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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근대화론 허구 까발리는 일제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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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연구실 자료들 앞에 선 <숫자로 본 식민지 조선>의 엮은이 이계형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1920~30년대 조선총독부 자료의 진실

당대 지식인의 행간 읽기와 뒤집어 읽기

숫자로 본 식민지 조선

이계형·전병무 편저/역사공간·2만4000원

식민지근대화론의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일제 통계자료들을 통해 자세히 보여주는 책이 나왔다. 한국근대사를 전공한 이계형·전병무 두 연구자 편저 <숫자로 본 식민지 조선>이다. 원래 독립운동가요, 사회주의자였던 이여성과 김세용이 1931~1935년에 모두 5집까지 냈던 <숫자 조선연구>를 다시 손질해서 낸 책인데, 주로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던 읽기 까다로운 이 책을 일반인들도 읽기 쉽게 만들었다.

침략자의 식민지배가 근대화의 밑거름이 됐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은 그것 자체의 논리를 가질 순 있으나 그 근대화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는 점을 따지고 들어가면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한다. <숫자로 본 식민지 조선>은 그런 관점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을 “가장 구체적으로, 가장 설득력있게 까발리는 굉장히 중요한 문서”라고 이계형(47)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말했다. 조선총독부 공인 자료를 활용한데다 검열까지 통과해야 했기에 일제 비판 내용 상당부분이 삭제되는 등 한계가 있고 일부 인용상의 오류도 있으나, 이 교수는 “저자들이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문맥이나 행간을 읽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제목만 남은 삭제된 부분을 통해서도 많은 진실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1980년대에 영인본으로 나와 전문가들이나 보던 이 책을 2000년대 들어 촉발된 식민지근대화론·건국절 논란을 지켜보면서 일반인들도 볼 수 있게 해야겠다고 작심했다”고 했다.

예컨대 1930년도 조선에서 걷혔던 직접세를 보자. 당시 조선인 직접세 평균 부담액은 1호당 11원79전9리인 데 비해 일본인은 103원4전9리로 약 9배 차이가 났다. 1인당으로 보면 조선인은 2원20전4리인 데 비해 일본인은 25원93전3리로 약 12배에 달했다.(<조선총독부 조사 월보> 1931년 12월호) 실질 가처분소득은 일본인은 같은 일을 해도 조선인의 평균 2배가 넘었고 유입 중국인도 조선인보다 높았다. 한창 ‘근대화’되고 있던 당시 조선의 최빈계급은 바로 조선인들이었다.

이런 구조는 일제 말기로 갈수록 추세적으로 더욱 심화돼, 조선 근대화로 인한 자본축적이 주로 누구를 위해 어떻게 추진됐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1929년의 일반 노동 25종의 평균임금은 일본인이 2원97전인 데 비해 조선인은 1원76전, 중국인은 1원60전이었다. 농·어업 노동자는 중국인 임금이 더 높았고, 공장노동자도 일본인 성년공은 평균 2원32전을 받았으나 조선인은 1원, 중국인은 1.04원을 받았다.

조선 산미증식계획도 조선산 쌀의 일본 ‘수출’만 늘려 일본 ‘내지’ 식량문제 해결에 보탬이 됐을 뿐, 이를 위해 투입된 엄청난 비용부담을 조선 농민들이 지게 됨으로써 조선 농민들은 부채가 늘고 더 가난해졌으며, 소작쟁의와 이농이 급증했다.

세민(細民)의 경우 1926년 186만으로 전체인구의 9.7%, 궁민(窮民)은 25만9천여명으로 1.5%, 걸인은 2만여명이었으나 1931년엔 세민이 420여만으로 20.7%, 궁민은 약 105만으로 5.1%, 걸인은 약 16만4천명(0.8%)으로 급증했다. 세민은 ‘생활이 극히 궁박한 상태이나 우선 연명해가는 자’, 궁민은 ‘긴급구제를 요하는 상태에 있는 자’다. 1931년 이들 극빈층이 543만명(26.7%)으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훨씬 넘었다.

고임금 직군 격차는 더 벌어졌다. 교사 봉급을 보면, 일본인은 본봉 외에 60%의 수당과 18~21원의 사택료를 추가로 받아 초급이 월 45원이면 평균 90여원을 받았고 벽지 수당 10%, 국경 수당 20%, 조선어 장려비로 월 5~30원을 따로 받았으나 조선인 교사는 본봉 45원 외에 수당 한푼 없었다. 교장 봉급도 일본인이 3배 이상 많았다. 조선과 일본의 연간 교육예산 비중도 일본이 조선보다 2.5~6배나 높았다. 그나마 조선 교육예산의 대부분은 일본인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조선총독직할 관립학교들 교육비로 지출됐다. 1929년 정부 교육비 보조금 지출 내역을 보면 조선인 학생은 1인당 32전4리인 데 비해 일본인은 2원61전6리로 8배나 많았다. 조선인은 학령아동의 19.9%만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인은 99.8%가 취학했다.

그 결과 1930년도에 조선사람 중 한글 해독자는 15.7%, 일본어 해독자는 1.7%, 둘 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은 6.5%로 문맹자가 76.1%나 됐다. 조선인은 총인구의 97%, 일본인은 2.5%였으나 신문·잡지 등 언론매체는 일본인이 633종, 조선인은 93종을 발행했다. 병원 이용자도 일본인들이 훨씬 많았는데, 이는 비싼 이용료 외에 의사와 사무관, 약제관, 간호사까지 거의 모두 일본인들이어서 조선사람들이 말이 통하지 않았던 것도 큰 원인이 됐다.

이 교수는 “세로짜기의 국한문 혼용에다 고어체인 총 750쪽의 5집을 읽기 쉽게 옮기고 교열하는 데만 1년 넘게 걸렸다”며 사진자료까지 보탠 520여쪽의 <숫자로 본 식민지 조선>이 원서 내용을 충실히 담았다고 했다. 그리고 강조했다. “역사를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2014-11-09> 한겨레

☞기사원문: 식민지근대화론 허구 까발리는 일제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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