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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남은 원평 집강소…망치질에 바스러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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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혁명 당시 원평에서 농민군이 집강소로 사용하던 가옥이 폐가로 방치돼 있다. 집강소 건물이 그대로 남은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집강소 터에서 지난 10월20일 김석태(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씨가 비가 쏟아지고 있는 집강소 건물의 지붕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허재현 기자

[토요판] 커버스토리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달 20일 오후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의 거리는 한적했다. 2차선 국도 변을 따라 드문드문 들어선 낡은 가게들만이 이곳이 조선 후기 크게 번성하던 고을임을 설명하고 있었다. 원평천의 작은 다리를 건너 원평 버스터미널 인근으로 가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는 ‘원평 택시’라는 글자가 벽에 적힌 낡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 앞에 한 백발의 노인이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을 이끌던 김덕명 장군의 후손 김석태(70·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씨였다. 그가 옛 원평 택시 건물 뒤편의 다 허물어져 가는 고택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마당으로 들어가 집을 살펴보니 대청마루 곳곳은 파손돼 있고 서까래에는 흙가루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곳이 동학농민혁명 때 원평에서 집강소로 쓰인 집입니다.” 김씨가 뜯긴 천장 사이로 보이는 상량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光緖捌年壬午三月二十’(광서팔년임오삼월이십·1882년 건립) 문구가 검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기 12년 전 지어진 건물이라는 암시다.

지자체마다 동학농민혁명 관심도 달라

반쯤 열려 있는 방문을 마저 열어보려 하자 천장에서 흙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지붕이 무너질 수 있어 보조 쇠받침대를 서까래에 받쳐놓은 게 눈에 들어왔다. 원평 집강소는 망치질 한번에도 훅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집강소 건물이 이런 실정이라는 게 김씨는 속상하다.

“1980년대부터 지역 주민들이 김제시에 건물을 매입해 관리하자고 주장했는데 안 받아들여졌어요. 하는 수 없이 제가 4년 전에 1억5000만원을 들여 매입하려고도 해봤다니까요.”

원평 집강소의 의미는 작지 않다. 도축을 하며 재산을 모은 백정 동록개가 건물을 세우고, 동학농민혁명이 본격화하자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김덕명 장군(농민군)에게 헌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평은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최근에야 김제시의 의뢰를 받은 문화재청이 이곳의 문화재 인정 여부를 심사했고 지난 4일 건물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집강소를 기자와 함께 둘러본 김씨는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모주 한잔을 시켜놓고 이런저런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김덕명 장군의 증손이다. 김덕명 장군은 지역에서 동학의 대접주(동학의 대단위 조직인 포(包)의 책임자)였고 전봉준의 물질적 후원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할아버지(김홍구·김덕명의 아들)께서 제가 어렸을 때 이곳(집강소)을 지날 때마다 넌지시 ‘여기가 네 증조부께서 큰일을 도모할 때 사용하던 곳’이라고 일러주셨어요. 그때(해방 이전)는 동학 얘기 하면 잡혀가는 줄로만 알던 때라 크게는 얘기 못하고….” 김씨가 불콰해진 얼굴로 말했다.

동학농민혁명 유족들 가운데에는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유족들을 두루 만나고 발굴해온 이병규(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심사담당관)씨에 따르면, 일제 때 동학농민혁명 유족들은 이런저런 괴롭힘을 많이 당했는데 재산을 강탈당한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어 유족들의 주장만 남아 있을 뿐이다.

김씨의 집안도 이런 경우다. “증조부의 생가 터가 지금 누룽지 공장(금산면 쌍용리 262-1)이 돼 있어요. 일제 때 그 터를 빼앗긴 것인데 지금 되돌려받았으면 좋겠지만 (빼앗겼다고) 증명할 방법이 있어야지요.” 김씨가 가볍게 모주를 들이켰다.

‘지금 동학농민혁명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김씨에게 묻자, 그는 동학농민군이 조정에 요구했던 폐정개혁안을 언급했다. “폐정개혁안에 ‘관리 채용에 있어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하라’는 조항이 있어요. 이 조항이 아직도 제대로 실현 안 되어 세월호 사건 같은 게 터지는 겁니다.”

김씨와 원평의 식당에서 밤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다음날 아침 원평에 살고 있는 또다른 유족인 최고원(44·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씨를 만났다. 그는 원평리 구미마을 앞의 너른 들판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추수를 앞둔 벼들이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이 구미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에요.”

구미란 전투.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패한 전봉준이 6000~7000명 정도의 농민군을 이끌고 원평으로 왔고 이곳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894년 11월25일(음력)이었다. 농민군은 37명의 전사자를 내고 전투에서 졌다. 구미란 마을은 슬픈 역사를 지녔다.

이곳에는 지난해 말까지도 이를 알리는 표지판조차 없었다. 주민들의 지속적인 항의를 받은 김제시가 지난해 12월 ‘구미란 전적지’라는 표지판을 마을 입구에 설치하기 전까지 이곳은 그냥 그저 그런 들판이였다. “관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왜 주민들이 계속 요구해야만 겨우 해주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최씨가 한숨을 쉬었다.

▲1894년 11월25일(음력) 일본군에 쫓겨온 농민군들은 김제 원평의 구미란 마을 앞 들판에서 일본군과 최후 격전을 벌였다. 구미란 마을 주민들이 들판에 널브러져 있던 농민군의 주검을 수습해 뒷산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은 관리를 하는 이가 없어 풀숲처럼 방치돼 있다. 허재현 기자

그는 기자를 마을 뒷산으로 데려갔다. 좁은 오솔길 곳곳을 가로막은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5분여 걷자 봉분 모양 비슷한 것들이 모여 있는 널찍한 터가 나타났다. 풀숲 사이로 나무 표지 몇개가 바닥에 꽂혀 있었는데 이게 없다면 이곳에 봉분이 있는지도 제대로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름 없는 동학농민군의 묘 20여기가 이곳에 있다고 최씨가 설명했다.

마을 앞에서 벌어졌던 전투를 알고 있는 구미마을 주민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자발적으로 관리해오다 그들이 연로해지자 무덤이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최씨는 “이제 국가가 나서서 동학농민군의 묘를 관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안타까워했다.

모든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들이 이렇게 방치되고 있는 건 아니다. 농민군 최대 승리지역이었던 고부 황톳재(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도계리)에는 1963년 기념탑이 들어섰고, 공주 우금티 전적지에도 기념탑과 표지판이 1973년 들어섰다. 잘 관리되고 있는 유적지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는 것이다. 지자체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도가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부 황톳재와 우금티 전적지엔

기념탑과 표지판 들어섰지만

구미란 전적지의 마을 뒷산엔

이름없는 동학농민군 묘 방치

‘봉기 격문’ 선포하고 전봉준을

대장 선출한 부안군 백산에선

1980년대에 무허가 석재 채취

산 동북쪽이 흉물스럽게 깎여

어디 사는지 알 길 없는 전봉준 후손들

21일 오전 황톳재 인근의 동학농민혁명 사당인 구민사로 발길을 옮겼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1987년 10월1일 건립된 곳이다.

사당의 정문(외삼문)을 들어서 전봉준의 위패를 모신 전각에 이르니 전봉준의 가상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신분이 높은 대감이 하얀 도포를 갖춰입고 갓을 쓴 채 접힌 부채를 한손에 쥐고 있는 그림이다. 전봉준은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집강소를 설치해 민중 통치를 실현하려 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전봉준을 신분 높은 양반처럼 그린 초상화는 잘못됐다는 지적이 많다.

사당의 가장 깊은 곳에는 전봉준 동상이 세워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경승이 제작한 동상이다. 김경승은 인천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등을 만든 유명 조각가다. 주변을 둘러보니 바람에 떨어진 단풍잎이 꽤 멋스러웠다. 일본산 품종인 노무라단풍(홍단풍)나무에서 떨어진 잎이다.

사당을 나와 건너편에 크게 지어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들어서자 눈매가 매섭고 풍채가 좋은 경비원 한명이 눈에 띄었다. 김개남 장군(동학농민군의 주요 지도부)의 고손인 김호영(38)씨였다. 3년 전부터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잠시 말을 붙이자 그는 “할아버지(김개남)의 유골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는데 효수된 뒤 어디에 묻었다는 기록이 없어 못 찾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김개남 장군의 유골을 찾는 건 민간에서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일이다. “정부가 동학농민혁명 유족들에게 너무 무신경한 것 같다”고 김씨는 말했다. 그러나 불만을 제기해도 바뀌는 게 없다고 생각한 탓일까. 그는 “자세하게 말해 무엇하냐”며 길게 말을 잇지 않았다.

동학농민혁명 유족들이 정식으로 명예회복 된 것은 겨우 10년 전이다. 2004년 3월 국회는 여야 합의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농민혁명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했다. 유족 발굴과 심사 과정을 거쳐 3146명이 유족임을 인정받았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나 벌어진 일이었다. 명예회복이 되었다고 해서 그간 겪은 물질적·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동학농민혁명 유족’이라는 국가의 확인서가 발급될 뿐이다.

전봉준 직계 후손들은 지금도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전봉준에게는 아들 둘, 딸 둘이 있었는데 혁명이 진압된 뒤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들들은 폐병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고도 하고, 딸들은 성씨를 바꾸어 숨어 살다가 쓸쓸하게 죽어갔다고도 하는데 이 역시 촌로들의 전언일 뿐이다.

22일 오전 부안군 백산면으로 발길을 옮겼다. 백산은 높이 47.5m의 야산이다. 1894년 3월 이곳에서 농민군은 대회를 열어 ‘봉기 격문’을 선포하고 전봉준을 농민군 대장으로 선출했다. 백산은 동학농민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이다. 백산 정상에는 백산 창의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러나 백산을 멀찍이서 바라보면 탄식이 나오게 된다. 흉물스럽게 산의 동북쪽이 깎여 있다. 1980년대에 무허가 석재 채취가 이뤄진 탓이다. 1985년부터는 아예 부안군의 허가를 받아 본격적인 석재 채취가 이뤄졌다가 이후 중단되었다고 한다. 100여년 전 이곳에서 농민군의 의로운 함성이 울려퍼진 것을 몰랐을 리 없었을 텐데,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백산을 떠나며 끝없이 펼쳐진 배들평야와 그 옆을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동진강을 바라보았다. 120년 전 농민군은 이 풍경을 바라보며 ‘보국안민 제폭구민’이라고 쓴 깃발을 흔들었을 것이다. 백산대회 이후 벌어진 황톳재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선조들의 뜻깊은 발자취를 후손들이 과연 부끄럽지 않게 계승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제 부안/허재현 기자

취재자문 혜문 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2014-11-07> 한겨레

☞기사원문: 하나 남은 원평 집강소…망치질에 바스러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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