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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정치 ‘대원각’, 백석과 얽혀 길상사로 이어진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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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2) 삼청각·길상사·성락원

▲ 숙정문 밖 성북동 일대. [자료-유영호]

숙정문 밖 이야기 : 성북동

<성북동>부촌이 만들어진 역사

이제 북문인 숙정문을 통해 성밖의 성북동일대를 잠시 돌아보기로 하자. 성북동(城北洞)이란 동명은 글자 그대로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에 일제시대와 해방전후의 많은 유적지가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곳은 1970년까지만 해도 청와대 뒷산인 백악에 가려져 지리적, 안보적이유로 개발이 늦었던 곳이다. 그런데 왜 이곳이 서울에서 몇 안되는 부촌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먼저 성북동의 10만 7천여평에 이르는 넓은 땅이 교보생명 창업자인 신용호 소유였다. 그의 소유가 된 것은 간단히 말해 동작동 약 3만 6천평의 신용호 소유의 땅을 국립묘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수용하면서 대신 미개발된 성북동 땅을 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용호의 동작동 토지가 사기로 획득한 땅이라는데 있었다. 신용호는 동작동 땅의 원주인이 가등기상태라는 것을 알고 토지사기꾼과 합세하여 1957년 관련서류를 위변조해서 정식재판을 통해 신용호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후 1970년 12월 청와대 인근 삼청동과 성북동을 잇는 <삼청터널>이 개통되면서 땅값은 급등하였고, 신용호는 성북동 땅을 분할매각하면서 거액을 챙길 수 있었다. 이 돈이 결국 교보생명의 창업자금이 된 셈이다.

그런데 이후 동작동 땅에 대한 소송이 붙고 2심재판에서 신용호의 사기죄가 인정되면서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불리하게 되자 신용호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교보생명 지분의 35%를 넘기며 이 사건에 대한 무마를 부탁했다. 이리하여 결국 대법원 판결에서 1심부터 재심하라는 등 신용호의 손을 들어주면서 성북동 땅은 법적으로 신용호의 것이 된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전말은 1981년 전두환 쿠데타세력의 국보위에 출석한 신용호의 조서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는 조서에서 “전 재산을 대통령 각하(당시 전두환)께 기증하고 속죄하여야겠다는 심정뿐”이라고 밝히며 자신이 친히 그 조서의 내용이 사실임을 밝힌다고 서명까지 하였다.

어쨌든 이렇게 성북동의 땅이 신용호의 손에 들어왔고, 삼청터널 개통 후 땅값이 뛰자 신용호는 토지를 분할매각하는데 이때 수많은 정관계 주요인사 및 외국공관들이 매입하면서 이곳은 서울의 부촌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이곳은 삼청각에서 길상사에 이르는 길 이름이 <대사관로>명명되었고 도로 곳곳에 해당 국가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으며 도로 이정표에도 세계각국의 이름이 나오는 이색적인 서울의 한 공간으로 변했다. 또 이처럼 외국공간들이 들어서면서 치안상태가 서울 어느 곳보다 좋아 대기업 오너들 역시 밀집해 거주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교보생명, 교보문고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그룹의 정몽헌, 정몽근 등과 GS, 두산중공업, 한진해운 등 여러 재벌가들이 거주하고 있다.

<삼청각>, 1970년대 요정정치의 현장 숙정문을 빠져 나와 잠깐 걸으면 바로 <삼청각>이 나온다. 앞서 창의문 근처에서 지금은 <무계원>으로 이름과 장소를 바꾼 요정, <오진암>을 보았다. 그리고 여기서 또 다시 한국요정의 거물 <삼청각(三淸閣)>을 만났다. 물론 이곳 역시 이제는 요정이 아닌 전통 문화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백악 정상에서 보았을 때부터 엄청난 규모라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했지만 막상 현장에 와보니 그 규모는 정말 대단했다. 성북동 숲과 만나는 한적한 곳에 위치한 삼청각은 70년대 고위급 정재계 인사들이 이용하던 곳이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을 서울시에서 전통문화공연장으로 바꾸어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 삼청각에서 1.5km쯤 서쪽에 <대원각>(현 길상사)이 위치하고 있다. 이 두 곳은 앞서 창의문 근처에서 본 오진암과 더불어 당시 서울 3대 요정으로 그 유명세가 대단했던 곳들이다(사람에 따라 오진암 대신 청운동에 위치해 있었던 <청운각>을 3대 요정으로도 꼽는다).

▲ 백악에서 내려다 본 <삼청각>, 1970년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후원으로 당시 요정정치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전통문화공연장으로 바뀌었다. [사진-유영호]

삼청각은 요정계 후발주자로 1972년 건립되었지만 특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원을 받아 융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업식에조차 중앙정보부장이 정보부 요원 50여명과 함께 참석해 위용을 떨쳤으며, 이 자리에는 당대의 톱스타가 대거 동원되었다. 또 개업 직후 남북적십자 대표단 만찬도 이곳에서 있었다. 이런 것을 보니 당시 요정이 권력과 밀착해 있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최근 중앙정보부요원이 저술한 책에 의하면 중앙정보부가 아예 요정의 정보를 총괄 수집, 관리하는 ‘미림(美林)’팀을 만들어 운영했다고 하니 권력과 밤의 세계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상상이 된다.

그리고 이 요정이 지어진 시기가 70년대며, 박정희정권의 핵심세력인 중앙정보부의 후원을 받아서 그런지 건축방식도 유신시대 그 자체이다. 거대한 한옥구조의 건물이 모양만 한옥일 뿐 콘크리트건축방식이다. 박 정권 하에서 지어진 광화문이 그랬고, 아산 현충원이 그렇듯이 콘크리트한옥이다. 어쨌든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고, 넓은 주차장이 있으므로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다. 한번쯤 와서 지난 70년대 박정희정권의 요정정치를 상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 생각된다.

▲ 지금은 한식당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삼청각의 여러 건물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는 <일화당>, 이것 역시 콘크리트로 지어진 한옥이다. [사진-유영호]

그런데 도대체 요정이란 것이 무엇이길래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온통 ‘밤의 정치’라 불리는 이곳에서 나라의 운명적인 일들이 결정되었을까? 이런 현실을 두고 강준만 교수는 대한민국은 ‘룸싸롱 공화국’이라고 비꼬았다. “룸싸롱을 보면 한국사회가 보인다”는 것이다. 또 이런 질펀한 정치를 비꼬며 고은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요정 종업원 임도빈

70년대 성북동 대연각이라 우이동 삼청각이라

아니 코밑의 청진동 장원이라

거기 가면

온통 번드르르르

아리따운 연인의 치맛자락 방바닥을 쓸어가며

교자상 가득히

산해진미

점심때라면 밥도 은수저로 떠 넣어주고

그렇게 밥 먹고 나면

야들야들한 손으로

등때기 굳은 살 풀어주고

슬슬 졸음 오는 척하면

뒷방으로 모셔가

그 침침한 방 요 위에 눕혀져

졸음은커녕

난데없는 운우의 정이 쏟아지니

정아무개가 뒹군 방

아무개가 뻗은 방

박아무개

김아무개가 늘어진 방

이렇게 점심때

대낮 주색 마치니

퇴근 후에는

락없는 모범공직자 아니었던가

그것으로도 모자라지만

이번 기회에 요정정치에 대하여 알아보니 우리나라의 요정은 일제 강점기 일본의 료테이(料亭)라는 요리집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료테이는 귀한 손님을 요리로 접대하는 곳인데, 우리나라에 와서는 ‘여자들의 접대’가 료테이에 더해진 것이다. 1907년 조선에서 관기(官妓)제도가 폐지되어 기생들은 관청에서 벗어나 요리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요리집에는 기생조합인 권번(券番)에 연락하여 기생을 불러 흥을 돋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해방이 되면서 권번소속이 아닌 요리집에 소속되어 일하는 기생들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권력은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한편 박정희정권에 이르러 요정정치는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를 발생시켰다. 그야말로 요지경의 나라가 따로 없었다. 백성은 굶는데 고관대작은 흐느적거리며 밤이 짧은걸 아쉬워했다. 거기에는 ‘요정정치’라고 불리는 음침하고 도색적인 밀실 문화가 큰 몫을 했다. 검은 돈과 정치, 술과 가무, 색정이 한데 버무려진 얄망궂은 귀족놀음이 밤마다 흥청망청 이루어졌다.

6년 넘게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일권은 임기 내내 ‘공무원 요정출입금지’를 외쳤지만 정작 자신은 정인숙피살사건과 또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있다는 소문으로 평생 구설수에 휘말렸다. 뿐만 아니라 부패척결을 강조하고 요정정치 엄단을 역설한 박정희대통령은 앞서 지나 온 관제 비밀요정 ‘궁정동 안가’에서 젊은 여대생과 가수을 끼고 술 마시다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

어찌된 것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수입해도 그것이 왜곡되어 퇴폐로 변질되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길상사>(옛 대원각),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기생의 사랑

<길상사>는 삼청각에서 약 1.5km정도 동쪽으로 가면 있는 사찰이다. 그런데 사찰의 간판을 달았지만 왠지 이곳은 다른 보통 사찰과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길상사는 97년 개사하기 전까지 60, 70년대 요정문화를 대표하던 <대원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찰은 속세에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또는 금강문)을 거쳐 본당으로 들어가는 불이문을 통해 대웅전 등에 이르지만 이곳은 일주문 역할을 해야 할 곳에 마치 궁궐의 입구처럼 2층 팔작지붕 형태의 대문이 있을 뿐이다. 이렇듯 보통의 사찰과는 많이 다르다.

이와 더불어 경내에 들어가면 설법전 앞에 마치 성모마리아를 연상케 하는 관음보살상이 있다. 지나치게 간결할 정도로 현대적이며, 또 서양여인의 인상을 지녀 우리가 평소 보아왔던 관음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그런데 이것을 만든 조각가는 불교도가 아닌 천주교신자였다고 하니 ‘천주교의 눈으로 본 관음상’이라고 하면 딱 맞을 듯하다. 그런데 이런 석상을 받아들이는 길상사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개사식 때 김수환 추기경이 축사를 했다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 성모마리아상을 연상케 하는 길상사의 아미타불. 천주교신자인 조각가가 만든 것으로 보통의 보살상과 달리 간결한 느낌이다. [사진-유영호]

그 다음은 길상사의 중심인 극락전이다. 극락전의 주불은 아미타불인데, 이는 서방정토인 극락세계에 머물며 불법을 펴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이다. 살아서 사랑을 못 이룬 여인은 아미타불의 힘을 빌어 모든 한을 내려놓고 서방정토에 이르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에서 아미타불을 모셨다고 전해진다. 마치 여기 길상사의 원주인이었던 여인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흥미로운 길상사는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 옛 요정시절 대원각의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길상사의 극락전. [사진-유영호]

이곳 길상사의 원주인은 김영한(1916~1999)이다. 15세에 결혼하였지만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어 그만 청상과부가 되고 만 여인이다. 갈 곳이 없던 그녀는 권번기생으로 나섰고 시서화에 능한 그녀는 곧 최고의 기생이 된 것이다. 김영한의 재능을 귀하게 본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20세가 되는 해 그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자신을 지원해주던 스승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자 함흥으로 돌아와 그 스승을 옥바라지했다. 그런 가운데 그곳 함흥에서 고교선생이던 시인 백석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백석은 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고, 3년간 동거를 하였지만 백석의 아버지는 둘을 떼어 놓고 아들을 다른 여자와 강제 결혼시킨 것이다. 그러나 백석은 혼인 첫날 밤 도망쳐 다시 영한과 동거했다. 하지만 영한은 젊은 자기 남자 백석을 걱정하며 헤어지자고 했다. 하지만 백석은 오히려 외국으로 떠나자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의 앞날을 더 걱정한 영한은 아예 백석에게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침내 백석은 홀로 러시아로 떠났고 이것으로 둘은 영영 만나지 못했다.

▲ 길상사의 여주인 김영한과 사랑에 빠진 시인 백석. [사진-유영호]

이후 해방은 되었지만 백석은 북으로 돌아왔고, 그 새 영한은 서울에 올라와 요정을 열어서 큰돈을 벌었다. 이후 영한은 <대원각>을 열어 박정희정권시절 요정정치시대를 펼쳤던 것이다. 바로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 길상사가 불과 17년 전까지 바로 그 대원각이었다.

영한은 살아생전 백석의 생일날이 돌아오면 그 날은 곡기를 끊고 방안에서 불경을 외며 그를 기렸다고 한다. 또한 2억 원을 쾌척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여 문학도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맺힌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잇고자 영한은 법정스님을 찾아 대원각을 바친 것이다. 하지만 무소유의 삶을 살아오신 법정스님은 이를 받지 않고, 결국 법정스님이 머무는 암자의 본사인 송광사에 기증되었다. 당시 시가로 1천억 원이 넘는 규모였다. 하지만 영한은 “천억 재산이 어찌 백석의 시 한 줄에 비할 수 있으랴”는 말로 백석과 영한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를 전했다. 길상사라는 명칭은 법정스님이 영한에게 선물한 ‘길상화 보살’이라는 법명에서 따온 것이다.

1997년 겨울 12월 요정 대원각이 사찰 길상사로 되는 날 영한은 수천의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짧은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 대원각 시절 요정여인들이 옷을 갈아입었던 팔각정. 김영한은 ‘이곳에서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사진-유영호]

그의 음성에는 곡절 많은 인생의 슬픔을 넘어선 위대한 비원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물질을 보시하고 2년 뒤 그는 육신의 옷을 벗어버렸다. 이승을 떠나기 하루 전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묵었으며, 다비 후 그녀의 유골은 유언에 따라 첫눈이 도량을 순백으로 장엄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길상사는 그 자리에 조그마한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만들어 그녀의 뜻을 기리고 있다.

▲ 길상사에 만들어진 옛 대원각 주인 김영한의 공덕비. [사진-유영호]

그동안 백석은 북의 시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시를 남쪽에서 출간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러다 1987년 월북작가 해금조치 이후로 그의 시도 함께 우리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시라도 이렇게나마 백석의 시를 보게 된 영한이 이제 여한이 없다며 바로 그 해 법정스님을 찾아가 대원각을 보시할 것을 밝히지 않았을까라는 아름다운 상상을 해본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대원각 김영한의 증언에 의한 것이다. 백석은 김영한 외에도 또 다른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죽고 없는 상황에서 그저 김영한의 증언으로만 나는 상상하고자 한다. 그가 이 엄청난 재산을 사회에 기증했다는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고자 할 뿐이다.

이와 별개로, 흥미로운 것은 삼청각에서 길상사에 이르는 길 이름은 <대사관로>(삼청각~북악스카이웨이까지 약 1.6km)이다. 이 성북동일대에 특히 대사관저들이 몰려 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일본, 독일 등의 대사관저가 들어서면서 그 후로 37개국의 대사관저가 들어서 있다. 그래서 도로 곳곳에 해당 국가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으며, 도로 이정표로도 세계 각국의 이름이 나오는 이색적인 서울의 한 공간이다.

의친왕 슬픈 별궁, <성락원((城樂園))>

길상사를 나와 언덕길 아래로 약 1km가량 내려오면 <성락원>이 있다. 이곳은 본래 조선 철종때 이조판서 심삼응의 별장이던 곳으로 현재 서울시에 유일하게 그 형태가 온전하게 존재하는 ‘조선시대 민가에서 조성한 별서정원’이다. 이 자체로도 역사적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이곳에 고종의 둘째 아들 의친왕이 35년간 머물렀던 별장이기에 더욱 의미가 커진 곳이다. 별장은 그 주인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르는데, 사대부의 별장은 별서(別墅)라 부르고, 왕의 별장은 별궁(別宮)이라 했으니 아마도 별궁이라 부르는 것이 맞을 듯하다.

▲ 의친왕의 별궁인 성락원의 안쪽 깊숙히 자리잡은 송석정과 상지. [사진-유영호]

성락원의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흐르는 물줄기를 쌍류동천(雙流洞天)이라 부르는데 이는 위에서 내려오는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천(洞天)이란 원래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 말로 심산유곡 경치 좋은 곳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이 쌍류동천 좌측으로는 인공으로 조성된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조화를 이룬다.

이처럼 쌍류동천과 용두가산으로 이뤄진 전원(前苑), 그 위로 영벽지(影碧池)와 폭포가 있는 내원(內苑), 그리고 송석(松石)과 못이 있는 후원(後苑) 등 자연지형에 따라 조성된 세 개의 공간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암벽 곳곳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작은 폭포가 내려오는 곳에는 ‘檣氷家(장빙가)’라고 쓰여 있고, 이는 ‘겨울에 고드름이 달려 있는 집’이라는 의미로서, 阮堂(완당)이라는 호가 옆에 각자되어 있어 추사 김정희의 글씨임을 알게 한다.

▲ 의친왕 별궁 성락원의 배치도 (김영환 그림)

물론 지금은 이곳을 제외한 주변 모든 공간이 도시화되어 ‘동천(洞天)’으로서의 멋을 느낄 수는 없다. 정문 밖부터 계곡은 모두 복개되고, 주변은 현대화된 주택들로 메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이 처음 지어졌을 때는 그야말로 심산유곡이었음이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움직이기에 서울 도심과 이곳은 가깝게 느껴지지만, 조선시대는 성밖의 심산유곡이었던 곳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의친왕은 이곳까지 와서 35년이란 긴 세월을 머물렀을까? 의친왕은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가운데 조선황족가운데 가장 독립의지가 강했던 인물이다. 그는 을사늑약 직전 20대에 김규식, 손병희 등과 만남을 가졌으며, 1907년에는 208명을 북한산성으로 비밀리에 소집하여 의병봉기를 선동하는 등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화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 보려 노력했다.

또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도 이러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좌절되고 같은 해 4월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하자 11월 의친왕은 황족으로서의 모든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시민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하고 임시정부에 합류하려고 탈출하여 만주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그만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의친왕이 이곳 성락원에 머문 구체적 시기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그의 활동 정황에 따르면 대게 이 탈출사건의 실패 이후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의친왕은 자유여행권이 박탈된 채 이곳 성락원에서 거의 감시당하는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조국이 식민지로 전락하고 황족으로써 이곳에 갇혀 살아야만 했던 의친왕의 심정은 얼마나 처절했을까? 하지만 의친왕은 이런 속에서도 나름대로 광복을 위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21년, 대한민국 대표단의 청원 사건에서 연명부에 황족대표로도 서명하였던 것이다.

이후 해방이 되었지만 의친왕에게는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정치적으로 딱히 어느 편을 들지 않고 그저 사회원로처럼 있었지만 황족재산이 국유화되고 황실인사를 배척하는 이승만이 정권을 잡으면서 물질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더욱 소외되고 말았다. 그 후 전쟁을 겪으며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영향실조에 노환이 겹쳐 1955년 8월 15일 광복절에 숨지고 말았다.

나라 잃은 백성,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말은 황족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듯해서 이곳 성락원은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곳이다. 성락원은 신선이 살만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진 곳이었다고 하지만 그 전제는 ‘주인으로서 살아갈 때’이다. 식민지노예로 전락한 속에서는 신선조차 살 수 없는 그런 공간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이제 아름다운 곳에서 상상하는 슬픈 과거를 접고 다음 장소로 떠나자. 이곳 성락원에서 약 10분쯤 내려가 성북초등학교 옆에 위치한 국내 최초의 사립미술관 <간송미술관>으로 옮겨보자.

<2014-11-12> 통일뉴스

☞기사원문: 요정정치 ‘대원각’, 백석과 얽혀 길상사로 이어진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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