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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줄리아의 가족 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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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줄리아 리(김주영) 발행일|2014년 11월 20일

판 형| 신국판(153×225), 무선제본

면 수|340쪽

분 야| 역사 > 테마로 보는 역사 > 한국인물사/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ISBN| 979-11-953324-0-3 (03910) 가 격|16,000원

 

<책 소개>

절망의 시대를 온몸으로 맞선 의열단의 창단자,

한국의 레지스탕스 김대지 가족 이야기

세간에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결사 의열단의 막후 이야기

항일단체 ‘조선의용군 3지대’는 어떻게 중국에 남게 되었는가

열두 살 소녀가 중국 문화혁명을 직접 겪으며 써내려간 리얼 스토리

나라가 무기력하고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던 시대,

그들은 왜 모든 것을 던져 이 나라를 구하려 했는가?

이 이야기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항일독립운동사의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김자동 |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회장 

 이 책은 자칫 사라질 뻔했던 우리 역사의 소중한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이덕일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출판사 리뷰>

절망이 일상이 된 시대,

삶이 버거워 대의를 꿈꾸지 못하는 시대,

나라가 무기력하고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시대

한반도의 레지스탕스들은 왜 모든 것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 했는가?

여기, 한없이 치열했던 지난 100년의 한민족 근대사의 중심에서 시대의 아픔을 같이 한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 있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낳은 막후의 인물이자 50평생 재산과 건강, 명예, 가족보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사나이, 김대지.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가족을 거의 돌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함께 항일운동의 전면에서 민족의 혼을 지켰던 그의 아들.

저자 줄리아 리(김주영)는 어릴 적부터 상해임정 요원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허브 역할을 했던 할아버지 김대지와 중국 항일운동 단체 조선의용군 제3지대의 전사였던 아버지 김명의 이야기를 듣고 보며 자랐다.

책에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의열단의 막후 여러 이야기, 중국에서 일본과 싸우면서도 조선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던 아픔, 그리고 중국 문화혁명과 민족정풍운동 가운데에 우리 민족이 겪었던 큰 시련들이 마치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선명하게 펼쳐진다.

절망이 일상이 되고, 대의를 꿈꾸기에는 사치였던 그때, 왜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 했을까? 그들도 쉽고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왜 다른 삶을 살았을까?

저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했다. 이 책은 이러한 큰 질문에 대한 저자 나름의 답이다. 한민족이라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혼을 지니고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나의 할아버지는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의열단’의 창단자였고

아버지는 중국이 존경했던 항일단체 ‘조선의용군 3지대’의 전사였다!

1891년에 태어나신 할아버지와 1991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생을 담은 이 100년의 기록은 우리 민족 100년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땅에서 살아 온 조선족들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 주기도 한다. 그들의 생애는 우리 민족의 험난하고 비장한 근현대사의 기록과 일맥상통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인생 발자취를 따라 그분들이 걸어온 험난한 길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그분들에게서 우리 겨레의 끈질긴 민족혼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저력이 있는 민족이다. 우리는 나라까지 잃은 절망 속에서도 광복의 희망을 잃지 않고 저항을 멈추지 않은 민족이다. <저자의 말> 중에서

 

<추천사>

저자는 폭넓은 역사자료를 기반으로 자신의 생생한 경험까지 더해 가족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갔던 우리 동포들의 간고한 삶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그동안 우리가 간과해 온 역사적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삼대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민족의 수난과 항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이 이야기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항일독립운동사의 한 자리를 차지할 것임을 믿는다.

김자동 |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회장

우리 역사에서 지워진 이름이 어디 한둘이겠는가마는 일봉(一峰) 김대지(1891~1943) 선생 같은 경우는 그리 쉽게 잊혀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그는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했다. 김대지는 이후에도 의열단의 고문으로서 무장투쟁에 의한 조국광복의 한 길을 걸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의원이자 내무위원으로서 행정의 기틀까지 세우려고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줄리아의 가족 순례기》는 당시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부친 김명의 고초를 곁에서 지켜본 딸 줄리아 리김주영가 되새겨 본 김대지 후손의 가족 3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자칫 사라질 뻔했던 역사의 소중한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이덕일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저자 소개>

줄리아 리 Julia Lee (김주영)

19세기 말에 태어난 독립운동가 할아버지 김대지에 대한 이야기와 20세기 말까지 살다 간 항일전사 아버지 김명의 회고를 들으면서 한반도 근대 이민 100년사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다.

1982년에 베이징 중앙민족대학교를 졸업하고 동대학 민족언어학과에서 강의하였으며 1988년 베이징대학교 동방언어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베이징대학교 철학과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면서 연구에 매진해 왔다. 잠시 한국에 체류하는 1년 동안 성균관대학교 유림관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중국어 강의를 하기도 했다.

1990년 남편을 따라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98년 회계학 석사학위와 미국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미국의 여러 회사에서 고급회계사 및 회계과장 등을 거쳐, 2004년 10월부터 미국 법무부와 국토안전부 등에서 일했다. 2012년부터 현재까지는 미국연방정부 증권교역위원회(U.S.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에서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다.

역서로는 《모슬렘의 장례식》이 있으며, 그 외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차례>

추천사 1 | 항일독립운동사의 자랑스러운 한 자리  004


추천사 2 | 잊혀서는 안 될 우리 역사의 아픈 현장을 생생히 만나다  006


프롤로그 | 우리 가족, 한민족 100년사의 축소판이 되다  008

1부. 임정 요원, 나의 할아버지 김대지

1장. 줄리아의 가족사 순례가 시작되다  021


할아버지의 유언: “우리는 망국노다…” | 옥수수 밭이 되어 버린 할아버지의 무덤 |
단석산 신선사

의 목탁소리 | 독립의 가망은 보이지 않았다 | 아버지의 ‘경상도국’

2장. 망국의 슬픔과 망명 생활  044


한 가난한 유생의 아들로 | “시일야방성대곡” |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금광으로 |
이종암과의 운명

적 만남 | 중국으로 망명하다

3장. 상해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다  061


랑스 조계지 보창로 329호 | 망명 후의 첫 고향 방문, 그리고 바람처럼 사라지다 | 가장 조심해야

할 적들

4장. 독립운동의 막후 지도자 김대지 073


의열단은 일제에게 공포였다 | 철저한 비밀결사, 의열단 |
의열투쟁사에 파묻힌 거물급 지도자 | 의

열단의 선구 조직, 대한광복회 | 의열단의 양대 지주, 신채호와 나의 할아버지 | 할아버지가 직접

참여한 의열단 의거

5장. 북경에서의 반일 독립활동 109


북경에서 ‘5인 과격자’로 지목되다 | 북경 군사통일촉성회의 발기인이 되다
| 북경특파원

6장. 조선사람들은 단합하기가 왜 이다지 힘든가 128


북만의 영고탑에 멈춘 발걸음 | 항상 균형 감각을 지니다 |
9·18사변 후의 참담한 만주 생활 | 홍범

도 장군의 이야기

2부. 평생토록 민족혼을 지킨 아버지 김명

7장.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항일투쟁에 투신하다 153


아버지와 아들의 숙명 | 전설처럼 나타난 조선의 혁명투사 | 이상조(김택명)와의 인연 | 주덕해와

의 운명적인 만남 | 평양으로 파견되다

8장. 조선사람들의 자치를 위해 184


지방민족주의자로 낙인찍힌 아버지 | 조선족 자치정부에서 중임을 맡다

9장. 모든 것은 민족정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3


민족정풍에서 우리 민족이 잃은 것 | 스스로 정풍의 과녁이 되다 |
아버지에게 찾아온 비운 | “나는

조선사람이다”

10장. 발해의 옛 고을 화룡 현위 서기로 부임하다  219


누가 뭐래도 조선사람 | 아버지는 차라리 농사꾼이기를 원했다

11장.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문명의 반란  229


12살 소녀가 노트에 기록한 진실 | 철창 속에 갇힌 아버지 | 아버지가 납치당하다 |
괴짜 | 아버지

의 눈물 | 유린당한 인간의 존엄 | 깨진 둥지 안의 ‘반동새끼들’ | 아이들이 공포에 떨던 세상 | 별안

간 생겨난 조선특무 무리들 | 보일러 굴뚝에 몸을 던진 윤 국장 | 주은래의 평양 방문 | 외로운 항거

| 주덕해의 누명이 벗겨져 한을 풀다

12장. 고국방문의 꿈이 이루어지다  309


평생소원을 이룬 고국방문 | 우리는 모두 고구려의 후손 | 무궁화 사랑

에필로그 | 우리에게는 여전히 ‘의열단’이 필요하다 324


할아버지 김대지의 일생  331


참고문헌  335

<책 속으로>

할아버지는 그렇게 조선사람으로 태어난 의무와 사명을 다했다. 일편단심 조국 광복과 독립을 바라면서 풍찬노숙 52년을 일기로 한평생을 마친 할아버지는 필생의 소원인 독립을 기어이 보지 못하셨다. 그러니 어찌 한이 맺히지 않았겠는가? 광복을 눈앞에 두고 가셨으니 어찌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었을까?

1943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945년 초가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할아버지에게 전보를 보내왔는데 “살아 있다면 빨리 귀국하라”는 내용의 통지였다.

할아버지는 취원창 동쪽 구릉지에 있는 조선인 묘지에 비석도 없이 묻혔다. 취원창의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가래침이 땅에 떨어지기 무섭게 얼어붙을 정도의 혹한으로 만주땅은 고인의 무덤 하나도 껴안기 힘들어했다. 부득불 불을 지펴 녹인 후에야 겨우 땅을 파고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20여 년을 그런 곳에서 타향살이로 보냈던 할아버지는 따스한 고향 밀양을 항상 그리워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꺾일 줄 모르는 투지를 가진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삭풍이 휘몰아치는 만주의 혹한 속에서도 독립을 위한 노력을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1장. 줄리아의 가족사 순례가 시작되다”(23-24쪽)에서

평양 감옥에서의 복역을 끝내고 출옥한 뒤 할아버지는 국내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군자금 확보였는데 고향 밀양 본가는 물론 여러 친지들의 재산을 처분하여 무기 구입과 국외 독립기지 구축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었으므로 새로운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어 동지들을 규합하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귀국했을 때는 3.1운동이 일어나기 반년 전이었다. 조선은 불만 지르면 폭발할 것 같은 화약상자였다. 당연히 일경의 감시 또한 만만치 않았다. 왜놈과 친일 주구들의 악독한 파괴로 대부분의 비밀결사 조직들은 이미 와해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새로운 지하단체의 필요성을 절실히 통감하면서 국내의 동지들과 함께 조직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밤이면 모여서 비밀회의를 열고 낮에는 암암리에 연락을 가졌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일찍부터 왜경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아오던 할아버지는 동지들로부터 급히 피신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곧바로 그동안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니고 밤을 타서 집을 떠났다. 그렇게 하여 일제 관헌의 경계망을 피해 본격적으로 해외망명의 길에 올랐다.

*“2장. 망국의 슬픔과 망명 생활”(58쪽)에서

■상해임정 수립 후, 할아버지가 임정의정원 의원 및 내무 위원이 되었다는 소식이 세상에 전해지고 일제가 드디어 그의 출신, 배경, 경력 등을 알아낸 뒤로 밀양 내이동 847번지 본가는 거의 매일 일경들이 들이닥쳐 수색하였고 식구들은 시시각각 일경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바로 그런 시점인 1919년 초겨울에 그는 일제 경찰과 밀정들이 욱실거리는 조선에 임시정부 조사원 신분으로 잠입하여 무사히 고향 밀양으로 돌아왔다. 이는 죽음을 무릅쓴 모험이었다.


1918년 가을에 해외로 망명한 후 처음 와보는 고향이었다. 꿈속에서도 그리던 밀양이었지만 고향은 그에게 마음껏 다닐 자유도 주지 않았다.

상해임정에서 유일한 밀양 출신인 그는 밀양경찰서의 눈엣가시였다. 본가 주위는 철저히 감시당했기에 근처에 얼씬도 할 수 없었다. 왜적에게 유린당한 고향땅은 차갑고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무거운 심정으로 밀양에 은거해 있는 동지들을 찾아갔다.

*“3장. 상해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다”(67-68쪽)에서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은 항일민족투쟁사에 길이 남을 명문이었고 그 정신에 따라 항일투쟁을 전개한 의열단은 우리 독립투쟁 역사에서 가장 과감하게 싸운 단체였다. 이 의열단의 정신적 지주였던 신채호와, 의열단을 창단시키고 그 운동 목표와 조직 특성을 제시한 나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역사에서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지속했다. 대한광복회 국내 회원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면서 한국인 부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배정하여 미리 통보하고 비밀리에 찾아가서 징수하는 방법을 취할 때 쓴 그 <광복회 통고문通告文〉과 <광복회 고시문告示文>도 당시 국외 대한광복회 회원이었던 신채호 선생이 집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채호 선생이 의열단 선언문을 쓴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4장. 독립운동의 막후 지도자 김대지”(90-91쪽)에서

■할아버지와 이청천의 첫 상봉은 이렇게 백두산 밀림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청천은 일 년 전 상해임시정부 의정원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온 김동삼에게서 대한광복단에서 활약을 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도 상해에서 이미 신흥무관학교에 문무를 겸비한 일본군 중위 출신이었던 이청천이 교성대장으로 있다는 소문을 들어왔다. 이청천 장군은 그에 대한 신비스러운 소문과는 달리 체구가 크지 않았고 몸집도 우람하지 않았다. 보통 키에 몸이 단단해 보일 뿐이었다. 그때 이청천 장군은 삼십이 조금 넘었는데 할아버지보다 두세 살이 많았다.


반일 독립의 한길에서 만난 두 투사는 밤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서 자란 고향 이야기로부터 망국 후의 자신의 경력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털어놓고 오랜 친구처럼 마음을 주고받았다.

*

“5장. 북경에서의 반일 독립활동”(121쪽)에서

■나는 언니네 집에 보관해 두었던 책무더기 속에서 1960년 8월에 현위 회의에서 민족정풍에 관해 아버지가 쓴 검토 자료들을 찾아내 보고 또 당시 실상을 아버지께 물어보았다. 나는 다시 한번 아버지가 당시 처했던 황당하고 비참한 상황에 놀랐다. 아버지는 현위 제2서기로서 민족정풍에 관한 상급의 지시를 전달하면서도 또 다음날 회의에서는 자아 반성 검토를 해야 했고, 다음 수순으로는 자기 부하들인 국장들에게서 사정없이 혹독한 비판을 받는 어처구니없이 난감한 처지에 있었다. 정말 잔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1960년 말까지 이런 세월을 보내야 했다. 지긋지긋한 민족정풍의 비판은 그때까지 지속되었다. 1960년 여름에 아버지는 민족주의자로 현위상무위원회에서 비판받다가 억울하고 울화가 치밀어 혈압이 오른 나머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그때 그는 막 40대에 들어선 젊은 나이였다.

*“9장. 모든 것은 민족정풍으로부터 시작되었다”(210쪽)에서

■중국에 살고 있는 많은 조선족 선조들은 결코 고국을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곤란을 견디다 못해서 떠난 것이며, 고국에서 일본인들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생활의 궁핍으로 인해 만주로 건너가지 않을 수 없던 불쌍한 유랑민족이었다.


중국 조선족의 파란만장한 운명은 망국의 한을 안고 조선 땅을 떠나온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땅에서 힘들게 삶의 터전을 닦고 살아온 그들이 없었다면 만주에서 독립투쟁이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고, 상해임시정부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중국에서 항일 열사가 가장 많이 난 소수민족은 조선족이다. 중국 조선족들 대부분은 우리의 선조들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도 무릎을 꿇지 않고 항거했던 그 저항 정신 즉 민족혼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12장. 고국 방문의 꿈이 이루어지다”(317쪽)에서

■할아버지는 나라의 독립을 이루지 못한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남과 북이 분단된 조국의 비극을 슬퍼하며 돌아가셨다. 나는 그분들의 한이 지금도 우리 곁에서 맴도는 것 같아 안타깝고 슬프다. 더구나 죄를 뉘우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일제의 후손들이 다시 군국주의의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선인들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추려고 광분하는 현실이 나의 피를 거꾸로 솟게 한다. 할아버지도 분하여 땅속에서 벌떡 일어나실 것 같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인생 발자취를 따라 그분들이 걸어온 험난한 길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그분들에게서 우리 겨레의 끈질긴 민족혼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저력이 있는 민족이다. 우리는 나라까지 잃은 절망 속에서도 광복의 희망을 잃지 않고 저항을 멈추지 않은 민족이다.

*

“에필로그”(329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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