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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돈암장과 여운형 피격 혜화동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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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4) 서울시장 공관·혜화동로터리·돈암장



▲혜화문 일대 와룡공원~혜화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혜화문일대(와룡공원 ~ 혜화문 구간)


<서울시장 공관>, 드디어 성곽에서 내려오다


숙정문에서 성밖으로 나와 성북동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 정말 많은 유적지들이 있었으며, 주로 일제시대 이후 현재까지 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들이었다. 이제 성북동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성곽길로 접어 들었다. <심우장>에서 다시 숙정문으로 돌아가기에는 좀 멀고 또 숙정문에서 와룡공원까지의 길에는 특별히 가 볼만한 곳이 없기에 심우장과 가까운 와룡굥원으로 가서 다시 성곽길을 걷기로 하자.


용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와룡공원(臥龍公園)>이라 이름 지어진 이곳에서 잠시 쉰 뒤 동소문인 <혜화문>쪽으로 걸었다. 성곽은 <서울과학고등학교> 옆을 지나 한말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중고등학교의 담장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의 성곽이 그대로 학교 담장으로 이용된 셈이다. 이렇게 계속 걷다 보면 혜화문 바로 옆에서 성곽이 끝나는데 바로 끊겨진 성곽 위는 다름아닌 그 동안 33년간 서울시장공관이 위치해 있던 곳이다. 한양도성의 성돌을 깔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 건물은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으로 지어진 건물로 해방 후 1959년부터 20년 동안 대법원장 공관으로 사용되다가 1981년부터는 서울시장공관으로 33년간 사용되었다. 공공건물조차 도성을 깔고 앉아 있다고 하여 그 동안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던 것이 35대 박원순시장에 이르러 혜화동 시장공관이 도성복원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2014년 이전하게 된 것이다. 이후 도성복원과 어떻게 연계될 지 궁금하다.



▲ 성곽을 타고 앉은 옛 <서울시장공관>,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이 성곽복원을 위해 다른 곳으로 공관을 옮겼다. [사진-유영호]

옛 서울시장공관에서 바로 옆으로는 속칭 동소문이라 부르는 <혜화문>이 위치해 있다. 현재의 혜화문은 1994년 복원된 것으로 그 위치도 본래 차도 위에 있었던 것이지만 차량소통을 위하여 차도 옆에 복원한 것이다.

혜화문의 명칭은 본래 <홍화문(弘化門)>이었다. 그러다 성종 14년(1483) 창경궁이 새로 건립되면서 그 정문을 홍화문으로 명명하면서 동소문과 혼동되어 중종 6년(1511) 혜화문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한편 도성 북쪽에 있는 숙정문과 창의문 모두 풍수지리상 닫혀 있었으므로 혜화문은 함경도 등 북방으로 통하는 경원가도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문으로 여진족 사신이 출입하였다. 그리하여 경비병력이나 문루 등의 규모는 소문임에도 다른 대문과 다름 없이 컸다. 또 문루의 천장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문밖으로 지금의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일대에 새가 많아 농사에 피해가 컸으므로 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새의 왕인 봉황을 그려 넣었다.


이렇게 500년은 지켜 온 혜화문이 일제시대인 1928년 문루가 낡았다는 이유로 헐어버렸으며, 1939년에는 돈암동행 전철을 부설하면서 돌로 된 아치형 홍예마저 없애버린 것이다. 이렇게 혜화문은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롭게 복원되기 까지 55년 간 그저 혜화동, 동소문동 등의 지명으로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옛 서울시장공관 바로 옆에 성곽이 끊긴 채 서있는 <혜화문>. 본래의 명칭은 홍화문이었지만 창경궁의 정문을 <홍화문>으로 지으면서 혜화문이라 바꾼 것이다. [사진-유영호]

이렇게 간단하나마 혜화문의 역사를 살펴보고 이제 도성 내사산 가운데 하나인 낙산으로 향하려 하였지만 이곳 혜화문을 사이에 두고 도성밖으로 해방정국 속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 <돈암장>이 있으며, 또 도성 안쪽으로 혜화동로타리는 바로 여운형이 암살된 곳이기에 잠시 찾아 두 곳을 찾아 보고 낙산으로 향하도록 하자.


과연 암살의 배후는 미궁인가? <여운형 암살>현장


혜화문에서 약 300미터 지점에 혜화동로터리가 있고, 그곳에 혜화파출소가 있다. 바로 이곳에서 1947년 7월 19일 해방정국의 이남 정치지도자 몽향 여운형이 암살된 것이다. 여운형은 해방 이후 이미 10여 차례 테러행위를 당하였고, 그러던 중 11번째 테러에 그만 세상을 달리한 것이다. 번번히 테러를 당하여 두 딸을 북으로 보내면서도 막상 자신은 테러를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어떻게 피살되었을까?


그날 오후 1시 미국으로 떠나는 김용중을 찾아가 작별인사를 하고 종로구 계동 자택으로 돌아 오는 길 혜화동로타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곳 파출소 앞에 서있던 트럭이 갑자기 나와 길을 막았다. 이순간 괴한 한 명이 자동차 범퍼로 뛰어올라 여운형을 향해 세발의 총을 쏘았다. 경호원 박성복이 권총을 빼들고 범인을 추격했지만 누군가 골목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나와 경호원의 허리를 잡고 실랑이를 벌였다. 이 사이 범인은 도주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경호원을 붙잡고 실랑이를 벌인 사람은 동대문경찰서 현직경찰관이었다. 참고로 이곳에는 지금도 파출소가 하나 있는데 이곳이 당시의 위치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3일 후 경찰은 범인이 18세 소년 한지근이라고 발표했고, 그 뒤 미군정 경찰은 그의 단독범행으로 처리했다. 이러한 사건 정황만 보아도 분명 이 사건에 경찰이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당시 여운형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대병원에 경찰총감 장택상이 조문을 왔을 때 여운형의 장녀 난구는 장택상을 보고 “우리 아버지를 죽인 자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나타났느냐?”며 마구 소리지르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 혜화동로타리, 여운형 암살현장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이렇게 암살의 배후를 밝혀 내지 못한 채 미궁에 빠져 버린 이 사건은 45년이 지난 1992년 5월 월간 《말》지에서 “몽양 살해범 4인의 최초 고백 ? 여운형 암살 배후에 노덕술이 있었다”고 폭로한 것이다. 당시 노덕술은 정부수립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이승만은 그의 체포에 대노하면서 결국 반민특위의 해체까지 몰아갔다. 이들의 때늦은 폭로는 공소시효가 지나 사법처리는 불가능했고, 소멸시효조차 없는 진상규명 마저 흐지부지 되고 만 것이다.


참고로 당시 사건의 수사는 악질 친일경찰로 이름 높은 노덕술이 맡았으며, 담당 검사는 뒷날 이승만 정권에서 법무장관을 된 조재천으로 둘 다 철저한 친일파였다. 경찰청장 장택상도 《친일인명사전》에 오르지만 않았을 뿐 집안 자체가 온통 친일파이다.


암살범으로 처벌 받은 한지근은 무기징역선고를 받았지만 전쟁 중 행방불명 되었다. 하지만 재일통일운동가 정경모씨에 의하면 그는 일본에서 이름조차 바꾸고 오랫동안 지냈다고 한다.


해방정국 속에서 많은 유명 정치인들이 암살되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그 배후가 밝혀지지 않았다. 한민당 송진우(1945.12.30), 근로인민당 여운형(47.1.19), 한민당 장덕수(47.12.2), 한독당 김구(49.6.26) 등 이 모든 암살배후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채 우리의 역사 속에 감춰져 있다. 하지만 진상규명이란 소멸시효가 없기에 언젠가는 반듯이 그 암살배후를 밝혀 낼 것이라 기대해 본다.


참고로 <여운형묘소>는 강북구 우의동 106-1에 위치해 있다. 지난 독재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은 쉽게 접근조차 어려웠지만 현재는 누구나 그러한 두려움 없이 찾을 수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가보기를 바란다.


이승만의 <돈암장>, 그의 미국생활은 항일인가 친일인가?


이번에는 동소문밖의 <돈암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금은 동소문동에 위치해 있지만, 당시 해방정국 시기에는 이곳은 돈암동에 속하였기에 여전히 돈암장이라 부른다. 한편 돈암동(敦岩洞)이란 동명은 미아리고개의 옛 이름이었던 ‘되너미고개’를 한자로 옮겨 돈암현(敦岩峴)이란 부르던 것에 그 유래가 있다.

 



▲ 이승만이 해방 직후 귀국하여 처음 머문 <돈암장> [사진-유영호]


▲ 돈암장 내부. [사진-유영호]

이곳은 이승만 전대통령이 광복을 맞이하여 미국에서 귀국 후 약 2년 가까이 머문 곳이다. 그는 귀국 후 약 보름간 조선호텔에 머물다 측근 장덕수, 윤치영 등이 그의 거처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당시 재력가였던 정진섭이 자기 집을 선뜻 내주게 되어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이다.


이 집은 무형문화재인 대목장 고 배희한씨가 지은 것으로 그는 경복궁 향원정을 수리했고, 한국의 집, 죽서루 등을 지은 당시 유명한 목수였다. 그는 생전에 “돈암장은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짜서 지은 목조건물”이며, 서까래와 내실 기둥은 모두 백향목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또 이러한 건축가의 경력으로 이 집은 조선왕조가 망한 후 궁실건축을 담당하던 목수가 민간으로 나간 근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 이곳은 개인소유로 출입이 어렵다. 전체적인 돈암장의 모습을 보려면 바로 앞에 위치한 삼선중학교 운동장에 들어가 내려다 보면 볼 수 있다. 하지만 남쪽 정원의 대부분은 연립 주택을 지어 분양한 관계로 대지가 축소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이곳은 2004년 문화재로 등록되었고, 근현대사와 관련된 드라마에서 돈암장 관련 장면은 대개 이곳에서 촬영되고 있다. 김두한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이승만 관련 장면 역시 이곳에서 촬영하였다.


그런데 과연 이승만이 이곳에 머물 때 어떠한 일들이 있었나를 보자. 아마도 그가 머문 기간 중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신탁통치결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돈암장은 김구의 경교장과 함께 당시 반탁운동을 위한 우익인사들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탁통치에 관한 내용은 이미 경교장을 지나며 이야기한 것이다. 그래서 비록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아니지만 이승만이 이곳에 오기 직전 과연 그는 미국에서 어떠한 일들을 하였는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고 판단하여 그의 미국에서의 행동을 살펴보기로 했다.

1904년 이승만은 고종의 밀사자격으로 조선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미국으로 파견되어 나갔다. 그런데 그는 미국 루즈벨트대통령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의 대표자”라면서 “황제는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대한제국과 고종을 적극 부정했다고 미국신문은 보도했다. 그리고 일진회란 바로 일사늑약을 적극 찬동했던 전형적인 친일단체이다.


이런 그의 친일적 사고는 다시금 확인된다. 1918년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징집카드를 작성하였는데 이승만은 자신의 국적을 자필로 ‘Japan(일본)’이라고 적어놓은 것이다. 아마도 식민지 조국보다는 일본으로 적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그에게 조국이란 그저 선택지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바로 이듬해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그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지 보면 더욱 놀라게 된다.

▲ 이승만은 1918년 미국에서 징집서류에 자신의 국적을 Korea가 아닌 Japan으로 기록(좌)하였으며, 1920년 한인기독교학원의 미국인 교사 손버그의 친일발언에 대하여 비판한 학생들을 처벌해 줄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교감에게 보냈다. [출처-뉴욕 한국일보]

또 최근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1920년 그가 책임자로 있던 학교에서 친일미국인 여교사를 편들고,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은 오히려 가혹한 처벌을 주기까지 했다. 당시 이승만이 직접 초빙한 교사 알렌 손버그는 친일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 “한인들은 돼지와 다를 바 없다” “일본의 지배를 받아 마땅하다”는 발언을 되풀이하자 학생들은 다른 교사들에게 “친일?혐한 발언이나 조선 학교를 모욕하는 사람을 경고하기로 했다. 학교와 조국을 모욕한 교사를 제지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하여 민찬호 교감은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에게 전보를 보내 “친일 성향의 손버그가 학생들을 짐승이라고 불렀다. 교사를 내보내려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곧장 민 교감에게 전보를 보내 “그런 일은 허용될 수 없다. 그들(학생들)을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알렸으며, 손버그에게는 “민 교감에게 학생들을 복종하라고 해뒀으니 떠나지 말라”는 전보를 보냈다.

▲ 이승만과 친일미국인 여교사 알렌 손버그. [사진출처-민족문제연구소]

이런 일로부터 1년뒤인 1921년, 그는 우리나라를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임시정부 내에서 갈등을 겪고 결국 1925년 임시정부에서 탄핵되어 쫓겨난다. 이때 신채호는 이승만에 대하여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승만의 행동은 참 아이러니하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신탁통치를 부탁하던 그가 막상 조국이 해방되니 이곳 <돈암장>에서 신탁통치를 격렬히 반대했으니 말이다.


한편 이승만 그는 정치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자기 주머니에 넣은 사건은 워낙 유명하다. 1918년 그가 임시정부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 독립운동자금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미주독립운동단체인 <국민회>와 소송까지 갔지만 그의 거짓말이 폭로되고 말았다. 그는 1913년 하와이로 온 이후 줄곧 한인사회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당시 한인사회에서 모아 준 돈으로 “요즘엔 한 달에 100달러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은 4인 가족 기준으로 한 달에 25~30달러를 벌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10년 뒤 약 8천달러어치 토지와 주식을 개인명의로 구매했다.


이처럼 이승만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 오기 전에 이미 정치적으로 파산선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등에 없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당시 최고의 주택인 이곳 <돈암장>에서 향후 정치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 간 것이다.

<2014-11-12> 통일뉴스


☞기사원문: 이승만 돈암장과 여운형 피격 혜화동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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