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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철도는 일본군부터 나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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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40> 잭 런던이 기록한 조선

1891년 5월 31일 착공된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조금씩 그 형체를 갖추어나갔다. 1901년경에는 몇 개 구간의 난공사 지역을 제외하고는 열차가 달릴 수 있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요구조건을 무산시켜 청을 방어한 러시아는 대가를 톡톡히 챙겼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일전쟁이 마무리된 다음 해인 1896년 5월 청의 외교 실권자 이홍장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새로운 차르가 된 니콜라이 2세의 황제 즉위식에 청의 사절단장으로 참여한 것이다. 모스크바의 야심가들은 이홍장을 포섭하기로 마음을 먹고 청과의 교섭카드를 준비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 책임자 비테 재무장관과 로바노프 외무장관 등이 테이블 위에서 배팅을 했다. 모스크바 테이블위에서 던져진 카드는 러시아와 청나라의 동맹이었다. 일본의 군사력과 맞섰다가 녹다운된 전력이 있는 청의 입장에서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군사동맹은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내민 패의 뒷면에는 만주를 통과하는 동청철도 부설권이란 이권이 있었다.

이홍장은 러시아가 내민 패의 앞면을 보고 반색했지만, 뒷면을 본 후 얼굴이 굳어졌다. 이홍장에 대한 러시아 측의 집요한 설득과 모스크바와 베이징 간 긴급 전문이 수차례 오간 끝에 6월 3일, 모스크바에서는 러시아와 청의 상호방위조약이 담긴 청러밀약이 체결된다. 청을 보호하는 대가로 챙긴 철도노선은 만주를 관통하는 동청철도로, 시베리아 횡단철도 노선을 대폭 단축시키는 지름길이었다.

국제 정치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이웃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비스마르크의 말은 새겨들을만하다. 국제관계에서 대가 없는 선의는 없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지배계급의 뿌리 깊은 사대주의가 국제 정치에서 강자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행태를 반복해왔다는 점이다. 명에 대한 조선의 무한충성이나, 구한말 청, 러시아에 대한 의존, 제국주의 일본에의 투항이 그렇다. 친일은 친미로 계승됐다. 피를 나눈 동맹이라며 미국을 뼛속까지 숭상하고 절대 선으로 옹립하는 모습은 종교적 신념에 버금간다. 그러나 그 ‘정의의 동맹국’이 세계 곳곳에서 벌여왔던 무력개입의 이유는 철저한 자국의 이익 때문이었다.

남한을 위협하는 북한 김정은 체제로부터 미국의 보호를 받기 위한 전제가 있다. 대한민국 백성들이 미국 군산복합기업에 천문학적 세금을 모아 갖다 바쳐야 한다는 점이다. 미군의 한국 주둔 비용의 상당 부분은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구조적으로는 미국 동아시아 전략의 하위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한미동맹의 굳건한 유지를 위해 북한의 무력은 이라크가 그랬듯, 실제보다 강력하고 무서운 위협으로 가능한 오래 유지되어야 한다. 역사 속에 공짜 없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한다면, 한국은 국제적 ‘호구’ 신세를 면치 못한다. 러시아가 동청철도를 장악한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러시아는 요동반도의 뤼순과 다렌 항을 청으로부터 할양받았다. 동청철도와 연결된 남만주 철도를 통해 일본의 대륙진출을 막는 계획이 현실화되자 일본도 긴박하게 움직였다. 요동반도는 청일전쟁에서 얻은 일본의 전리품인데 러시아의 압력으로 청에 도로 반환했던 땅이었다. 이것을 러시아가 가져갔다. 일본 입장에서는 울화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일본이 내린 조치는 경부철도에 대한 속성 공사 명령이었다. 1903년 12월 하달된 경부선 속성건설명령에 따라 1904년 1월 초량에 임시 건설부가 설치되었다. 일본 참모본부는 이미 전쟁을 각오한 뒤였다. 2월 8일 일본 해군이 뤼순항에 있는 러시아 극동함대를 공격했다. 러일전쟁의 첫 포성이 울린 것이다. 다음날인 9일에는 인천 앞바다를 장악한 일본해군이 제물포항의 러시아 전함 두 척을 공격했다. 일본의 기습공격에 러시아의 장갑 순양함 바략함과 카레이츠함은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제물포항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군함이 정박해 있었다. 각국의 상선들도 드나들었다. 일본해군은 몇 개월을 함께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단단히 전쟁을 준비하고 제물포항으로 돌진한 일본 해군을 러시아 해군이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일방적으로 밀리는 몇 시간의 전투 끝에 패배를 직감한 러시아 해군 승조원들은 두 전함을 자폭시켜 인천 앞바다에 가라앉혔다. 항복을 거부하고 장렬한 최후를 선택한 것이다. 바다에 빠진 해군 병사들 중의 일부는 영국과 프랑스 배에 의해 구조되었다.

구조된 해군 병사들은 오스트리아국적의 배를 타고 두 달 가까이 항해한 끝에 4월 5일, 지중해의 마르세유 항에 도착했다. 이들 “제물포 해전의 용사들”은 ‘황인종’ 진출의 위협에 정열적으로 맞선 영웅들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이 밑바닥에 깔린 거리를 당당히 걸어간 러시아 해군 병사들의 모습과 실제 전쟁 양상은 완전히 다르게 진행됐다. 러시아군을 제압한 일본 해군과 해병대 병력은 곧바로 경인선을 따라 진격해 서울을 장악해버렸다. 일본군의 전격적인 서울 입성에 경인철도는 최고의 효과를 발휘했다. 2월 9일, 선발대의 전투에 이어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5만 명이었다. 2월 10일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다. 뤼순과 인천에서 두 번의 선제 펀치를 날린 뒤였다. 기습적인 ‘선빵’을 맞은 측의 타격이 얼마나 큰지, 싸움꾼들은 잘 알 것이다. 러시아는 일단 정신부터 차려야 했다.

러일전쟁으로 경부철도 공사는 군의 지휘 아래 총력 건설체제로 들어갔다. 그 결과 1904년 11월 10일 경부선 심천역 남쪽 지점에서 남과 북에서 내달려온 철도가 연결되었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러시아와의 일전을 각오한 육군 병력을 실어 나를 운송수단을 얻게 되었다. 막 부설된 한국의 종관철도 남쪽 선로는 점령군과 무기부터 실어 나르게 되었다. 식민지 철도의 비애였다.

잭 런던이 기록한 러일전쟁의 단면

제물포해전이 일어나기 한두 달 전부터 러시아와 일본이 한 판 붙을 것이라는 소문은 국제정치 무대에서 무럭무럭 피어올랐었다. 러시아 군대는 만주 쪽에서 조선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고 일본은 해군에 전투태세를 갖추게 했다. 이미 조선을 일본의 잠정적 식민지로 간주하고 있던 열강들이었다. 국제정치의 스포트라이트가 동방의 조용한 나라 조선에 집중됐다. 열강들은 중국에 대한 이권을 바탕으로 조선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러시아에 대해 일본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궁금해했다. 그에 대한 답변 대신 일본은 경부철도 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확신은 여러 나라의 신문사와 통신사의 움직임에서 확인됐다.

걸프전 당시 미 항모전단에서 발사한 토마호크 미사일이 바그다드 시내에 떨어지기 전, CNN 카메라는 적당한 위치를 잡아야 한다. 이처럼 러일 전쟁 발발 5~6주 전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방 언론사들은 특파원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지의 기자로 일본을 거쳐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은 잭 런던(Jack London)도 있었다. 잭 런던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잠깐 이 사람을 소개하고 넘어가겠다.

1980년대 중반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에 기초하지 않은 권력을 변화시키기 위해 진통을 겪었다.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으로 연결되는 군인 과두 통치체제의 유통기한은 이미 지나고 있었다. 군사독재로 명명된 체제와 ‘맞짱’을 뜬 세력은 대학생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학은 자본의 노골적인 종속기관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었다. 정보기관들이 학생들이 불순한 사상에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감옥과 같은 집단 관리체제였던 의무교육 과정에 비해 대학이란 공간은 상대적 자율성이 보장된 곳이었다.

학생들은 자유로운 지성으로 새롭게 알게 된 진실들을 접할 때마다, 관제 교육의 요람이었던 초중등 교육 과정을 부정하게 되었다. 특히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애국자로 배웠던 많은 사람들이 친일 앞잡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대학생들의 분노는 역사적 진실을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아갔다. 게다가 당시 학생들은 좋은 학점을 따거나, 토익 고득점을 위해 악착같이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됐었다. 스펙 쌓기의 무한 경쟁에 내몰리지 않아도 되는 시대적 조건을 만난, 운 좋은 세대였다.

이 같은 토양 위에서, 반민주적 권력과 체제를 극복할 대안으로 여겨지던 사회주의 사상이 꽃을 피웠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들이 서툴게 제본된 복사본으로, 시간이 지나서는 책으로 출판되어 나왔다. 이런 책들은 공안기관의 주기적인 단속대상이 됐는데, 전국 대학가 근처에서는 가끔 압수수색으로 인한 영업중단 사태를 겪는 서점이 생겨났다. 서점 주인이 끌려가는 일도 발생했다. 군사정권의 폭압적 통치체제에 대한 반발은, 군사정권을 지원하던 미국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그와 함께 한국정부와 대척점에 있던 북한체제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북한은 베일에 싸인 공간이었다. 미지의 폭이 큰 만큼 호기심도 따라서 커졌다. 호기심을 키워준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정부였다. 북한에 대한 모든 것을 불경화하다 보니 북한을 제대로 이해할 기회는 사라졌다. 환경이 그러니, 제국 미국에 감히 맞서는 같은 민족, 북한에 대한 막연한 자부심이 싹트기도 했다. 80년대 중반부터 한국 사회의 모순을 타개하겠다고 나선 이들은 분화를 겪게 된다. 민족과 통일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사람들과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사고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회주의적 미학, 또는 혁명적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예술과 문화적 흐름이 나타났다. 베르톨드 브레히트, 막심 고리끼와 같은 다양한 사회주의 작가들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잭 런던은 한국의 문화적 공간에 던져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 주자처럼 등장한 작가였다. 그의 대표 소설인 <강철군화>는 소설 자본론이란 칭송을 받으며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잭 런던은 미국에서 사회주의 물결이 한창 타오를 때 노동자의 비참한 삶과 희망을 노래했던 작가였다. 신문 배달, 선원, 통조림 공장 노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현실 한가운데 있었던 잭 런던의 삶은, 그의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1896년 버클리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사회노동당 당원이 된 잭 런던은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니체, 다윈 등 중세를 뚫고 피어난 사상들을 수혈한 후 미국 민중의 현실을 관찰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작가로서 명성과 부를 얻었지만, 1916년 4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잭 런던이 40세의 짧은 생을 산 것처럼 한국에서 잭 런던의 인기는 90년대 말까지 10년 정도만 이어졌다.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고, 이어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던 많은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났다. 사람들이 꿈 따위를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하게 되면서 잭 런던의 책들은 헌책방 후미진 서가에서 먼지와 친구가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싸우는데, 조선 땅이 찢겼다

잭 런던의 눈에 비친 1904년 러일전쟁의 현장, 조선 땅을 둘러보자.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04년 1월, 일본에는 서양에서 온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의 목적은 곧 전쟁터가 될 조선으로 건너가 전쟁 상황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 당시 도쿄나 오사카에 머물던 서방 기자들의 심경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역 출입을 위해 요르단 암만의 호텔에서 때를 기다리는 현대의 기자들과 같았을 것이다. 일본 군경의 감시와 통제 속에 조선으로 건너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일본군 당국은 적절한 시기가 오면 조선으로 이동을 주선하겠다고 기자들을 설득했다.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적절한 시기란, 대체로 원하는 사람들의 필요가 사라진 뒤다. 이럴 때는 약간의 무모함과 돌파력이 필요한데, 잭 런던이 바로 그랬다. 잭 런던은 50여 명의 기자들의 발이 일본에 묶여 있는 시점에 조선행을 감행했다. 부산에 도착한 잭 런던은 갑판조차 없는 고깃배를 타고 일주일에 걸쳐 서해안을 항해해 제물포에 도착했다.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조선에 도착한 네 번째 서방 기자였다.

“제물포에는 모든 것이 붐비고 있었다.(…) 날마다 일본에서 수송선이 도착했다. 외항에 닻이 내려지면, 사람과 말과 포병들이 뭍에 올라오고, 거기서 43킬로미터(Km) 떨어진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

잭 런던이 본 제물포의 풍경이었다. 잭 런던은 일본군을 따라 북상하기로 했다. 최종 목적지는 전선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만주였다. 1904년 3월 2일, 서울의 풍경을 기록했던 잭 런던은 5일 평양에 도착했다. 취재장비와 생필품을 실을 말을 사고 조선인 하인 소년 ‘만영’과 함께 서방 특파원 중 가장 빠르게 서울을 떠났다. 과거 베이징으로 향하는 왕도였던 서울-평양 간의 주간선 도로를 일본군과 함께 나란히 행군한 것이다.

“서양인이 볼 때 도로라고 하기에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웅덩이의 연속에 불과하지만, 이 길이 정말 왕도라고 한다. 비가 조금만 와도 이 길은 진흙으로 가득 찬 강으로 변한다.”<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

가장 중요한 국도인 한양-평양-의주를 잇는 도로 상태를 묘사한 잭 런던의 기록은 당시 도로 사정이 어땠는지 잘 보여준다. 이런 환경을 갖고 있던 조선에서 철도의 등장이 가져온 충격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러시아군은 압록강을 넘은 상태였다. 선발대 300명은 평양과 신의주의 중간 지점인 안주까지 내려와 주둔지를 꾸렸다.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맞붙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평양에서 북쪽으로 나 있는 길에서 남하하는 피난민과 북으로 진군하는 일본군은 뒤섞였다. 잭 런던은 부산에서 제물포, 서울에서 평양을 지나는 동안 조선 백성들의 실상을 유심히 관찰했다. 잭 런던은 무력한 왕과 정부 관료, 백성들을 등치는 사악한 중간관리 및 지역관리, 고통받는 순진한 백성으로 조선 사람들을 분류했다.

“조선인들은(…) 그들의 상전인 ‘왜놈’들의 몸집을 능가하는, 근육이 발달한 건강한 민족이다.(…) 조선인은 매가리가 없고 여성스럽다. 예전에는 용맹을 떨쳤지만 수세기에 걸친 집권층의 부패로 점차 용맹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실제로 조선인은 의지와 진취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구 상의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비능률적인 민족이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뛰어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짐을 지는 능력이다.”<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

동양인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 의식이 저변에 깔린 잭 런던은 아프리카 원주민 속에 파고든 백인 용사 타잔의 기분을 만끽하며 전선으로 향했다. 외세의 침탈과 무너져가는 왕조, 관료들의 행패에 사지로 내몰린 조선 민초들의 모습이 서방의 기자 눈에는 한심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잭 런던의 눈에 비친 조선 지배계층의 모습은 어땠을까? 백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잇속만 챙기는 파렴치한들이었다.

“양반들은 모두가 도둑이었다. 백성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것을 으레 빼앗아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백성들은 지배계급이 도둑놈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도둑질에도 단계가 있는데, 지배계급의 도둑질은 그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강탈이었다. 그렇게 합리적인 방법으로 도둑질한 군수는 자기 부하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그가 떠날 때 부하들은 마을의 문 근처에다가 그가 절제 있게 도둑질한 것을 기념하는 비(碑)를 마련해주었다.”<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

조선 백성 입장에서 압록강을 넘어온 러시아군의 행패도 그렇지만, 일본군도 만만치 않게 여겨졌다. 날이 저물면 행군하던 병사들은 잠을 자기 위해 조선인들의 집을 차지했다. 당연히 집주인은 쫓겨나는 운명을 감수해야만 했다. 1904년 4월 말 우여곡절 끝에 압록강 변 의주에 도착한 잭 런던은 본격적인 전쟁의 무대를 보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계곡에서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포격전을 벌였다. 포병부대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상대방을 향해 포탄을 날렸다. 러시아와 일본의 군대가 맞붙은 전쟁이었는데 포탄에 갈기갈기 찢기는 것은 조선 땅이었다.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


<2014-11-16> 프레시안


☞기사원문: 식민지 철도는 일본군부터 나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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