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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6) 국회 프락치 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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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재판부, 변호인 증인 신청 모두 기각… 무죄 입증 길 막아


■ 검찰 측 증인만 채택


경찰 발표에서 남로당 비밀문건을 자기 국부에 은닉했다는 여인 정재한, 그녀를 법정 증언대에 세울 경우 우려되는 상황 때문에 아예 조기 처형을 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도 나왔다. 더욱 이상한 것은 당시 정 여인이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또 다른 이야기다. 이 사실은 오제도 검사가 훗날 그레고리 핸더슨(사건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정치과 국회 담당자)에게 한 말에서 처음 알려졌다. 핸더슨의 기록을 보면 오제도는 의외의 말을 했다. 정재한이 전향해 풀려났을 것이며 아마도 ‘보도연맹’에 넘겨졌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프락치사건에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남로당 중앙위원으로 이 사건의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왔던 이재남도 전향해서 풀려난 뒤 지금 어디에서인가 살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핸더슨의 ‘프락치사건 기록’ 중 육필원고 – 김정기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 2>, 235쪽, 한울, 2008)


오제도 검사의 그런 말이 사실이었다면, 이 사건과 관련하여 수사기관이나 법정에서 피고인들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남로당의 중앙위원 또는 월북문건연락원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니, 참으로 모순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재판부의 심리 자세에도 의아스러운 점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검찰이 신청한 증인은 다 받아들인 반면, 변호인 측에서 신청한 증거 조사와 증인 신청은 모두 기각했기 때문에 ‘무죄 입증’의 길이 막혀버렸다는 사실이다.




일러스트 | 박건웅

■ 법정에서의 남로당 관련 문답


또 재판장은 피고인 중에 남로당의 도움으로 당선된 의원이 있다는 점을 집중 추궁했다. 5·10선거 때 충남 아산에서 당선된 서용길 피고인에 대하여 재판장은 “서 후보가 윤보선(당시 상공부 장관)과 같은 거물을 제치고 당선된 것은 좌익 유권자들이 지지한 결과”라면서 “피고인은 좌익 유권자들에게 크게 신세를 졌기 때문에 빚을 갚으려고 했겠군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방청석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재판장의 신문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재판장 = 피고인의 기호는? 2번이 맞지요?


피고인 = 네, 2번이었습니다. 윤보선씨는 1번이었습니다.


재판장 = 피고인 기호가 2번이어서 좌익들이 야경꾼으로 변장하여 딱딱이를 두 번 때렸다는데, 그것은 좌익들이 기호 2번에 투표하라는 것이라던데? 또한 그들은 같은 뜻으로 전지 불빛을 두 번 비췄다던데? 사실인가?


피고인 = 좌익들이 전지 불빛을 두 번 비출 만큼 제가 그렇게 유명했는지 몰랐습니다. (1949년 12월12일 제9회 공판)

재판장은 이 사건의 주범 격인 노일환을 집중 추궁했다.


재판장 = 이삼혁이 남로당 가입을 권유하고 프락치를 구성하라고 했다는데?


피고인 = 나는 남로당 가입을 권유받은 일이 없고, 프락치라는 말도 들은 일이 없습니다.


재판장 = 피고인은 이삼혁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남로당에 가입했다고 자백했다고 되어 있는데?


피고인 = 나는 헌병대에 거짓 자백을 했습니다. 내 건강이 고문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재판장은 미군 철군 요구를 위법으로 보는 입장을 드러내고 신문을 했다. 그러나 당시 유엔총회가 한반도로부터의 외군 철수를 결의하고, 유엔 한국위원회에 철군을 검증하라는 임무를 부여한 상태였으며, 미국 또한 철군을 공식화한 시점이었다.

재판장은 이문원에게도 물었다.


재판장 = 하사복(이삼혁의 또 다른 이름)에게 정치자금 1000만원을 남로당에서 줄 수 없느냐고 요구한 일이 있다는데?


피고인 = 그것은 그가 돈을 갖고 있는 것 같아서 돈을 달라고 한 것이지 남로당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으며, 그로부터 돈 15만원을 받아 쓴 일은 있습니다.


이처럼 노일환과 이문원이 이삼혁(일명 하사복)과 접촉하고 그로부터 돈을 받아 쓴 사실은 그 액수나 명목이 어떠했든 이 사건 판결에 불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문원은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남로당의 공작을 알지 못했으며 내가 한 행동은 민족주의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념적으로 부르짖은 것이 남로당에 이용당한 것입니다.”


■ 검사의 논고, 변호인들의 변론


1950년 2월4일 제14회 공판에서 남로당 서울시 프락치 책임자라는 정해근 및 노일환과 같은 감방에 수용 중 그로부터 자신이 남로당원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김정호가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마치고, 3개월 만에 사실심리가 끝났다.


엿새 뒤인 같은 달 10일엔 구형 공판이 열렸다. 오제도 검사는 장장 두 시간 반 동안 준엄한 논고를 했다. 그는 “피고인들의 외군 철퇴 주장은 남로당의 지령에 의해서 한 것이고, 노일환은 협박을 받고 남로당에 가입하여 국회 프락치로 활동했으며 공작비를 받아 소비했다. 이문원은 가세가 빈한하여 국회의원 입후보 시 남로당을 이용했고, 남로당의 자금을 받아 사용했으며, 피고인들은 국가의 이익과 발전을 저해한 죄상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그러고 나서 노일환과 이문원에 대해 각 징역 12년, 김약수와 박윤원에 대해 각 징역 8년, 그 밖의 피고인들에 대해서는 징역 2년 내지 6년을 구형했다.


그날 오후엔 변호인들의 변론이 시작되었다. 도합 16명의 변호인들은 입을 모아 피고인 전원의 무죄를 주장했다. 먼저 노일환의 변호인 오견인 변호사는 노일환이 남로당에 가입하고 그 지시에 따라 활동했다는 공소사실은 남로당원의 법정 증언에 의하더라도 입증되지 않았으며 달리 이를 증명할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문원의 변호인 신순언 변호사를 비롯한 다른 변호인들의 변론도 대체로 이와 비슷했다. 즉 ‘증 제1호(남로당의 비밀문건)’는 그것을 국부 안에 숨겨두었다가 체포되었다는 정재한이 증인으로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수사기관에서의 자백은 고문 등 가혹행위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임의성이 없다. 외국군의 철군을 주장한 것은 정책문제로 범죄가 될 수 없고 국회의원의 원내 발언에는 면책특권이 적용된다. 대체로 이런 요지였다.


피고인들은 최후진술에서 헌병대 등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에 의존하는 재판 심리를 부당하다고 하면서 대부분 무죄를 주장했다.


■ 중형 선고로 끝난 1심 재판과 6·25 발발


판결 선고 공판은 첫 검거일로부터 거의 1년이 되어가는 1950년 3월14일 오전 10시에 열렸다. 법정 안팎은 경비가 삼엄했고 방청객으로 넘쳐났다.


사광욱 재판장은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첫머리에 해방 후의 남북 분단과 남한 정부의 수립 과정 등 정세 변화를 장황하게 설명한 다음 나름대로의 시국관을 부연해 나갔다. 그러고 나서 검사의 공소사실을 거의 다 유죄로 인정하고 피고인들에게 검사의 구형에 근접하는 중형을 선고했다. 즉 주범 격인 노일환과 이문원에게는 각 징역 10년, 김약수와 박윤원에게는 각 징역 8년 등 국회의원 13명 전원에게 실형을 선고했다(의원이 아닌 오관은 징역 4년, 최기표는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 선고).


판결문에는 유죄 판시의 도를 넘는 강경한 호통 문구도 들어 있었으니 “우리 대한민국을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게 하고 국가 변란을 야기하여 마침내는 공산독재정권을 수립함에 그 의도가 있었다고 볼 것이며”라든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국가 민족에 대한 반역이요, 단호히 배격되어야 할 이적행위라고 단정치 않을 수 없는 것이며”라는 대목이 그 예로 거론될 만했다(이 사건 재판기록은 6·25전란으로 소실되어 판결문도 찾을 길이 없는데 다행히 범우사 발행의 월간지 ‘다리’ 1972년 4~8월호에 그 판결문 전문이 수록되어 유일한 문헌으로 남아 있다. 또한 공판기록은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정치 담당으로 있던 그레고리 핸더슨이 한국인 직원의 도움으로 공판의 전 과정을 녹취한 것이 미 국무부 외교문서로 보존되어 있고 그것이 <국회프락치사건 재판 기록>으로 한국에서도 간행되어 법정 문답의 구체적 내용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런 1심 판결에 대해 피고인 모두가 불복 항소를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석 달이 좀 지났을 때 불의의 6·25가 일어났다. 그 난리통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피고인들은 모두 옥문을 나왔는데 그중 일부 의원은 북으로 갔다. 정부 측에서는 그들의 북행이 월북이었으며 그 사실이 바로 남로당 관련 활동을 했다는 증명이라고 했다.


이 사건을 두고 ‘정치적 반대자 탄압을 위한 용공조작’이라는 비난과 아울러 ‘민족국가의 체통과 민족분단을 막아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행한 일이었다’라고 보는 견해(진덕규, ‘이승만 권위주의체제의 시발점, 국회프락치사건’, ‘한국논단’, 1992)가 있는가 하면, ‘남로당이 입지 타개를 위해 무리수를 두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국회프락치사건이 터진 원인이 된 것’이라며 사건 실재론을 굽히지 않는 사람도 있다(이영민, ‘대남공작의 원류를 알자’, ‘한국논단’, 2014). 피고인 중 일부 의원의 언동 처신에 그런 상충의 양면이 내재했다는 사실을 아주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제3설도 나돌았다.

<2014-11-16> 프레시안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6) 국회 프락치 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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