 무릉도원을 꿈꾼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9월 우연히 유람을 하던 중에 국화꽃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는, 칡넝쿨과 바위를 더위잡아 올라 비로소 이곳을 얻게 되었다. 이에 꿈에서 본 것을 비교해 보니 초목이 들쭉날쭉한 모양과 샘물과 시내의 그윽한 형태가 비슷했다. 그리하여 올해 들어 두어 칸으로 짓고 무릉계(武陵溪)라는 뜻으로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니, 실로 마음을 즐겁게 하고 은자들을 깃들게 하는 땅이다.”


▲ 안평대군이 자신의 꿈을 설명하여 안견에게 그리게 했다는 《몽유도원도》 [사진-유영호]

이렇게 안평대군의 말을 전한 박팽년 역시 안평대군의 꿈속에서 신숙주, 최항과 함께 무릉도원을 거닐었다는, 총애 받은 문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안평대군이 꿈꿨던 무릉도원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에 지금 이 일대 서있는 많은 건물들을 마음속에서 지우고 조선 초 그때를 상상해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상상 속에 거닐고 있는 무릉도원을 함께 거니는 사람들 속에서 신숙주는 지워 버렸다. 나는 ‘숙주나물’의 유래를 알았기 때문이다.


안평대군이 살아 있을 때는 현진건의 집터도 역시 무계정사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500년 전 안평대군의 무릉도원에 현진건이 찾아 온 꼴이다. 해방을 못보고 떠난 현진건이나 형에게 목숨을 빼앗긴 안평대군이 저승에서는 함께 조선의 문학을 논하며 살고 있으리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반계 윤웅렬별장>, 서울시가 관리해주는 친일파 별장


▲ 부암동에 위치한 친일파 <반계 윤웅렬별장> [사진-유영호]

빙허 현진건의 집터에서 언덕을 따라 약 150미터쯤 올라가면 <반계 윤웅렬별장>이 있다. 별장이라고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고관대작의 거처였음을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엄청 크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윤웅렬이 누구인지 거의 모르고 있다. 종로구에서 발간한 관광안내책자에는 “이 집은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이 당시 도성 내에 유행하던 성홍열을 피해 지내기 위해 지은 별장”이며 건축양식에 대한 언급과 이후 그의 셋째 아들에게 상속되었다는 것만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안내문구의 핵심은 그저 ‘윤치호의 아버지’라는 정보뿐이다.


그렇다면 윤웅렬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본래 윤웅렬은 ‘해평 윤씨’로 조선 초 집안이 몰락한 뒤 별 볼일 없이 이어져 내려오다 한말 현대사에 세도가의 집안으로 다시 등장하였고, 이 과정에서 윤웅렬의 역할이 가장 컸다. 무과에 등재하여 대한제국시기 군부대신(현 국방부장관)을 지냈으며, 동생 윤영렬 역시 당시 육군참장(현 육군중장)을 역임하였으니 이 두 형제가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운 꼴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한말, 일제를 거치며 반민족행위로 얻어진 것이었기에 그런 출세가 가능 했다. 윤웅렬은 별기군을 창설하였지만 임오군란으로 민겸호, 최보현 등 친일파들이 처단되자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함께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갑신정변, 갑오개혁 등 개화파집권으로 다시 정부에 복귀하였지만, 이번에는 미국과 러시아에 의존한 ‘춘생문사건’으로 또 다시 상해로 도주하였다. 이처럼 그의 처신은 오로지 외세에 의존하는 ‘철저한 사대주의적 방식’이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는 대한제국 성립 후 다시 현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벼슬길에 오른다. 그리고 한일합병 후에는 일제로부터 은사금과 귀족으로 남작을 수여 받았다. 하지만 그는 1년 뒤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역사는 그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시킨 것이다.


그럼 이제 아버지 윤웅렬 보다 세상에 더 알려진 윤치호를 보자. 얼마 전 문창극 서울대 교수는 국무총리후보로 지명되었다가 그가 행한 교회설교가 식민지근대화론에 기초한 것이어서 많은 논란 속에 결국 청문회조차 못하고 사퇴했다. 하지만 문창극후보가 자신의 설교를 옹호하며 당시 자신은 존경하는 개화파 윤치호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윤치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우리사회 주류는 윤치호를 평가할 때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신민회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던 사람이지만 105인 사건에 연루되면서 징역을 살고 변절한 사람’으로 본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윤치호는 1911년 전향한 것이 아니라 이미 1890년대조차 철저한 친일파였다. 1881년 17세의 나이로 그는 조선의 농업학교를 들어가게 되어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 윤웅렬은 일본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에게 부탁하여 아들 윤치호를 일본 동인사(同人社)에 입학시켰다. 일본에서 윤치호는 일본에서 조선침략의 선동가로 유명한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토 히로부미 수시로 면담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 이후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함께 하였던 것이다. 즉 그들에게 일본이나 서구열강은 제국주의가 아닌 선망의 대상일 뿐이다.


한편 윤치호는 20대부터 일기를 썼는데 1889년대 12월 8일부터 그의 일기는 죽을 때까지 영어로 쓰였다. 그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1890년이란 개화파들에게는 꽤 의미 있는 해였나 보다. 앞서 본 것처럼 서재필이 이 해부터 자신의 이름을 필립 제이슨이라 부르고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서재필’이라 사용하지 않은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윤치호의 일기를 보자.


“내나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흉잡힐 일만 많으매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견디겠도다.”(1888년 12월 29일 윤치호 일기)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1890년 5월18일 윤치호 일기)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1893년 11월1일 윤치호 일기)


▲ 에머리대학 재학시절의 윤치호(좌)와 1889년 12월 8일부터 영문으로만 쓰인 그의 일기.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이처럼 윤치호는 이미 20대부터 철저한 친일파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독립협회에 머물며 만민공동회를 주최할 때도 친일파였던 것이다. 당시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환송회를 열었다. 이토는 이날 윤치호로부터 선물을 받는데 그것에 무척 만족해하며 그 답례로 자신의 사진을 건네주었다. 이날 이토가 받은 선물은 갓 새로 지은 ‘독립문이 부조된 대형 은찻잔’이었다. 결국 독립협회가 지은 독립문은 청나라에서 나와 일본으로 들어가는 그런 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토는 그 선물을 받고 흡족했던 것이다.


얼마 전 당시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였던 유시민이 ‘통합진보당은 왜 공식행사 때 애국가를 부르지 않냐?’며 종북몰이에 가세하면서 애국가 논쟁이 크게 번진 적이 있다. 이때 애국가제창을 거부하는 측의 논리가운데 하나는 현재 대한민국은 법률적으로 국가(國歌)로 지정된 것이 없으며, 그저 관행적으로 작곡가 안익태, 작사자 미상(未詳)인 <애국가>가 국가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곡자 안익태는 물론이며, 작사자로 학계 다수설인 윤치호가 맞는다면 더더욱 부르기 힘들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오를 만큼 최고의 친일파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1945년 7월경 윤치호가 자신의 셋째 딸 윤문희에게 전해준 애국가 필사본.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당시 애국가 논쟁을 바라보는 나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어찌 이런 곡을 애국가로 지정하여 해방된 지 60년이 넘어서도 이렇게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참고로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의 표결 결과는 11:2였고, 여기서 11은 ‘윤치호가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이유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윤웅렬은 그의 맏아들 윤치호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올랐고, 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 윤영렬의 집안으로 가면 친일파는 더욱 많다. 아마도 단일가문에서 가장 많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르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윤웅렬, 윤영렬 두 형제는 렬(烈)자 돌림인데 가운데 두 글자를 합하여 영웅(英雄)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친일영웅이 되었으니 부모입장에서 자식농사가 잘 되었다고 해야 할지 걱정이다.


<반계 윤웅렬별장>에서 다음 코스로 가려면 좀 전에 보았던 현진건의 집터를 다시 지나야 한다. 그런데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인공 빙허 현진건의 집은 주차장건설이란 명목으로 헐려버렸고,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윤웅렬의 별장은 서울시가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여 관리해주고 있으니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역사적 가치가 계량적 가치로 측정되고 있는 현실이 왠지 이곳을 떠나는 나를 슬프게 한다.


<석파정(石坡亭)>과 <아소정(我笑亭)>, 그리고 권력무상


윤웅렬별장에서 약 500미터쯤 상명대학교 방향으로 내려가면 <서울미술관>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 샛길로 약 100미터쯤 올라가면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가장 유명한 <석파정(石坡亭)>이 나온다. 하지만 석파정이 어떤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지 전체적인 조망을 하기 위해서는 윤웅렬별장에서 내려와 자하문터널 위에서 멀리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그래야 이곳 석파정이 얼마나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해 있는 지 알 수 있다.



▲ 흥선대원군의 여러 별장 가운데 현존하고 있는 부암동 <석파정> [사진-유영호]

본래 석파정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권세가 안동김씨 김홍근 소유로 조선 말기 대표적인 별장이었다. 그런데 이것의 소유권이 바뀌는 과정은 대원군이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좀 치사한 방법으로 빼앗은 것이다. 그 사연을 《매천야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김홍근의 별장이 북문 밖 삼계동에 있었는데 한성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이었다. 하루는 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기를 간청하였으나 김홍근이 그의 말을 듣지 않자, 다시 청하기를 “하루만 빌려주어 놀게 해주게”하였다. 정원을 가진 사람에게 놀기 위해 빌려 달라고 하면 허락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서울의 옛 풍속이기 때문에 홍근은 억지 승낙을 하였다. 대원군은 고종에게 행차하도록 권고하고 자신도 고종을 뫼시고 따라갔다. 홍근은 국왕이 행차한 곳은 신하의 의리로서 감히 거처할 수 없는 곳으로 생각하여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았으므로, 결국 김홍근의 별장은 운현궁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43세의 나이로 섭정이 하면서 권력이 어디로 쏠리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즉 고종 즉위 후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몰락과 대원군의 득세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사실 대원군 이하응은 24세에 대원군에 봉해진 후에도 전혀 실권 없는 변두리 한직에 머물렀다. 당시 왕실과 종친에 대한 안동김씨 외척들의 통제와 압박은 신변의 안위조차 위태롭게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시정잡배와 어울리며 파락호의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고종의 전 임금인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안동김씨 집안의 별장을 빼앗았다는 것은 그야 말로 권력무상(權力無常)을 느끼게 해준다.


<석파정(石坡亭)>이란 이름도 대원군 자신이 붙인 이름이다. 본래 이곳은 건물 뒤 바위에 새겨진 삼계동(三溪洞)이란 글자를 따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했던 곳이다. 그런데 대원군이 이 정자 앞마당이 바위로 깔려 있다 하여 이름을 바꾼 것이다. 또 대원군 자신의 아호를 석파(石坡)로 바꿀 만큼 아꼈던 곳이다.


한편 석파정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바로 아래 유료입장인 <서울미술관>을 통해서만 둘러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석파정 대문 앞에서 담장 넘어 멀리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서울미술관에서 약 750미터쯤 내려가 세검정교차로 직전 좌측에 <석파랑>이란 한정식 집에는 이곳 석파정의 사랑채가 옮겨져 있다. 이 사랑채는 중국 청나라 풍으로 건축된 독특함이 흥미를 더한다. 물론 석파정에서 계곡 쪽으로 있는 정자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중국풍의 양식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 석파랑은 여러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석파정에서 옮겨 온 사랑채는 맨 위에 있으며 누구나 들어가서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대원군에게 또 다른 별장이 하나 더 있다. 부암동의 <석파정>에서는 그가 권력을 쥐었던 시기의 모습을 상상 수 있다면, 마포구 염리동의 <아소정(我笑亭)>은 그가 실각했을 때 머문 곳으로 권력말기 대원군의 한이 서린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아소정은 염리동 동도중학교 운동장에 위치해 있었다. 별장 건물은 없어지고 현재 표석만 남아있다.


갑오개혁 당시 개화파와 연립정권에 참여했지만 일본과의 갈등으로 실각하고 이곳에서 사실상 연금생활을 하였던 곳이다. 또 고종폐위 음모로 손자 이준용이 강화도 옆 교동도로 귀양을 가게 되자 자신도 손자를 따라 가겠다고 마포나루까지 나왔다가 순검들의 제지를 받게 된 사연이 있는 곳이다. 당시 아소정으로 돌아와 문고리를 잡고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를 빗대어 혼자 큰소리로 우는 것을 ‘아소정 호랑이 운다’라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였으니 대원군의 슬픔과 원통함이 얼마나 컸을 지 상상이 된다.


이런 대원군이 은둔생활을 벗어 던지고 다시 세간에 등장한 것은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10) 와중이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살해하면서 대원군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대원군은 이렇게 며느리의 죽음을 매개로 권력의 중심으로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지나친 노욕이 탈을 부른 것일까? 이듬해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정국은 다시 뒤바뀌면서 그의 정치적 생명은 영영 끝나 버리고 말았다.


본래 아소정은 ‘내가 웃는다(我笑)’다는 의미로 대원군이 직접 지은 이름이지만 그 옛날 호쾌한 풍운아의 기백은 이곳에서 찾을 수 없으며, 말년 이빨 빠진 호랑이의 모습이 상상되기에 ‘스스로 비웃는다’는 의미의 아소정으로 불리기도 했다. 결국 대원군은 1898년 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먼저 죽은 부인과 더불어 이곳 아소정 근처에 안장되어 이후 이 일대를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 불렀다.

하지만 1908년 대원군의 묘는 경기도 파주로 이장되고, 또 1962년 동도중학교가 들어서면서 99칸 고광대실의 아소정은 철거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소정의 사랑채는 서대문구 봉원동에 있는 <봉원사>에 옮겨져 현재 대방(大房 : 염불당)으로 쓰이고 있다.



▲ 1962년 <아소정>이 철거되면서 서대문구 봉원동의 <봉원사>로 이전한 아소정의 사랑채. [사진-유영호]

참고로 아소정이 있던 곳의 지명은 마포구 염리동(鹽里洞)으로 소금 염(鹽)자가 들어가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소금과 관련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 동도중학교와 6호선 대흥역 중간지점에 소금창고가 있어서 이 일대에 소금장수가 많이 살아서 유래한 지명이다.

<2014-11-6> 통일뉴스


☞기사원문: 친일과 항일, 별장과 요정이 뒤섞인 부암동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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