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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5) 국회 프락치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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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이승만 비판 의원들을 남로당과 엮어… ‘핵심 증인’ 서둘러 사형


■공수(攻守)가 뒤바뀐 엄청난 반격

1949년 초에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한 뒤 친일파로 지목된 자들의 계략과 이를 엄호하는 이승만 정권의 방해공작, 그 과정에서 친일 경찰 출신의 현직 경찰 간부들이 반민특위에 구속되자 이승만까지 직접 나서서 석방을 요구한 사실, 이를 거부하자 특경대를 경찰이 습격한 사실 등은 이 시리즈의 지난번 치에서 잠시 살핀 바와 같다. 반민특위 문제 외에도 이승만은 국회 일부 정파에 대하여 감정 상하는 일이 많았다.

반민특위 입법에서부터 강경했던 국회 소장파 의원들은 제헌과정에서 토지개혁 문제로 이승만 및 한민당 세력과 맞섰고, 국회의 간접선거로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아닌 김구를 지지하였다. 그들은 또 이승만이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한 이윤영을 낙마(임명 동의안 부결)시켰는가 하면, 친일파 처단을 위한 특위 활동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국가보안법 제정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하였다. 이에 더하여 이승만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 것은 외군 철퇴 결의안의 국회 상정이었는데, 이 안은 반대 의원들의 의사 진행 방해로 제안 설명조차 하지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다. 외군 철수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유엔한국위원단에 보내려고 하다가 국회 내에서 제지당했는가 하면, 평화통일안을 상정했다가 부결되기도 했다. 그러자 의원 62명의 연명으로 김약수 국회 부의장을 대표로 한 ‘평화통일안’을 유엔한국위원회에 제출했다. 미군 철수 후에 남게 될 미군사고문단의 설치에도 반대했다. 이처럼 국회 소장파 의원들은 일련의 원내 활동에서 이승만 정부의 정책을 끊임없이 비판 또는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으니, 집권세력이 이들을 곱지 않게 보고, 군·검·경이 ‘손보기’를 궁리했을 법도 하다.

일러스트 | 박건웅

■ 반민법 대 국가보안법, 친일 경찰과 국회 소장파


당시 서울지검의 사상검사이던 오제도는 “그 무렵 얼마 전부터 국회 공기가 좀 이상하지 않으냐? 혹시 빨갱이가 침투해 있지 않으냐, 하는 의아심이 떠돌고 있던 때였다”라고 회고한 적도 있었다.(오제도 ‘남로당 국회프락치사건’, ‘세대’ 1970년 4월호) 그러니까 소장파 의원들의 뒤를 캐보는 ‘표적수사’가 그 무렵에 시작된 셈이었다.

경찰(서울시경 사찰과)은 소장파 의원들의 뒤에 남로당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내사를 진행한 끝에 1949년 4월 초 서울 충무로에 있는 남로당 특수조직부를 습격했다. 거기서 국회 소장파 의원들의 활동을 기록 평가한 남로당의 문서(‘주주총회 보고서’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같은 달 중순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헌병사령부에서 군·검·경 관계자 연석회의가 비밀리에 열렸다. 그 자리에는 헌병부사령관 전봉덕, 헌병사 수사정보과장 김정채, 서울지검 검사 오제도, 서울시경 국장 김태선,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앞서 말한 ‘주주총회 보고서’의 암호를 풀었다는 수사관들이 모여 앞으로의 수사 전개에 관한 협의를 했다. 그 보고서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관계관 회의에서는 수사 확대론이 우세하여 ‘국회프락치사건’은 국회의원 15명의 구속이라는 전무후무한 대량 검거 선풍으로 증폭되었다.

■ 국회의원 15명 구속, 국회에 대한 융단폭격


즉, 그달 말에 국회 소장파 의원의 대표격인 이문원 의원이 구속되고, 이어서 5월 들어 최규태, 이구수 두 의원이 검거되었다.(1차 검거) 그달 21일에는 노일환, 김옥주 등 6명의 의원이, 23일에는 국회 부의장 김약수가 체포된다.(2차 검거) 바로 같은 날, 국회는 이들의 석방결의안을 상정했으나 88 대 95로 부결되었다. 그럼에도 석방 결의안에 찬성한 의원들을 문제 삼아 ‘국민계몽회’라는 단체가 ‘국회 내의 빨갱이 의원 88명을 잡아내라’는 구호를 내걸고 집회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그때까지는 남로당도 법적으로는 불법정당이 아니었다.)

이문원 등에 대한 1차 검속이 있은 뒤인 6월4일, 이번에는 반민특위 특경대가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를 반민족행위 혐의자로 체포하자 그 이틀 뒤 서울 중부서 경찰관 40명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포위, 강제수색을 하고 이어서 특경대를 무장 해제시킨다.

이처럼 반민특위와 경찰이 혼전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국회 소장파 의원들에 대한 검거도 계속되었다. 6월에 들어서는 노일환, 서용길(이상 반민특위 위원) 의원 등 4명의 국회의원과 변호사 오관이 구속되었다.(3차 검거) 이들에 대한 수사는 이례적으로 헌병사령부에서 관장하여 민간인인 국회의원들에 대한 수사를 왜 헌병들이 맡느냐는 의혹을 받았다. 그러자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7월2일 국회에 출석하여 이렇게 변명했다. “이번 일을 헌병이 착수한 것은 사실 경찰에서 하는 것이 좋은 줄 아나 헌병 자체도 형사소송법상 사법경찰권을 갖고 있다는 점과 이 사건의 중대성을 감안, 군경이 일치돼 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족은 물론 변호인의 접견마저 봉쇄된 상태에서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런 과정에서 엄청난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점으로 보아(피고인들의 법정 폭로) 수사의 본거를 헌병사로 잡은 속셈이 드러나 보인다.


■ ‘외군 철퇴’와 ‘평화통일’ 결의안이 남로당 지령?


서울지검의 오제도 검사는 그해 7월30일 1차 기소를 한 데 이어 8월16일까지 3회에 걸쳐 국회의원 15명 중 김병두, 차경모를 제외한 13명과 변호사 오관, 이문원의 조카 최기표 등 도합 15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공소사실인즉, 노일환과 이문원은 남로당원 이삼혁에게 포섭되어 남로당에 입당하고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포함한 10여명의 국회의원을 포섭한 다음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그해 2월17일 외군철퇴안과 남북평화통일에 관한 결의안을 상정하였고, 그 통과에 실패하자 외군 철퇴 진언서와 미군사고문단 설치 반대 서한을 연달아 유엔한국위원단에 제출하였다는 요지로서, 국가보안법 제1조 2호(반국가단체의 목적 수행을 위하여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 및 3호(반국가단체에 가입하여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 제3조(반국가단체의 목적 실행을 협의 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를 한 자) 및 (군정)법령 제19호 제4조 ‘나’항(정부 계획을 반대 파괴하는 행위)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의 제1심 첫 공판은 수사 착수 7개월 만인 그해 11월17일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재판장 사광욱, 배심 박용원·정인상 판사 심리로 열렸다. 개정 벽두 오제도 검사는 50여분에 걸쳐 기소장을 낭독했는데 주로 노일환, 이문원에 대한 혐의가 큰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공소사실의 대부분을 부인하였다. 노일환과 이문원도 이삼혁(일명 하사복)을 만난 적은 있으나 남로당에 가입하거나 그 지시를 받은 사실은 없다고 했으며, 그런 사실이 있는 것으로 기재된 수사기관의 조서는 헌병대에서 고문에 못 이겨 허위의 자백을 했거나 수사관이 자의로 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재판부의 저울과 ‘음부 문건’의 여인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그러한 법정 진술을 그냥 듣고 넘긴 채 헌병대나 검찰에서 작성한 조서에 적힌 ‘자백’에 무게를 두고 피고인들을 추궁해 나갔다. 이 사건 재판에서 검찰이 유력한 증거로 내세운 증제1호는 정재한이라는 여인의 음부에서 나왔다는 ‘비밀문서’였다.


검찰에 따르면, 이 문서는 광주리장수로 가장하여 월북하려던 남로당 월북문건부 연락원 정재한 여인이 그해 6월10일 개성에서 검거되었을 때 그녀의 음부에서 나온 비밀 보고 문건인데, 남로당 특수조직부에서 박헌영에게 보내는 국회공작보고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 적힌 내용인즉, 피고인들의 원내 활동으로 이미 언론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어서 굳이 암호문서를 만들어 여자 특수공작원의 음부 속에 감추어 가지고 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정재한도 경찰 신문에서 “백지로 포장된 서류를 나의 속옷에 매단 주머니에 감추고…”라고 진술하여 음부은폐설을 부인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문서의 압수 경위와 형상에 대한 검경 관계자들의 말도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피고인들과 변호인은 제14회 공판(1950·2·4) 때에 정재한 여인을 증인으로 신청했으나 이상하게도 검찰이 이에 반대했고 재판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고인들의 범행을 입증하는 데 가장 긴요한 증인이라고 볼 정 여인을 재판부와 검사가 모두 법정에 세우려고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 검사는 “정재한과 그 밖의 증인들이 이 재판과 상관이 없으며, 또한 이들 증인이 피고인을 보호하기 위해 허위 증언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증인 신청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허위 증언’을 걱정해서 증인을 부르면 안된다는 검사의 논리는 참으로 옹색했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정 여인은 같은 해 9월3일 국방경비법 위반(이적행위)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2월6일 형 집행을 당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한 것이 어찌하여 그 프락치사건의 재판이 아직 진행 중일 때에(제6회 공판기일이 12월4일이었음) 공소사실 입증의 핵심 증인을 서둘러 처형했을까?

<2014-11-09>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5) 국회 프락치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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