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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에서 새기는 전형필, 이태준, 한용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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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3) 간송미술관·수연산방·심우장



▲숙정문 밖 성북동 일대. [자료-유영호]


‘민족의 혼’을 간직한 <간송미술관>


식민지 조선의 애국적 부자 ‘간송 전형필’, 일제시대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었다. 그는 현재 종로 4가 일대에 형성된 당시 배오개(梨峴) 시장의 돈줄을 쥐락펴락하던 거상의 후예였다. 그의 재산 논 4만 마지기에서 나오는 수입만 해도 1년에 15만원씩 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서울 시내 큰 기와집 1채의 가격이 1천원하던 시대였다.


그가 이렇게 큰 부자가 된 것이 지금에 와서 보면 국가적으로는 다행이지만, 개인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슬픈 일들이 함께 닥치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1906년 태어나 작은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갔다. 하지만 양육은 친부모가 그대로 맡았다. 이런 성장배경 속에서 훗날 전형필의 조부모, 부모, 삼촌 등이 거의 같은 시기에 운명을 함으로써 양가의 재산 모두들 전형필이 상속받게 된 것이다.



▲ 일제시대 이현시장의 거부 간송 전형필, 그는 전 재산을 쏟아 일본으로 빠져 나가는 국보급 문화재를 지켰다. [사진출처-간송미술관 홈페이지]


이처럼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그가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친 곳은 조선의 문화재이다. 1930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민족 33인 가운데 한 명인 당대 최고의 고미술품 감식가 오세창의 문하에 드나들면서부터 그는 민족의 중요성을 깨우쳤고, 일제에 의해 사라져 가는 우리문화재에 대하여 자신의 혼과 재산을 모두 쏟아 부었다.


그 첫발로 1932년 인사동의 <한남서림>(관훈동 18번지, 현 명신당필방)을 인수하여 이곳을 우리 고서화 수집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에 불과했다. 이후 그는 1934년에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매입하여 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했으며, 33세가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국내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華閣)을 세웠다. 이 이름은 오세창이 지은 것으로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라는 뜻이다.


처럼 그는 일본인들의 손에 흘러 들어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한 우리의 문화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다. 그가 지켜낸 것은 단순히 문화재로써의 ‘물질’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안에 담긴 ‘우리의 혼과 역사’를 지켜낸 것이다.


간송 전형필의 문화재 수집 열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는 일단 보호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흔한 말로 바가지 쓰는 것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거래기준이 있었던 것이다. 1940년대 일제는 조선어 사용금지와 1942년 조선어학회 탄압사건 등 우리민족 말살정책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3년 6월 광산김씨 문중에서 보관해 오던 《훈민정음해례본》 원본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판매자가 천원에 판다고 했지만 귀한 물건은 제 값을 치러야 한다며 당시 집 열 채 값인 만원을 주고 천 원은 수고비로 주며 사들였다. 귀한 것을 귀하게 볼 줄 알고, 그것의 가치를 먼 미래로 환산하였기에 그의 이런 행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훈민정음해례본》이 보존되어 왔기에 당시까지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었던 한글창제의 원리가 이 해례본에 의하여 명확히 정리된 것이다. 또 그것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한편 《훈민정음해례본》의 이렇게 보존되는데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들어 준다. 이 해례본은 본래 광산김씨 종가에서 보관돼오던 것인데 일설에 의하면 이는 세종대왕이 광산김씨 문중에 대하여 여진정벌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내린 서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이 집안의 사위 이용준이 이것을 따로 빼내어 국문학자 김태준의 중개를 통해 전형필에게 판 것이다. 이렇게 3명이 관련된 거래이다.


그런데 판매자 이용준과 중개자 김태준은 모두 당시 좌익모험주의적이었던 <경성콤그룹>의 일원이었다. 경성콤그룹은 1930년대 말 당 재건을 위한 국내파공산주의자들의 결사체이다. 이후 1940년 박헌영이 지도자로 영입되었고, 결국 화요파, 엠엘파, 서상파 등 국내 종파세력의 결집체가 되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하여 남로당을 결성하게 된 조직이다. 이후 중개자 김태준은 빨치산활동 중 사살되었으며, 판매자 이용준은 월북하였다고 전해진다.



▲ <간송미술관>은 국보 12점과 보물 12점 등 수많은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민간미술관이다. [사진-유영호]


간송 전형필의 뜨거운 애국심과 민족애가 결국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이루게 된 것이다. 간송미술관은 현재 리움미술관, 호림박물관과 더불어 국내 3대 사립박물관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힌다. 이곳에서는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설립자의 민족애와 그 열정을 함께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간송미술관은 법적으로 미술관이 아니다. 미술관 등록조차 하지 않았다. 정식 미술관이 되면 개방일 규정과 미술품을 대여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는 등으로 인하여 오히려 소장품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미술관이기 보다 연구 및 보존시설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1년에 딱 두 번 봄가을 2주씩 개방될 뿐이다. 이렇게 귀한 개방이지만 입장료는 무료이다. 최고 국보급 전시회임에도 무료라는 사실에 간송 전형필의 돈에 대한 관점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국내최고재벌 삼성이 운영하는 리움미술관은 입장료가 1만원이다.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이나 있는 공간으로 엄청난 가치를 가진 유물이 즐비한 간송미술관에 처음으로 간다는 설렘을 안고 가는 사람이면 작은 규모에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시설이나 장비 등 외형이 아닌 간송 전형필의 숭고한 민족애가 흐르는 공간이라는 점을 상상한다면 최고의 미술관일 것이다. 이는 마치 어머니의 사랑이 듬뿍 담긴 밥상을 그 어떤 유명식당의 그것이 대신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간송미술관에서 한성대입구역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미술사학자이며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의 옛집>이 있다. 이 집은 그의 명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쓰여진 곳으로 알려져 유명하지만 최순우 역시 간송 전형필의 미술품 수집에 큰 도움을 줬던 사람이다. 이들 모두가 민족에 대한 사랑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하며, 최근 세계화라는 이름아래 해체되어 가고 있는 우리문화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 불어 닥치기 시작한 세계화에 대하여 간송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에 있는 한 구절을 여기 옮겨 놓는 것으로 이곳을 떠나고자 한다.


세계화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그러한 단어의 표면적인 면만을 따를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지닌 깊은 의미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민족 미술은 단순히 아름다움의 형식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과 역사가 물질적으로 체현된 정신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화 시대에 오히려 과거로부터 이어져오는 우리만의 정신을 더욱 발전시켜 세계만방의 빛나는 인류 문화들과 조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문화적 세계화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수연산방(壽硯山房)>, 남에서 북으로, 서에서 동으로 갈려진 이태준의 삶


<간송미술관> 서북쪽으로 바로 옆에 조선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조선의 모파방’이란 별칭이 붙은 상허 이태준의 옛집이 위치해 있다. 지금은 그의 외종손녀 조상명이 <수연산방(壽硯山房)>이란 이름을 내걸고 찻집을 운영하고 있어 직접 방 안에 앉아 이태준을 체취를 느껴볼 수도 있다. ‘수연산방’이란 이름은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堂號)이기도 하다.



▲ ‘조선의 모파상’으로 불리는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 현재는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어 누구나 출입이 가능하다. [사진-유영호]


그는 1933년 박태원, 이효석 등과 <구인회>를 조직하여 문단세계에 우뚝 솟았고, 이화여전 교수를 역임하고 1939년 잡지 《문장》을 발간하였다. ‘시에는 정지용, 산문에는 이태준’이라 일컬어졌을 만큼 그는 문장에 관한 대가였다. 일제강점기 카프의 경향파문학과는 거리를 두었고 먼저 세상을 뜬 빙허 현진건을 그리워하며 글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1941년 일제의 강압으로 《문장》이 폐간되자 그는 붓을 꺾고 강원도 안협으로 낙향하여 조용히 살았다.



▲ 일제시대 조각가이며, 진보적 문예운동을 이끌었던 김복진이 그린 상허 이태준 소묘.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일제 연간에 비겁한 지식인의 표상이라고 나중에 욕을 먹지만 해방정국 속에서는 주로 좌익계열에서 활동하였다. 해방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을 하였으며, 분단 뒤에는 북에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1957년 내부 권력투쟁에서 밀려났다고 한다.


이런 상허 이태준의 이력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에게 ‘경계인’으로 널리 알려진 재독학자 송두율이 떠오른다. ‘이념의 경계에 서서 끝없이 고독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이태준의 경우 남북으로 갈려진 민족분단뿐 아니라 동서로 갈려진 지역차별이라는 또 다른 상흔까지 겹쳐져 있다. 이태준을 민족분단이라는 관점에서만 해석할 뿐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단히 말해 자신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전라도 ‘장수 이씨(長水李氏)’에서 경상도 ‘장기 이씨(長? 李氏)’로 바뀐 것이다. 물론 이태준은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 사연을 보면 우리 민족의 분열사를 보는 듯하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이태준은 본래 강원도 철원에 살았는데 그가 월북하고 그의 가문 중에 강원도지역에서 사단장을 하던 이규삼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규삼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일종의 점령군의 위치에서 사단장을 그만두고 강원도지사에 임명되었다. 전임 민선 도지사가 군사쿠데타에 대하여 부정적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쿠데타세력은 그를 몰아내고 군인으로 대체한 것이다.


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장수 이씨’의 본관이 전라도라는 사실이다. 5.16쿠데타는 경상도세력이 주축이 된 것인데 전라도출신 이규삼은 시간이 흐를수록 주도세력 사이에 묘한 흐름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시간이 흐를수록 고착화되며 더욱 강해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규삼은 자기 일가 일부를 떼 내어 할아버지 어느 한 분을 시조로 삼아 경상도를 본관으로 하는 ‘장기 이씨’를 만들고 호적을 바꿔 그야말로 신분세탁을 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규삼 집안과 족보상 가까운 이태준 집안은 졸지에 장기 이 씨가 되고 말았다. 본관이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바뀐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장수 이씨’와 새로 생긴 ‘장기 이씨’는 본래 한 집안인데 이제는 DNA상 같은 집안일 뿐 법적으로 영영 다른 집안이 된 것이다.


우리민족이 남북으로 갈려져 있다는 사실도 서러운데, 이렇게 동서로까지 갈려져 버린 것이 우리의 현대사라고 생각하니 그저 씁쓸할 뿐이다. 나는 이런 현실을 볼 때마다 분단이 모든 사회악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오직 통일만이 우리가 하나 되는 길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이제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을 떠나 맞은 편 언덕, 달동네에 있는 만해 한용운의 거처 <심우장>으로 옮기도록 해보자.


<심우장(尋牛莊)>, 만해 한용운의 북향집


<심우장>은 ‘복장마을’이라 불리는 달동네 한가운데 있다. 왠지 만해 한용운은 여전히 조선의 백성들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곳 복장마을은 흔히 ‘성북동 부촌’에서 극히 예외적인 달동네이다. 왜냐하면 성북동은 북한산 물줄기 성북천이 동북 쪽에서 서남방향으로 흐르는 계곡 속에 위치한 명승지이다. 그래서 성북천 북쪽 계곡에는 이 수려한 경치를 배경으로 수많은 고급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성북천 남쪽에는 서울성곽 바로 아래지역으로 경사가 심할 뿐 아니라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게 집을 지으면 북향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따라서 부자들은 이곳에 아예 집을 짓지 않기 때문에 해방 이후 갈 곳을 못 찾은 서민들이 몰려든 것이다.



▲ 만해 한용운의 성북동 북향집 <심우장>, 교사가 학생들에게 심우장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유영호]


그런데 이곳에 일제시대인 1933년부터 성북천 북쪽의 명당을 마다하고 자리 잡은 집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심우장>이다. 성밖에서 아예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북향으로 집을 지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난방조차 안하고 살며 온 몸으로 저항했다고 한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했던 삶을 살았지만 그는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 현판은 한용운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기미독립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쓴 것이다. 앞서 가본 <간송미술관>의 원래 이름 ‘보화각’을 지어준 바로 그 오세창이다. 사실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오세창을 매개로 한용운과 전형필 그리고 최순우 등이 모두 잘 아는 사이였을 것이고, 여기에 이태준이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이런 민족애가 넘쳐흐르는 사람들이 살았던 이곳에 해방이 되고 이제는 일본을 위시한 37개국의 대사관저가 들어섰으며, 70년대에는 <삼청각>, <대원각> 등에서 친일군부세력의 요정정치가 행해졌다니 왠지 씁쓸할 뿐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곳 <심우장>은 한용운이 죽은 뒤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심우장의 북쪽에 일본 대사관저가 자리 잡자 아버지의 뜻을 이어 한영숙 역시 명륜동으로 떠나 버렸다. 그래서 현재 심우장은 <만해의 사상연구소>로 이용되고 있다.


이제 건물로서의 <심우장>에 대한 상상은 이 정도로 하고 이곳의 주인 만해 한용운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 기미독립선언문(1991), 만해 한용운은 최남선에 의해 기초된 선언문이 너무 추상적이고 역동감이 없다는 이유로 선언문이 발표되기 전 ‘공약삼장’을 추가함으로써 조선독립에 대한 신념과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사진-유영호]


우리는 만해 한용운을 이야기하면 거의 예외 없이 《기미독립선언문》과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것 모두는 결국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끊임없이 조국해방을 갈망하는 가운데 나온 것들이다. 그래서 만해 한용운과 ‘독립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되어 있다. 여기서 간단히 그가 서명한 기미독립선언문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며 함께 서명한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 몇 개만 나열한다. 그리고 그 답은 역사학자들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1. 제일 먼저 우리가 ‘민족대표’라고 하는 이들 33인 속에 당시 조선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치고 있었던 안창호, 이동휘, 신채호, 김좌진, 김규식, 박은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왜 모두 빠져 있는 것일까?


2. 또 기미년 3월 1일 그들은 탑골공원 현장에 나타나지 않고 태화관에서 선언문을 발표했다. 왜 안온 것일까? 참고로 태화관은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로 이완용의 집이 있던 자리이다.


3. 한편 선언서를 기초했다는 최남선은 정작 서명은 하지 않았으며, 또 서명자 33명 중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 4명은 태화관조차도 오지 않았다. 이리하여 현장에는 29명만 있었는데 이들은 왜 전혀 항거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순순히 잡혀갔을까?


4. 뿐만 아니라 당시 3.1운동으로 4만 6천명이 검거되고, 7,816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여기서 5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사람만 64명인데도 정작 선언문에 서명한 그들 중 최고형으로 받은 것은 3년 형에 불과하며, 이것 역시 6명뿐이다. 뿐만 아니라 길선주는 아예 무죄선고를 받기까지 했다.


5. 이들 33인 중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않은 사람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최린, 박희도, 정춘수 3명과 월북했기 때문에 빠진 김창준 등 모두 4명이다. 그 외 나머지 인사는 모두 서훈을 받았다. 일제로부터 무죄선고를 받은 길선주조차 독립유공자라고 한다.


6. 현재 학교에서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왜 임시정부는 이들 33인을 홀대했을까? 그 당시까지만 해도 이들은 변절하기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또 33인중 임시정부 각료로 선출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는 그들의 출옥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임시정부에 합류한 사람은 3.1운동 당시 체포되지 않고 상해로 간 김병조이지만 그는 임시정부의 한직에 머물렀을 뿐이다. 정말 3.1운동은 임시정부 수립에 영향을 준 것일까?



▲ 탑골공원에 설치된 손병희동상. 하지만 손병희 등 소위 민족대표 33인 시위 당일 이곳을 포기하고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선언문을 읽고 경찰에 스스로 신고하고 체포되었다. [사진-유영호]


이런 궁금증을 생각하니 나는 이들 ’33인’란 명칭 앞에 우리가 왜 ‘민족대표’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 지 이해하기 힘들다. 또 손병희는 탑골공원에 오지도 않았는데 왜 그의 동상을 탑골공원에 세웠을까? 굳이 세운다면 태화관 옛터에 세우는 것이 맞지 않는가? 이러한 현실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2014-11-15> 통일뉴스


☞기사원문: 성북동에서 새기는 전형필, 이태준, 한용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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